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 13일
비가 온 다음 날, 모래놀이 하기 딱 좋은 날이다. 모래가 촉촉이 젖어 물을 따로 섞지 않아도 단단하게 뭉쳐지고, 물을 아낄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오늘도 오전에 비가 그치고 흐린 날이라 아이들과 함께 운동장으로 나갔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며 가을이 왔음을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매일 보던 운동장의 나무와 덩굴잎도 조금씩 붉게 물들고 있었다. 아이들은 눈으로, 또 바람으로 가을을 알아차린다.
햇볕이 쨍쨍한 날엔 그늘을 찾아 다니던 아이들이 오늘은 운동장 한가운데서 마음껏 논다.
“선생님, 제 이름 썼어요!”
“선생님 이름도 써볼까요?”
주아가 민혁이에게 글자를 알려주자, 민혁이는 손에 든 돌멩이로 쓱쓱 글자를 써본다. 자신이 쓴 글자를 보고 뿌듯한 표정으로 외친다. 그 모습을 본 다른 친구들도 손에 맞는 크기의 돌과 나뭇잎을 찾아 자신만의 글자를 그려본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쓰고 싶어서 쓰는 글자들이다.
“우리가 도화지에 들어왔다!”
맞아. 여기 운동장이 바로 도화지야.
“저기 나무도 우리가 그렸고, 하늘에 나는 새도 우리가 그렸어요!”
아이들은 손가락, 나뭇가지, 돌멩이를 붓 삼아 운동장이라는 커다란 도화지 위에 그림을 그려간다.
“천내천에 유은호랑 주아 집을 그렸어요.”
“맞다! 유치원도 그려야지.”
아이들은 1학기 때 찍었던 ‘우리 동네를 소개합니다’ 영상을 떠올렸는지, 나뭇가지를 마이크 삼아 자신이 그린 동네를 소개하기 시작했다.
“우리 동네를 소개합니다~!”
영린이는 나뭇가지 두 개를 연결해 터널을, 주아는 나뭇가지를 세워 잎이 떨어진 나무를 표현했다.
“선생님, 이건 나무예요. 겨울이라서 잎이 없어요.”
아이들의 그림에는 계절의 변화, 터널, 도로, 횡단보도, 나무, 화장실까지 담겼다. 작은 종이에 그릴 때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풍부한 표현이었다.
“선생님 집도 연결하고 싶어요!”
“그래? 선생님 집은 유치원에서 멀리 있어서 저~기쯤 있을 것 같은데?”
아이들은 돌 붓을 들고 운동장 끝까지 길을 이어간다.
“선생님, 여기요! 여기가 선생님 집이에요!”
멀리까지 달려간 은호와 민혁이가 큰 소리로 외친다.
그때, 하늘 위로 새 한 마리가 날아가자 한 아이가 외쳤다.
“저기! 우리가 그린 새가 날아간다!”
아이들에게 운동장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다. 그들의 상상과 손끝이 닿은, 살아 움직이는 세상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도화지예요.”
“이렇게 큰 도화지에서 그리니까 어땠어?”
“마음껏 그리니까 재밌었어요!”
“선생님 집이랑 우리 동네를 연결해서 그릴 수 있어서 좋았어요.”
아이들과 수업을 할 때 종종 그림그리기를 한다. 흰 종이를 제시하면
그럴 때면 아이들은 “저 못 그려요…” 하며 망설일때가 있다. 그림을 잘 그려야 한다는 부담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아이들을 보면 “잘 그리는 게 아니라, 네 생각을 표현하는 거야”라고 말하며 격려하곤한다.
오늘은 그 누구도 “못 그리겠어요” 하지 않았다. 머뭇거림도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도화지에서 손끝으로, 온몸으로,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 아이들. 그 모습이 마치 세상에서 제일 자유로운 예술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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