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수가 세화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저녁 9시경이었다. 서류가방을 든 장변호사는 희수를 앞세워 세화의
집 대문을 걸어 들어왔다. 잠든 아기를 보며 겨우 한 시름을 돌리던 백송은 장변호사를 보자마자 만만치 않은 사람임을 알아보고 눈동자의 붉은 고리를 감추기 위해 눈을 내리 감았다.
"할머니, 아휴... 뭔 난린지......
아이고 그나마 이분이 경찰청에 와서 도와주신 덕분에 지금 왔지...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경찰조사를 받느라 잔뜩 긴장해서 주눅이 들었던 희수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넋두리를 털어놓는 동안
장변호사는 명함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백송에게 건넸다.
"제 의뢰인인 구 세화씨와는 어떻게 되시는 관계이십니까?"
첫 질문부터 다.나.까. 육하원칙으로 치고 나오는 장변호사의 기세에 백송은 피곤해서 눈을 못 뜨겠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 속으로 오후에 온 형사처럼 얼버무려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잉... 내래 세화 할머니 이복동생이디...
내래 함경도 해주 출신인디, 울 아바디가 남쪽 땅에 동생이 있다카데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아바디를 찾는 동생 이화를 만났디 안칸.
그때 주소하고 연락처를 받았디..
일 년쯤 지나 아들 식구들하고 두만강을 건넜는데 나래 살고 다 죽었어.
죽다 살아 이케 와 봔 아가 배가 불러 내캉 같이 살자고 아이 함메...
내래 살 길 막막하고 세화도 그리하자니 우이 하갔어.
야래 대대로 남도 지리인걸 밴호사 선상도 알지 아이 해.
울 아바디도 그래서 이화만 놓고 울믄서 북으로 왔디."
속으로 내가 정말 이게 무슨 고생인가 싶은 백송이었지만 대대로 남도 세습무인 지리의 송사를 도맡아 처리해 온 장 씨 집안 자손을 지켜봐 온 백송은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오랜 시간 세화 어머니의 법적 대리인이었던 장변호사라면 전후관계를 이해할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 백송은 멍하게 넋을 놓고 있던 희수의 귀에 이만 집으로 돌아가보라고 전음을 전했다. 엉거주춤 일어난 희수가 머리를 긁으며 집으로 돌아갔다.
장변호사는 백송의 말을 듣고 백송의 말에 거짓이 있는지 판독이라도 하겠다는 듯 눈으로 백송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폈다.
'이 집이 오랜 시간 세습무였다는 사실은 이 마을 사람들도 모르는 일인데 그걸 알고 있다니 세화와 관련이
없는 인물은 아닌 것 같군, 일단 이 아이가 클 때까지는 보육을 위한 사람이 필요한 데 아무한테나 맡길 수도 없으니 우선은 좀 더 두고 봐야겠다.'
생각을 정리한 장변호사가 잘 자고 있는 아기를 지켜보고는 백송에게 말했다.
"저는 구 세화 씨의 법률 대리인인 장 민국입니다. 어제저녁 늦게 의뢰인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게 유지(遺志)가 될 줄은 저도 몰랐습니다.
제 의뢰인은 어제 제게 자신의 유고(有故) 시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제게 아이의 법정 후견인을 부탁했습니다. 또 아기를 보육시설이 아닌 자신의 집에서 양육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내일 정확한 부검 결과가 나오겠지만 현재의 의학적 소견상 제 의뢰인은 예기치 않은 조기 출산에 따른 과다 출혈로 종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여 할머니가 제 의뢰인의 친척을 주장하고 있고 아기의 양육과 보호를 원하신다면 저는 아기가 성년이 될 때까지 매달 생활비와 양육비를 지원하겠습니다.
물론 탈북자인 할머니가 대한민국에서 신분을 가질 수 있도록 제가 돕겠습니다."
백송의 승낙을 들은 장변호사가 돌아간 뒤 백송은 전음으로 희수를 불렀다.
