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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희철 Mar 21. 2024

파리 전경

파리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그려 보았다. 

파리를 가로지르는 세느강과 특히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이 이 도시가 파리임을 잘 보여준다.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개최되었던 파리박람회(1889)의 상징물로 세워진 높이 324m의 에펠탑은 파리뿐 아니라 프랑스의 상징물이다. 이 에펠탑은 처음 설치될 당시 모파상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층이 아름다운 파리와 어울리지 않는다며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었다. 게다가 박람회가 끝난 이후 철거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1차대전이 발발하자 이 타워 꼭대기에 군사용 안테나를 설치하여 통신탑의 기능을 하게 됨으로써 철거를 면하게 되었다. 오늘날 전 세계 여성들이 프러포즈를 받고 싶은 곳 1위로 쏜꼽히고 매년 수백만 명의 방문객이 찾고 있는 최고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파리가 오늘날의 이미지로 틀을 잡게 된 것은 나폴레옹 3세 시절(1808~1873) 오스만 남작에 의한 파리 대 개조계획 덕분이다. 이 계획에 의해 중세까지 이어오던 파리의 좁은 골목들이 가로수가 놓인 넓은 불바르(Boulevard)의 가로체계로 바뀌어 오늘날의 도시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파리가 역사도시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데에는 2차대전 때의 독일군 사령관 콜티츠의 공이 컸다 한다. 파리가 독일군에 의해 함락되었다가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독일군이 철수를 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때 히틀러는 사령관 콜티즈에게 파리를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명령을 받은 콜티츠는 많은 고민 끝에 “나는 히틀러의 배신자가 될지언정 파리를 불바다로 만들어 인류의 죄인이 될 수는 없다”라며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하고 항복하는 길을 택하였다. 당시 히틀러는 9번씩이나 전화를 해서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Brennt Paris?/Is Paris Burning?)”라고 물어 보았다고 한다. 히틀러의 이 질문은 1966년 르네 클레망 감독의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Paris Brule-t-il?)'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콜티츠는 전쟁이 끝난 뒤 전쟁포로로 2년 정도 수감되었지만 파리를 파괴하지 않은 공으로 풀려나 감사장과 명예시민증까지 받았다고 한다. 

적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보여준 역사와 문화에 대한 통찰력과 히틀러의 명령을 거역할 수 있었던 용기가 깊은 여운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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