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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스터 Y Nov 26. 2019

줄리아 듀코나우의 <로우>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는 주장은 무엇 때문에 필요한 질문인가. 우리는 소와 말이 다르다는 것을 분류하기 위한 목적 이외에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존재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 증명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들은 항상 인간 중심적이다. 인간이 내린 분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토끼의 관점에서 인간과 호랑이는 다른 것일까? 인간은 인간들이 동물과 다르다는 답을 얻어야만 인간들의 세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인간을 먹어도 동물을 먹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결론이 나올 테니까.     


 줄리아 듀코나우의 인터뷰에 따르면 우리 곁에는 식인 풍습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식인을 하는 존재를 타자로 밀어내고, 우리 곁에 없는 뱀파이어나 늑대인간은 주체성을 갖고 행동하는 인간으로 만든다는 사실이 항상 의문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의 팔을 물어보는 것, 그리고 그 행동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 것도 듀코나우는 지적했다. 우리는 식인 본능을 가진 것일까? 듀코나우는 식인을 소재로 삼았지만 한 가지 전제를 깔고 영화를 진행한다. 강간당한 여성과 강간당한 원숭이는 같을까? 쥐스틴은 이게 같다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동기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만약 이 명제가 같다고 주장된다면 인간의 육식은 어떤 결과로 도출되는가? 쥐스틴의 동기들은 육식하지만 쥐스틴은 채식주의자다. 그녀는 마치 수의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라면 동물의 생명이 인간의 생명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쥐스틴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토끼 생 콩팥을 먹게 되고 육식에 대한 본능을 일깨운다. 영화는 두 가지 플롯으로 진행된다. 둘 다 모두 성장 플롯이지만(물론 모든 영화는 성장 플롯이다) 하나는 식인 본능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성장이고, 또 다른 하나는 소녀 쥐스틴이 여성 쥐스틴으로 성장하는 내용이다. 어울리지 않는 두 플롯이 학교로 상징되는 억압 아래에서 진행되는데 마치 꽈배기처럼 두 가지가 얽혀서 진행된다. 중요한 건 하나는 성공적으로 끝나고, 다른 하나는 실패한다는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보류한다.     


 우선 식인자로 성장하는 내용부터 살펴보자. 위에서 언급한대로 토끼 생 콩팥을 먹고 몸에 이상이 생긴 쥐스틴은 양호실을 찾는다. 발진이 일어났고 피부가 벗겨지는데 의사는 스트레스 때문이거나 혹 성병이거나 혹 식중독 증상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이건 몸의 반응이다. 그동안 몸이 겪지 못했던 무언가를 겪었기 때문에 몸이 반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반응을 발진으로 묘사하지만 사실 이건 껍질이 벗겨지고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쥐스틴은 이후 다시는 채식주의자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상하리만치 육식에 대한 본능을 느끼는 쥐스틴은 스테이크를 먹기 시작하고, 연어를 먹고, 알렉스의 잘린 손가락까지 먹어치운다. 그런 다음 알렉스는 쥐스틴을 마치 어미가 새끼에게 살아가기 위해 사냥을 가르치듯 인육을 먹기 위해 어떤 방식으로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하지만 쥐스틴은 알렉스의 방식을 거부한다.      


