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얘기할 때조차도 그것에 백 퍼센트 공감하기는 힘든 일이어서 누군가 무얼 말하거나 어떤 문장을 읽을 때면 어디 뭐라고 하는지 지켜보자는 삐딱한 심사가 어느 정도
작용하기 마련이다.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시민의 불복종>은 약 50쪽가량의 짧은 글이다. 하지만 책을 펼쳐서 그 첫 문장을 읽는 순간 나는 요즘 말로 가슴이 뻥 뚫리는 사이다를 맛보게
되었다.
「나는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표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하루빨리 조직적으로
실현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 p17
바로 위와 같은 문장을 1800년대 중반에 이제 미국이라는 나라가 기틀을 완성하기도 전에 원숙한 사상가도 직업 정치인도 아닌 한 명의 젊은 학구파 지식인이 발언했다는
사실이 나는 소름이 돋도록 놀라웠다. 어려서부터 대한민국이 민주화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국민들의 정치 수준이 낮아서라는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나에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정치의식은 바로 올바르게 행동하는 한 사람 또 한 사람의 신념에
의해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단 한 문장으로 소로우가 내게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 p21
그는 입으로만 외치는 신념은 세상을 바꾸지도 노예제를 폐지할 수도 멕시코 전쟁(부당한 전쟁)을 막아내지도 못한다고 말한다. 그릇된 정치를 거부하는 실제적 행동을 실천하는 사람들(예를 들어 소로우처럼 인두세 납부를 거부하거나 종교세 납부를 거부한다거나)이 늘어나야만 정치가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의 입법자, 정치가, 변호사, 목사 그리고 관리 등이
주로 자신의 머리를 가지고 국가에 봉사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도덕적인 변별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뿐만 아니라 악마도 함께 섬기게 된다. 」 p23
그는 또 정치인은 절대 바뀌지 않는 종족이므로 그들을 바꾸기 위해서는 실제적으로
그들이 올바른 입법 행위를 할 수 있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얘기한다. 바로 오늘날까지도 절대 바뀌지 않는 정치세계의 본질을 1800년대에 이미 소로우가 그 핵심을
낱낱이 밝혀냈으니 나로서는 글을 읽는 내내 신음에 가까운 감탄사가 계속
흘러나왔다.
실로 인도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마하트마 간디 선생님이 <시민의 불복종>을 읽고
이 글이 주장하는 바를 비폭력 불복종 운동으로 실천했으니 이 글이 지닌 힘은
이 글을 읽는 이라면 그 누구라도 공감하게 될 것이다. 나는 소로우의
글을 읽으며 나에게 '국가'가 지닌 의미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되었다. 5.18을 겪은 광주에서 태어난 나에게 국가는 저항하는 자들은 불순세력으로 잡아들이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성인이 된 이후에도 국가는 언제든지 필요에 의해 나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을 수 있는 '공권력'이라는 이름의 난폭한 폭군이었으며 2mb와 박근혜를 거치며 국가는
조지 오웰의 『1984』처럼 얼마든지 자신들의 논리를 위해 역사를 고쳐쓸 수 있는
무소불위의 최상위 포식자였다.
하지만 군부독재에 저항한 5.18 당시의 광주사람들 중에 <시민의 불복종>을
단 한 줄이라도 읽었던 사람이 있었을까?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자신의 사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있어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라 부도덕하고 불합리한 정부에 맞서 인두세 납부를 거부해오다가 감옥에 투옥된 시간 동안에 느낀 감회를 담아 이 책을 썼던 것처럼 부당함에 맞서 옳음을 주장하는 데는 배움도 나이도 중요치 않다는 사실을 나는 이 글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소로우는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지 않고 어떻게 이렇게 가슴이 뜨거워지는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 사실 <시민의 불복종>을 쓰는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그가 나고 자란
콩코드 지방의 자연임을 나는 <시민의 불복종> 뒤에 실린 소로우의 글들을 통해
발견할 수 있었다.
「사물이 우리 시야로부터 가려져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시선이 통과하는
진로 밖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과 눈을
그 사물에다 전적으로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가을의 빛깔들> p129
어쩌면 소로우는 정치의 한 복판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거짓과 자기 검열 그리고 자기기만에 물들지 않은 글을 쓸 수 있었던 건 아닐까? 도시의 밝은 조명 속에서 밤하늘의
별빛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것처럼 도시의 소음과 사람들로 오염되지 않은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소로우의 정신은 오래가는 향기를 지닌 정신의 야생
사과를 길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봄과 함께 파릇파릇해지고 가을과 함께 노랗게 익어가라!
각 계절의 영양분을 보약처럼 들이켜라.
그것이야말로 당신을 위해 특별히 조제된 진정한 만병통치약인 것이다.
~당신이 담근 술을 마시지 말고 자연의 여신이
담가주는 술을 마시라. 」 <계절 속의 삶> p142
깊은 산속의 옹달샘이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 것처럼 소로우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이후 세상으로 나아가는 대신 고향에 돌아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것을 택했다. 귀와
볼이 떨어져 나갈 만큼 시린 바람 속에서 황소가 뜯어먹지 못하도록 자신을 지켜낸 이가 아릴 정도로 시디신 야생 사과를 양쪽 주머니에 가득 담아 그걸 먹으며 길을 걷는
소로우를 글 속에서 발견한 순간, 나는 콩코드 지방의 햇빛과 바람이 야생 사과와 포도만 키워낸 것이 아니라 사색하는 소로우의 정신도 키워냈음을 알게 된 것이다.
「일부 사과의 몸체에 찍혀 있는 붉은 반점들은 그 사과가 지켜본
어떤 아침과 저녁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어두운 녹색의 얼룩들은 그 사과 위로 지나간 구름들과
흐릿하고 축축했던 날들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 」 <야생 사과> p193~194
여름 한 철을 보낸 후 가을에 물들어가는 콩코드 지방의 정취를 그처럼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을까! 가을볕에 자신의 뺨을 맡긴 채 자신을 스쳐가는 바람과 구름과
햇빛의 흔적을 정직하게 자신의 얼굴에 담아낸 야생 사과에 대한 소로우의 감탄사가
담긴 문장을 읽으며 나는 사람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 있다는 사실에 또 놀라게 되었다.
참으로 소로우는 자신을 스쳐가는 하늘과 구름과 햇빛과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사물들을 거짓 없이 그대로 담아내는 맑은 샘과 같은 사람이다. 그러니 그런 명징한 정신에
거짓이나 부당함과 불합리가 깃들 수 없는 건 당연지사다. 목숨마저도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생을 그 마지막 날까지 일기를 써가며 그날그날 자신 주변의 소박한 자연에 감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