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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철 Oct 08. 2018

박세당 고택

경향신문 <윤희철의 건축스케치> 2018.10.11일자)


 의정부 장암역 주차장 맞은편에는 하나의 판에 4개나 되는 문화재가 있음을 알리는 표지판이 있다. 서계 박세당 사랑채와 함께 박세당 묘역, 노강서원, 석림사 등 4개의 문화재의 존재를 알리는 표지판이다. 수락산 등산로이기도 한 계곡 변의 좁은 도로를 따라 잠시 오르노라면 계곡 건너편에서 고즈넉하게 계곡 쪽으로 긴 처마를 드리우고 있는 오래된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박세당 고택임을 금방 알 수 있다. 계곡 쪽에 위치한 출입구는 문이 잠겨 있어 고택으로 곧바로 들어갈 수 없게 되어 있다. 하여 계곡과 함께 고택의 지붕이 어우러지는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기 위해 오르던 길을 잠시 멈춰서 본다. 도로가 등산로이다 보니 연변에는 등산객을 상대로 한 음식점과 간판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있어 고풍스런 한옥의 풍광이 제 맛이 나질 않는다. 그러나 등산객이 많지 않던 시절 이런 계곡에 접해 있는 한옥의 누마루에 앉아 있노라면 멋진 시 한 수가 절로 나오지 않았을까?


계곡에서 바라 본 박세당 고택(흑백)
계곡에서 바라 본 박세당 고택(컬러)

 이 고택의 주인이었던 서계(西溪) 박세당(1626-1703)은 32세 때 문과에 장원한 후 내외 관직을 두루 맡아 일을 하다가 결국 학문적 신념 때문에 40세에 관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낙향하여 집필과 제자를 가르치던 그는 이곳 사랑채에서 농사관련 저술인 ‘색경(穡經)’을 집필하여 실사구시의 사상을 피력하였다. 그의 치적이라 할 수 있는 저서 ‘사변록(思辨綠)’은 당대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주자학을 비판하는 내용이어서 결국 ‘사문난적(斯文亂賊:못된 글로 세상을 어지럽히는 도적)’으로 몰리고 유배되는 등 힘든 말년을 보내게 된다. 

 서계 고택은 안채와 안사랑, 바깥사랑, 행랑채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고 바깥사랑채만 남게 되었다. 관어정(觀魚亭)이라고 현판이 씌어있는 바깥사랑채 뒤쪽에는 전쟁 때 타고 남은 안채의 자재들을 모아 건립한 영진각(影眞閣)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에는 서계와 부친 박정(朴정)의 영정 2점이 모셔져 있다. 사랑채 앞쪽에는 수령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가 이 장소의 세월과 품격을 잘 웅변해 주고 있다.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서 서쪽을 바라보노라니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도봉산의 위용이 가슴 벅차게 다가온다.  

 종부 김인순(65세) 씨와 사학을 전공했다는 며느리의 손길이 부산하다. 영진각에 모신 두 분의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준비하느라. 정2품 이상의 선조를 모신 가문에서나 가능하며 4대가 지나도 영구히 위패를 사당에 두면서 지내는 제사라 한다. 문중이 모여들 마당에 설치된 많은 행사용 천막의 숫자에서 이 가문의 기풍이 느껴진다. (경향신문 <윤희철의 건축스케치> 2018.10.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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