 이와 동시에 알렉스는 쥐스틴을 여자로 만들기 시작한다. 쥐스틴에게 옷을 빌려주고 꾸미는 법을 알려주면서 심지어 왁싱을 해준다. 중요한 건 브라질리언 왁싱 장면은 제모를 보여주는 장면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알렉스의 잘린 손가락을 쥐스틴이 먹는 장면이다. 그러니까 이 장면은 쥐스틴이 처음으로 인육을 먹는 장면이다. 영화는 이런 방식으로 두 가지 플롯을 교묘하게 섞어가며 진행한다. 보부아르는 <제2의 성>에서 분명하게 여성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고 지적했다. 쥐스틴은 그렇게 여성화되는 것에 성공한다. 어울리지 않던 구두를 신고, 어울리지 않던 원피스를 입고, 어울리지 못하던 클럽에 어울린다. 그리고 아드리안과 첫 경험을 한다. 발진으로 치료받던 날 의사는 뚱뚱한 여성 이야기를 해주면서 평범하게 지낼 수 있는지 물었다. 그다음 장면은 선배의 폭력이고, 그다음은 기저귀를 차고 수업을 듣는 쥐스틴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마치 이 장면들의 순서는 쥐스틴이 이 폭력적인 장소에서 적응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과 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점은 위에서 언급했듯 브라질리언 왁싱 장면이다. 이 장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여성에게 털은 머리털 말고 존재해선 안 된다. 그건 우리 사회가 정한 여성을 억압하는 방법의 하나다. 알렉스는 쥐스틴에게 제모를 해주려고 했고 그 결과로 손가락이 잘렸다. 즉, 여성을 억압하는 중에 손가락이 잘려나간 것이다. 그런데 이 결과가 깨어난 식인 본능에 처음으로 대응한다. 여성의 억압과 식인을 하나의 장면에 넣은 것인데 우리는 이 장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평범하다는 건 특별한 점이 없어야 한다. 쥐스틴은 채식주의자였고 여성의 역할에 어울리지 않는 이미지였다. 하지만 수의 학교에 입학하면서 식인 본능이 깨어났고 여성으로 만들어졌다. 즉, 사회가 정해놓은 기준에 맞춰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감추거나 변형시켜야 한다. 그랬을 때 인간은 과연 멀쩡할 수 있을까? 듀코나우는 병원에 가면 뭐든 스트레스라고 판단하는 것이 불만이었다고 했다. 스트레스. 그 스트레스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억압을 식인 본능의 억압과 여성에게 가해지는 억압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한다면 이것은 여혐 영화가 된다. 쉽게 말해서 여성으로서 억압당하고 있는 것이 해방된다면 식인과 같다는 것일까? 혹은 그 억압이 남성을 대상으로 한 복수의 쾌락으로 읽어야 하나? 그런 영화가 있다. 페미니즘 영화라는 이름 아래에서 남성에게 폭력을 가하면서 쾌락을 얻는 영화들. 하지만 그건 폭력 영화지 페미니즘 영화가 아니다. 이는 쥐스틴이 윤리적 딜레마에 서 있기 때문에 성립이 안 된다. 그녀는 단 한 번도 남성을 쾌락의 대상으로 먹지 않았다. 아니, 쥐스틴은 단 한 번도 남성을 먹은 적이 없다. 혹시 여성이 억압에서 해방되는 것이 식인 본능이 깨어난 것처럼 지금의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아닐까. 마치 오래전 기독교에서 여성들에게 교육, 일자리 등을 주는 것은 위험한 행위라고 주장했던 것처럼.      


 쥐스틴은 식인 본능이 깨어났지만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알렉스는 매번 사고사로 위장한 사람들을 먹지만 그런데도 아드리안을 죽였을 때 그녀는 스스로 큰 충격을 받는다. 이건 무슨 차이일까. 이 차이를 설명하는 게 이 영화를 설명하는 것이다. 쥐스틴은 알렉스의 훈육을 거부한다. 이건 이성적 판단이다.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는 판단. 인간들에겐 3대 금기가 있다. 살인, 근친상간, 식인. 식인을 위해서면 살인을 해야 한다. 하지만 알렉스의 행위는 살인을 한다기보다는 사람을 죽게 하는 행위다. 이 차이는 알렉스의 입장에선 분명하게 다르다. 알렉스는 단지 아드리안이 동생의 친구였기 때문에 자신이 살해하고 그렇게 망연자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건 아마도 자신이 지켜온 윤리관이 무너졌기 때문에 받은 충격일 것이다. 즉, 알렉스는 사람을 먹되 사람을 죽이진 않는다는 철칙을 갖고 있다. 쥐스틴은 알렉스의 행위가 자신의 윤리에 맞지 않기 때문에 알렉스의 방법을 거부한다. 하지만 그 방법까지 거부한다면 쥐스틴은 식인욕을 채울 수 없다. 그걸 제일 잘 아는 사람은 알렉스다.      


 그러므로 알렉스는 쥐스틴이 클럽에서 만취했을 때 시체를 가지고 쥐스틴의 본능을 자극한다. 어미의 훈련을 거부한 새끼에게 다시 한 번 가르치기 위한 행위다. 이렇게 표현한 까닭은 듀코나우는 분명하게 이렇게 찍었다. 자동차 사고를 내는 장면도 사냥하는 것처럼 찍었고, 축구를 하는 아드리안을 토끼가 뛰어다니는 것처럼 찍었으며, 그를 지켜보는 쥐스틴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찍었다. 결정적으로 쥐스틴과 알렉스의 싸움은 짐승들의 싸움처럼 찍었으며 그들의 싸움을 말리는 행위를 짐승을 다스리는 인간들의 행위처럼 찍었다. 즉, 쥐스틴과 알렉스는 짐승의 상태다. 그렇다면 다시 원론적인 질문을 던지겠다. 인간과 짐승의 차이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분명하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성의 차이라고 답했다. 듀코나우는 윤리적 딜레마라고 답한다.   