'삽살.'
겨우 집에 와서 씻고 후달렸던 하루에 넌더리를 치며 소주 한 잔 마시려고 병뚜껑을 따던 순간 들려온
전음에 희수는 진저리를 쳤다.
"아... 진짜... 나한테 왜 그래. 울 할배도 그 위에 할배도 한 번도 안불었다메요.
어쩌자고 왜 하필 나냐고요."
짜증스러운 희수의 말에 백송은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게 나도 그게 왜 하필 나였을꼬.
'삽살. 이제부터 너는 매주마다 너의 손톱을 깎아서 내게 가져오너라.'
급히 따른 소주가 목구멍을 타고 싸하게 내려가자 그제야 마음이 좀 풀린 희수가 속으로 말했다.
'그건 뭐 어렵지 않죠. 내 당장 내일 가져다 드릴 테니 오늘은 그만 부르라구요.'
희수의 볼멘소리에 고개를 들어 창에 비치는 달빛을 바라보던 백송은 배가 고픈지 잠이 깨서 연신 입 주위로 주먹을 가져가는 아기를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우구슬이 이 아기에게 깃들어 있는 동안 내 몸을 유지하려면 사람의 기운을 취할 수밖에 없어.
예전 같으면 한 두 놈 데려다 빨면 그만인데, 살생을 할 수도 없고 살아있는 기운이 깃들었던
손톱이라도 취할 밖에... 무수명(無壽命)인 저 아기의 손톱은 내게 아무 소용이 없어.
아쉽지만 삽살밖에 없군...'
아기의 이름은 미호로 지었다. 출생신고는 삽살의 부름을 받은 희수가 했다. 희수는 아들만 하나여서인지
백송이 부르지 않아도 틈만 나면 미호보다 두 살 많은 아들을 데리고 미호의 집을 찾았지만 희수의 아들은 백송을 무서워했다.
천 년을 세향리에서 봄에 꽃피고 여름에 녹음이 우거지고 가을 낙엽 들고 겨울에 잎사귀를 떨구던 백송령은 이듬해 봄에는 꽃을 많이 피우지 못했다. 예년만 못한 백송령을 두고 문화재청에서는 병이 왔다며 나무줄기 여기저기에 주렁주렁 영양제 링거 수십 개를 놓았다. 그래도 백송령은 영 기운을 되찾지 못했다.
사람의 아기를 키우는 것은 역시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무로 살며 옆에서 지켜보기에는 쉬었지만 막상 닥쳐서 직접 하려니 백송은 너무 힘이 들어서 하루가 지날 때마다 흰머리가 한 움큼씩 빠졌다.
백송의 머리카락이 빠지는 것과 비례해서 미호는 하루가 다르게 살집이 올랐다.
오동포동한 팔다리를 뒤척이며 할미를 반기는 미호는 할미의 눈동자 속 붉은 고리에 자신의 모습이 비칠 때마다 까르르 까르르 웃었다. 백송은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인가 후회가 막급이다가도 미호의 웃는 모습을 볼 때면 따라 웃었지만 인간의 아기는 너무 자주 먹고 너무 자주 쌌다. 그것도 많이 쌌다.
두 시간마다 200밀리씩 먹고 하루에 열두 번 가는 기저귀에 아직은 서툴러서 잘 처리하지 못해서 묻히고 바른 속옷과 이불 빨래 등 백송의 24시간은 온통 먹이고 트림시키고 기저귀 갈고 젖병 삶고 씻기고 재우고 빨래로 점철되었다. 여우구슬이 깃들어 있지만 사람의 몸이기에 미호의 접종 수첩은 희수에게 있었고 백송령의 뿌리로 펼친 결계 밖으로 움직일 수 없는 백송 대신 희수는 택시가 쉬는 날이면 미호와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각종 검진과 접종을 도맡았다.
그렇게 미호는 고개를 가누고 목을 쳐들고 몸을 뒤집고 밀고 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