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부터 에세이 쓰기 모임에 나가고 있다. 모든 모임이 그렇지만, 이 모임도 첫 시간은 자기소개로 시작했다. 아이엠 그라운드 자기소개하기. 다른 사람 소개를 크게 주의 깊게 듣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주의는 온통 내 소개를 어떻게 할지, 어떻게 하면 더 독특하면서, 친근하게 보일 수 있을지 생각하는 데 정신이 팔렸기 때문이다. 짝짝짝. 옆 사람의 소개가 끝나고, 드디어 내 차례가 왔다.
"안녕하세요. 순남입니다. 순댓국을 좋아하는 남자라는 뜻이죠. 허허허. 순댓국을 하루에 세 번 먹을 때도 있고요. 일주일에 3-4일 먹을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순남이라고 부릅니다."
한차례 소소하게 미소 짓는 사람들, 홍홍홍 수줍게 웃어주는 사람들.
(그래 좋아. 이 정도 반응이면 내가 원하는 대로야.)
수줍게 안심하며, 무사히 소개를 끝냈다. 수염을 잔뜩 길렀는데, 어수선한 인상을 크게 주목하지 않은 것 같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잘됐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마음에 들었다. 잘 쓴 에세이를 읽어 보면서, 어떤 부분들이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는지, 자세히 설명해 주었기 때문에, 새롭게 배우는 부분들이 많았다. 과제가 주어졌다. 과제는 '마음에 걸리는 것'을 에세이로 써오라는 것.
마음에 걸린다는 말을 들었을 때, 백설공주가 떠올랐다. 공주는 독 사과를 먹고, 독이 목에 걸려서 죽을 뻔한다. 왕자의 키스를 받고, 목에 걸린 독을 뱉어 내면서 (아마 엄청 격정적으로 키스했을 걸) 살아난다. 이야기는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백설공주라는 이미지가 떠올랐을 때부터 과제의 주제를 정할 수 있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켁켁. 차마 뱉어지지 않고 걸리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백설공주처럼 과연 뱉어내고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가 될 수 있을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거짓말 때문이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순남, 즉 순댓국을 좋아하는 남자라는 말. 일주일에 3,4번은 먹는다는 말. 사실, 순댓국을 좋아하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일부러 맛집 찾아가거나, 엄청 자주 먹거나.) 그것이 진실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순댓국을 좋아하는 남자라고 했는가.
사회 초년생 때, 점심시간마다 팀장은 물었다.
"막내야, 오늘 뭐 먹지?"
나는 A형이고, 우유부단해서 선택을 잘 못했다. 특히 양식을 좋아하는 대리와 한식을 좋아하는 과장이 눈치를 줘서 항상 뭐라고 말해야 할지 고민이었다. 어떤 때는 일보다 점심 메뉴 고르는 게 더 고역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순댓국을 처음 먹어봤다. 너무 맛있었다. 그다음번에 팀장이 메뉴를 물었을 때, 초롱초롱하고 순진 무결한 눈빛으로 또 순댓국이라고 대답했다. 그 이후로도 매번 순댓국이라고 하니까, 더 이상 메뉴를 묻지 않았다.
작은 깨달음이 왔다. 애플의 스티브잡스는 터틀넥과 청바지만 입었다. 메타의 마크 주커버그는 항상 똑같은 회색 티셔츠만 입는다. 아, 걔네들도 뭐 입을지 묻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귀찮았구나. 나도 먹는 걸 고민하지 말고, 무조건 순댓국이라고 말하자. 뭐 먹고 싶어? 순댓국이요. 우리 뭐 먹지? 순댓국! 이번주 모임 때 뭐 먹을까? 순댓국 먹자!
자연스럽게 나의 의견은 '그 외 의견'이 되었다. 그래서 메뉴 선정에 크게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삶이 단순하고 편해지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의견을 말하고,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되고, 어떤 메뉴로 할지, 힘들게 생각하고 조사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순댓국을 매일 먹고 싶은 사람은 당연히 없다.
그럼에도 순댓국을 좋아하는 남자 순남이라고 하면 사람들의 머릿속에 강렬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그래서 별 고민 없이 계속해서 그 별명을 썼다.
이번 에세이 모임 소개에서도 순댓국을 거의 매일 먹는다는 거짓말을 했다. 지금까지는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나는 늘 순댓국을 좋아하는 남자, 순남이었다.
하지만 최근 회사를 휴직하고 나란 사람에 대해서 돌아보면서 자기 소개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왜냐하면 나는 또 상투적이고, 관습적으로 스스로를 한정 짓고 있었으니까. 순남이라는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은 곰탕 같은 별명으로.
세상엔 당연한 것이 없다. 정답도 없다. 주관적인 해석과 해답이 있을 뿐인데, 이번에도 정해진 답을 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마음에 걸린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다.
두려움과 불안.
에세이 수업에 나가게 된 이유 중 하나는 두려움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누군가 에세이를 쓰면 마음 돌보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기 때문이다.
얼마전 휴직을 했다. 휴직의 이유는 '우울증과 공황으로 인한 병가'였다. 나름 잘 적응한다고, 잘 버틴다고 생각해 왔다. 사회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누구와도 쉽게 대화하고 친해질 수 있었다. 회사를 통틀어 가장 순남, 순한 남자였다. 이것이 문제였다. 너의 일도 나의 일이 되고, 개인 간의 문제도, 팀 간의 문제도 책임은 나의 것이 되었다. 요구 사항은 많아지는데, 권한은 없고, 어느새 무능력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여전히 순댓국을 좋아하는 순남입니다, 헤헤. 하며, 사람들의 웃음을 얻어냈지만, 속은 썩어 가고 있었다. 모든 이에게 웃음을 주려는 어릿광대의 결말은 신경정신과와 갑작스러운 휴직이었다. (물론, 번아웃이 온 이유가 좋은 사람 콤플렉스 때문만은 아니다.)
번아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을 싫어한다. 오직 어릿광대가 되어 관객들이 기뻐하길 바라며, 최선을 다한다. 관객들의 박수를 기대하며, 공을 굴리는 광대의 방식은 잘못된 것이었다. 아니, 잘못은 아닐지라도, 스스로 괴로운 일이었다. 괴롭히고 학대하는 일이었다.
순남은 순댓국 말고도 다른 메뉴도 좋아한다. 해산물도 좋아하고, 날로 먹는 것도 참 좋아한다. 그러나 순댓국이라는 정해진 답을 만들어서 나만의 의견을 포기해 왔다. 포기가 익숙해지면 무기력해진다. 할 수 있는 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나, 말할 수 있다. 좋아하면 좋아한다고, 싫어하면 싫어한다고. 익숙해진 습관을 바꾸는 방법은 바꾸고 싶은 방법을 자꾸 써서 익숙해지는 것. 그러니까 나의 경우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