   

 다만 이렇게 바라봤을 때 쥐스틴이 속한 세계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답해야 한다. 그 세계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없는 상태에 있는데 질문을 던질 수 없다. 문제는 억압 아래에 딜레마 없는 확신이다. 왜 강간당한 여성과 강간당한 원숭이가 다른가? 이 질문에 다르다고 답하는 순간 무엇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해야 한다. 만약 아리스토텔레스의 답을 가지고 온다면 이성적 판단 아래에 강간당한 여성과 강간당한 원숭이는 다르다고 할 수 있는지에 답을 해야 한다. 강간당했다는 수치심과 고통을 자각하고 있는 두 생명체가 다른 이유는 무엇인가. 혹 같다고 답하는 순간 인간이 행하는 육식에 대해서도 답해야 할 것이다. 요점은 같은지 다른 지가 아니다. 질문을 던지는 게 요점이다. 왜 여성은 만들어져야 하는가? 인간은 이데올로기의 산물일 수밖에 없지만 지금 우리의 세계는 교육을 받은 인간보다 훈련을 받은 짐승들이 더 많은 세계는 아닐까.        


 자신의 본능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알렉스는 결국 법의 처벌을 받는다. 자신의 윤리를 지키지 못한 결과는 법의 처벌이다. 아드리안을 살해하고 나면 쥐스틴과 알렉스의 위치가 바뀐다. 어미의 자리에서 쥐스틴을 훈련시키려고 했던 알렉스는 자식의 자리로 뒤바뀐다. 이때 쥐스틴이 알렉스를 씻기는 행위는 인간의 행위다. 이 샤워 장면엔 쥐스틴 자신도 언젠가는 알렉스처럼 될 수도 있다는 자각이 담겨있다. 그 자각을 듀코나우는 정확하게 찍었다. 샤워 장면 이후 면회 장면에서 쥐스틴과 알렉스는 겹쳐져 있다. 이건 그 안에 있는 것이 알렉스가 아니라 쥐스틴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건 굉장히 중요하다. 우리가 어렸을 때 우리의 팔을 깨물어 보았듯 우리도 언젠가 우리 안에 사회에서 용납하지 않은 욕구가 깨어날지 모른다. 그걸 이해하지 못한다면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쥐스틴은 학교에서 원하는 여성상으로 성장한다. 그녀는 구두를 신고 야한 옷을 입고 클럽에서 춤을 춘다. 그리고 아드리안과 섹스를 한다. 그런데 아드리안은 게이다. 듀코나우는 노골적으로 그가 게이라는 사실을 몇 번이고 환기시킨다. 심지어 쥐스틴과 섹스하기 전에 게이물 야동을 본다. 쥐스틴은 아드리안과 섹스를 하면서 아드리안을 먹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아드리안은 계속해서 피하지만 쥐스틴은 자신의 팔을 물어버리면서 욕구를 참는다. 이때 쥐스틴은 카메라를 바라본다. 금기. 먹어선 안된다는 금기. 봐서는 안된다는 금기. 아드리안은 섹스 후 쥐스틴에게 퉁명스럽게 대한다. 그러자 쥐스틴은 자신과 섹스한 뒤 태도가 변했다며 아드리안을 공격하지만 아드리안은 자신의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것이다. 게이인 아드리안이 여자와 섹스를 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이성애자인지 양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알고 있는가? 그건 훈련받은 건 아닐까?       


 영화는 계속해서 우리가 훈련을 받은 건지 교육을 받은 건지를 묻는다. 우리가 육식을 하는 건 당연한 것인가. 여자가 소변을 앉아서 누어야 하는가. 제모는 해야 하는가. 사람은 먹어선 안되는가 등. 이것들은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내린 결론인가. 아니면 사회가 그렇게 하라고 억압한 것인가. 인간이라면 집단에 순응하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것이 맞는가.      


 영화는 반전으로 끝맺음한다. 쥐스틴과 알렉스의 식인 본능은 유전으로 대물림 된 것이다. 이 반전은 반드시 필요한 결말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쥐스틴과 알렉스, 그리고 그녀들의 엄마를 제외하고도 이 세상엔 식인 욕구를 느끼는 인간들이 많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무리한 추론을 해본다면 식인 욕구를 느끼는 유전자는 딸한테만 전달되는 것인가. 혹은 딸만 낳을 수 있는 유전자인가. 우리는 영화 속에서 식인 본능을 느끼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      


  2019년 1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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