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백두
공식적인 기록으로 확인된 바는 없지만 구한말 한 무속인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풍수지리서에 따르면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918년 즈음부터 이 나라에는 백두산부터 지리산까지 이어지는 산의 혈맥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 북쪽의 백두산을 지키는 백두와 남쪽의 지리산을 지키는 지리가 그들이었는데 밝혀지진 않았지만 비밀리에 봉인된 한라산의 한라는 사람이 아니라는 얘기도 전해져 왔다.
그들은 자신의 몸을 제기(祭器)로 삼아 하늘의 기운을 담아 땅을 정화시켰다.
을사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일제(日帝)는 임진왜란 이후의 수많은 침탈을 통해 밟고 또 밟아도
들불처럼 들고 일어서는 이 나라의 백성이 두려웠다. 그들은 억압에 굴하지 않는 백성의 기질이 조선의 땅에서 나온다고 믿었다. 전봉준의 동학혁명을 총과 칼로 간신히 잠재운 일제는 방법을 바꿔 겉으로는 미개한
조선을 선진문명화 한다는 명목을 내세우면서 뒤로는 조선의 기운을 꺾을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일본 본토의 주술사들을 불러들여와 조선 땅의 혈맥에 쇠못을 박았다.
1920년에 태어난 세화의 할머니는 남도의 땅이 피 흘리며 우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열 살 즈음부터 그녀는 세화의 증조할머니와 함께 밤마다 혈맥에 박힌 쇠못을 빼러 다녔다. 일제의 서슬 퍼런 감시 아래 모녀는 밤마다 산길을 타야 했지만 땅이 내지르는 비명을 그냥 듣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남도 대무녀 지리의 노력은 반쪽의 효과밖에 거둘 수 없었다.
북쪽 대무녀인 백두가 자신의 사명을 놓은 지 벌써 사백년이 넘은지라 남과 북이 함께 혈맥을 수복해도 부족한데 백두의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밤마다 손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곡괭이질을 해서 쇠못을 빼낼 때마다 세화의 할머니는 도대체 북쪽에 있다는 백두는 무얼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무이, 근디.. 우리만 이라고 쎄빠지게 이람 뭐한단가."
"위에도 있다 카드만 가는 뭣허고."
딸아이의 말에 자신도 기가 막히는지 달도 없는 밤을 타 곡괭이질을 하던 세화의 증조할머니는 끊어질 것
같은 허리를 곧게 펴고 손으로 두들겼다.
"야야, 말도 마라.
나가 울 엄니헌티 들었는디
조선이 나라를 세우고 을마 안되서 북쪽 땅에 백두가 태어났는디
그것이 그라게 이뻤댜.
세상 박색인 즈 애미 밑에서 우찌 그런 아가 태어났는가 몰라도
이것이 지 이쁜 줄 알고 기고만장을 했디야.
글다가 갑자기 무서웠던게지.
화무십일홍이라고 언제꺼정 이쁘겄어."
"그래갔고 그것이 그때부텀 백두산도 내팽개치고 여우구슬을 모으기 시작혔당께."
"북쪽 구미호는 씨를 말렸단디.
그것이 시방 몇살인지 워디 있는지 워찌케 알겄어."
그렇게 해방이 되는 그날까지도 모녀는 어떻게든 땅의 기운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반쪽의 노력으론 백두대간을 완전히 회복시킬 수가 없었고 이는 또 한 차례 이 땅에 6.25 전쟁이라는 환란을 불러왔다.
네일숍을 박차고 나온 백두는 그 길로 북한산 자락에 위치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소파에 앉자마자 십(十)장로를 호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집으로 열일을 제치고 바쁘게 달려온 열 명의 장로들이 찾아왔다.
백두의 얼굴을 마주보는 것이 불경(不敬)이라도 되는 듯 고개를 조아린 장로들을 바라보며 그녀가 말했다.
"아무래도 마지막 구슬이 남쪽에 있는 것 같아."
"조금이라도 단서가 보이면 즉시 보고해."
자신의 말에 공을 세울 기회를 잡기 위해 앞다퉈 현관을 빠져나가는 장로들을 보며 백두는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다 똑같아.'
오랜 시간 대를 이어온 세습무 집안인 백두의 집은 유복했지만 백두는 자신의 외모가 곧 힘이고 재물이란 걸 일찍이 터득했다. 박색인 어미가 자신을 바라볼 때면 그 눈동자에 어리던 감탄의 표정이 그녀를 일찌감치
각성시켰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을 제 아래 두고 부리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자신의 사명을 내팽개친 채 친히 높은 곳에 올라 그 힘을 만끽하는 그녀를 보고 그 어미는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되돌릴 수 없었다. 그녀는 북쪽 땅의 안녕을 걱정하느라 눈도 감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세상을 떠난 어미를 땅에 묻고 돌아오던 날 거울을 본 백두는 화들짝 놀랐다.
눈 밑에 드리운 검은 기운을 발견한 백두는 자신이 누리는 아름다움의 유한성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을 스친 건 구미호 일족이었다. 여우구슬에 사람의 정기를 담아 정해진 수명을 거스르고 오랜 세월을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그 구미호의 구슬만 있다면 나도 이 모습 그대로 천년만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때부터 백두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부려 백두산에서부터 점차 남하하며 여우들을 사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게 순조롭던 백두의 계획은 98번째 여우를 사냥한 북한산 자락에서 멈추게 되었다.
98개의 여우구슬에 담긴 정기로 자신의 젊음과 아름다움을 오백 년가량 유지해 온 백두는 마지막 얻은 98번째 구슬의 정기가 줄어들수록 조바심이 났다.
'어떻게든 마지막 99번째 여우구슬을 찾아야 해.'
'천년 넘은 여우구슬이니 그것만 있다면 무슨 걱정이겠어.'
'그나저나 이것이 도대체 어디로 숨은 거야.'
'내 남도 땅을 이 잡듯 뒤져서라도 기어이 찾고 말 테다.'
자신이 부리는 수리파의 장로들과 그 인맥을 총동원했지만 마지막 여우구슬의 행방은 오리무중이었다.
남쪽에 있다는 것 말고는 단서조차 없는 상황이 백두를 미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