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수표, 미호 씨.

5화. 삽살.

by 묭롶

이제 막 한빛 병원에 손님을 내려주고 다음 콜을 대기하려고 핸드폰을 만지던 희수의 귀에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누군가 뒷좌석에 탔나 싶어 룸미러로 뒤를 살폈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고 룸미러에 비친 자신의 얼굴에 도드라진 붉은 동그라미를 발견한 희수는 깜짝 놀라 이번에는 운전석 거울을 젖혀 다시 자신의 얼굴을 살폈다. 그 순간 조금 더 커진 목소리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삽살!'


불현듯 어린 시절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할부지, 할부지, 옛날 얘기 해줘..응?"

"아고, 희수야.. 얼렁..자라.. 엉."

"아따, 할부지."


마지못해 마른침을 삼키고 할아버지는 입을 떼었다.


"희수야. 너 우리 동네 백송령 알제."

"응, 알지. "

"너 그건 모르제. 백송령이 느그 엄청 왕 할부지를 살려준 거 말여."

"할부지, 그게 뭔 말이여."

"옛날에 할아부지에 할아부지에 또 위에 할아부지가 달밤에 건넛마을에서 술을 한잔 걸치고

고개를 넘어오는디 말여.

산속에서 무지하게 큰 호랭이란 놈이 떡허니 나타난거여."

"이놈아는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에 나오는 그놈도 아니라

느그 할배를 한입에 먹어불라 혔지."

"그래갔고 술이 확 깨분 느 할배가 그대로 백송령 앞으로 달려가 나무 둥치를 끌어안고 살려달라

혔어."

"할부지, 그래갔고,, 응... 그래갔고, 응?"

"호랭이란 놈이 시퍼런 눈을 해가지고 아가리를 떡허니 벌렸는디 그때 아조 하늘에서 날벼락이

딱 하고 호랭이를 때래불었제."

"호랭이가 을매나 놀랬는가 그 자리에서 똥을 싸붔제 그래갔고 호랭이 살려라하고 꽁무니가 빠져라 산으로 줄행랑을 치는디 느그 할배가 그제사 눈을 살그마니 뜨고 그걸 보고는 그대로 백송령한테 엎드려 절을 함서 말했데."


"백송령님, 지 목심을 살려주셔서 고맙구만요. 지가 무신 소용이라도 되믄 뭐든지 갚아불랑께

분부만 내리시요잉."


"느 할배가 엎드려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백송령 높은 가지 위에서 열매가 하나 떨어졌댜."


"할배가 어리둥절해가지고 있는데 백송령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제."


"그건 백송과다. 그걸 먹으면 너는 나의 삽살이 되는 것이다."

"삽살이 된 너와 너의 후손들은 남자 한 명은 꼭 이 마을에 남아서 나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


"할배는 남아일언중천금이라며 백송과를 냉큼 묵었제."

"그 뒤로 나는 안즉까지 안불르던디 일제 시대 때 늬 고조할부지는 목소리를 들었디야."

"할부지, 근디 약속 안 지키고 다 내빼불믄 우찌 되불어?"

"딱 한 번 오래전에 할부지 중 한 명이 식구들 다 델꼬 도망갈라고 마을 경계를 넘었는디

얼굴에 붉은 동그라미가 안 없어져서 어짤 수 없이 다시 왔댜."





어릴 적 할아버지가 재우려고 들려준 옛날 얘기라고 생각했던 희수는 자신의 얼굴에 붉게 도드라진 동그라미를 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얼이 빠져 있는 그 순간 노여움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삽살.'


화들짝 놀란 희수가 목소리에 답을 했다.


"누구세요?"

'나다. '

"설마, 백송령님?"

'그렇다, 지금 바로 백송령 앞으로 오너라.'

"아.... 예."


말을 마친 희수는 대답을 한 자신이 미친 건가 싶어서 오른손을 들어 뺨을 때려보았다. 아팠다. 일단 어찌 됐든 가보면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확인이 되겠다 싶어서 희수는 운전대를 틀어 세향리로 향했다.





백송령은 보호수로 지정된 이래 반경 오백 미터를 경계로 돌담이 둘러져 있다. 희수는 인근 정자 아래 차량을 주차하고 백송령 쪽으로 뛰어갔다. 차분하게 걷고 싶었지만 희수를 급박하게 재촉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저 멀리서 백송령 아래 누워있는 한 여자와 아이를 안고 있는 할머니가 보였다.

뛰어오다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여자가 더 가까이 보이자 희수는 순간 발걸음을 멈칫했다.

멈춘 희수는 고개를 들어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마주 보았다.

희수를 보는 할머니의 검은 눈동자 속에 빛나는 붉은 고리를 보는 순간 그는 그 눈동자의 주인이 백송령임을

알 수 있었다.


얼이 빠져 서 있는 희수에게 백송은 말했다.


"나는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갈터이니 너는 이 여자를 맡거라."

"아니...제가 어떻게요. 설마.. 이 여자?"

"위에 사는 세화 아닌가요?"

"경찰에 신고하거라.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했다 하고 ..너한테 문제는 없을 것이야."


어찌할지 모르고 주저하던 희수는 마지못해 핸드폰을 들어 112를 눌렀다.

희수가 신고를 하는 동안 백송은 아이를 안고 세화의 집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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