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미호 씨.
6화. 불수명타(不收命他)
999년 만의 개기일식이 진행되는 동안 백두는 네일숍에서 손톱관리를 받고 있었다.
백두의 손톱 끝을 연마기로 손질하면서 네일숍 직원은 연신 백두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어머, 죄송해요. 고객님은 뵐 때마다 제가 넋을 놓게 되네요."
네일숍 직원의 말에 백두는 이해한다는 눈빛으로 그저 고개만 끄덕이고는 손질을 계속하라는 눈빛을
보냈다. 백두의 외모에서는 연예인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아우라가 뿜어져 나왔지만 그 아름다움에 비해 눈빛은 서늘했다. 그녀의 눈빛을 본 직원의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세 개의 행성이 일치하는 순간 찰나의 어둠이 찾아왔고 바로 그때 백두의 눈동자가 빛을 발했다.
'이건, 분명히 여우구슬이야. 수백 년을 쫓아도 기척도 없었는데 드디어 나타난 건가.'
찰나의 순간 남쪽에서 감지되었다가 다시 사라진 여우구슬의 기운을 찾고자 백두는 온 신경을 기울였지만
기운이 느껴지지 않자 화가 난 백두는 그 즉시 일어나 당황하는 네일숍 직원에게 만 원권 다섯 장을 던져주고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백송이 아기를 안고 세화의 집으로 간 뒤 112에 신고전화를 한 희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바로 출동한 지구대 경찰은 현장을 확인한 후 경찰청에 지원요청을 했고 조사를 위해 희수를 경찰차에 태워 서부서로 향했다. 희수가 초동조사를 받는 동안 세화의 시신은 서부서 감식반으로 옮겨졌고 세화의 집으로는 형사들이 급파되었다.
아기를 출산하자마자 백송령에게 가느라 갓난아이를 씻기지도 못했던 상황이어서 세화의 집은 출산 뒤처리가 되지 않은 채 어질러져 있었다. 현장으로 급파된 형사들이 분주히 현장을 살피는 와중에도 백송은 욕실로 가서 아기를 씻길 준비를 했다. 여우새끼는 그저 좀 핥아주고 젖만 주면 그만인데 인간 아기는 처음인 백송은 그저 한숨만 나왔다. 그나마 세화가 욕실에 아기 용품을 꼼꼼히 챙겨둔 덕분에 백송은 아기 목욕대야로 보이는 것을 선반에서 내려 물을 받아 아기를 조심스럽게 씻기기 시작했다. 아기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어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도 못한 채 까만 눈동자에 백송을 담을 뿐이었다.
세화가 준비해 둔 아기로션을 발라주고 그녀가 미리 삶아서 빨아놓은 속옷을 입혀서 싸개로 감싼 아기를 아기침대에 눕히고 난 후에야 백송은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아기를 돌보는 백송의 눈치를 보던 김형사가 아기를 눕히기 무섭게 백송에게 다가왔다.
"할머니, 아기 엄마와는 어떻게 되시는 분이세요?"
눈을 절반은 내려 감은 백송이 형사를 쳐다보았다. 백송은 천년을 나무로 살며 수없이 많은 인간의 희로애락을 지켜봐 왔다. TV와 영화는 물론 인간과 관련된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접해 온 백송에게 형사는 어려운
대상이 아니었다.
"응.. 나. 세화 할머니 이복동생이지."
"세화가 출산이 무섭다고 나한테 도와달라고 했어.
아직 한 달이나 남았는데 이리 갑자기 아기가 나올 줄 낸들 알았겠나.
하필 장 보러 잠깐 나간 사이 이 일이 벌어졌으니...
혼자 낳고 겁이 났는지 날 찾아 백송령 앞까지 아길 안고 오더니..
나무 관세음보살."
"그러니까 할머니, 혼자 아기를 낳고 할머니를 찾아 나왔다가 사망했다는 말씀이시죠?"
자신의 질문에 손수건을 들어 눈 밑을 닦는 백송의 하얗게 샌 머리카락을 본 김형사는 할머니와 누워 있는 아기를 보고는 기록하던 수첩을 접고 박형사에게 경찰서로 돌아가자는 손짓을 했다.
아기에게 분유를 타서 먹인 후 트림을 시키기 위해 아기를 안고 자리에서 일어선 백송은 주변을 둘러보다
세화가 펼 펴둔 고서(古書)를 발견했다. 책은 불수명타(不收命他)라고 쓰인 부분에 펼쳐져 있었다.
'불수명타(不收命他)'
자신에게 아기를 맡기던 절박한 그 마지막 순간 세화로부터 자신에게 전해진 바로 그 네 글자.
세상의 이치를 거스른 탄생일지라도 그 목숨이 33년 3월 3일의 낮을 살아낸다면 그 목숨을 거두지 못한다.
이 네 글자에 희망을 걸고 자신의 남은 생을 부적에 담아 자신을 찾아온 세화의 절박함을 차마 못 본 체 하지 못하고 천년 수행을 깨고 세상에 나온 자신의 선택을 이제 되돌이킬 수 없는 백송은 마음이 착잡했다.
'세화는 내가 여우구슬로 저승사자와 악귀들의 눈을 속일 수 있을 거란 걸 어찌 알았을꼬?'
'알고 한 행동은 아닌 것 같지만 이 또한 저 아이와 연결된 나의 업이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백송은 백송령 뿌리를 세화의 집까지 끌어와 결계를 펼쳤다. 천년의 수행을 자신의
극락왕생을 위해 쓰려던 백송의 바람은 이제 이 아이를 지켜야 한다는 사명으로 바뀌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