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왠지 아침부터 눈이 올 것만 같았다. 천년 가까운 세월을 나무로 살며 천년의 비바람과 눈을 맞아온 백송은 나뭇가지에 스치는 바람 속에서 눈(雪)의 기운을 느꼈다. 이제 곧 천년의 수행이 끝난다면 나는 이 생을 털고 극락왕생을 할 수 있을까? 백송은 백련대사가 입적할 때 자신에게 남겨둔 불경의 극락왕생 발원문을 조용히 되뇌었다. 천년의 시간이라면 그간의 살생의 죄업을 씻을 수 있지 않을까. 그 모든 건 하늘이 정할 테지만 아무래도 999년마다 세상에 왜곡이 찾아오는 개시일식이 바로 오늘이라서 그런지 유난히 마음이 심란해지는 백송이었다.
낮 열두 시를 기해 하늘에서 개기일식이 관측되기 시작했다. 해와 천왕성 그리고 명왕성이 일치하는 순간 무수명이 태어난다는데 올 초 천월성이 바로 백송령 위에서 뜬 것은 이 마을에서 무수명이 태어난다는 뜻일까? 불필요한 일에 휘말리게 되면 천년 수행은 물거품이 될 텐데 아무 일 없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나무관세음 보살.
백송의 기도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일식은 진행됐다. 세 개의 행성이 일치하는 순간 암흑이 찾아왔고 찰나의 암흑에 당황한 사람들이 불을 켜려고 움직이던 그 순간이 지나자 세상은 다시 서서히 밝아져 왔다.
다시 밝아져 오는 하늘에서 한 송이 그리고 또 한 송이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조용히 불경을 외던 백송의 눈에 저 멀리서 뛰어오는 여자가 보였다.
'아니 저건 세화 아닌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자신을 찾아와 자그마한 손으로 자신의 그루터기를 만졌던 어린 시절부터 임부복을 입고 찾아와 등을 자신의 굵은 나무 둘레에 기대며 배를 문지르던 모습까지 백송은 모두 지켜봐 왔다. 세화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그 위의 어머니들까지 백송령 아래 잠들어 있는 백송을 알고 있었고 백송 또한 남도를 지키는 세습무 지리들을 알았다.
백송령 그루터기에 도착한 세화는 임부복이 온통 피로 물든 채 말을 할 기력조차 없어 보였다. 그녀는 온통 눈물로 젖은 간절한 얼굴로 백송령을 바라보며 남은 힘든 모두 짜내어 아기 이불로 감싼 아이를 두 손으로
백송령을 향해 내밀었다. 아이를 내미는 세화의 눈동자에서 생각이 전해져 백송에게 닿았다.
전해진 세화의 생각은 영상으로 백송의 눈앞에 펼쳐졌다.
[내일 낮 12시를 기해 태양과 천왕성, 명왕성이 하나의 궤도에서 일치하는 개기일식이 관측될 예정입니다.
내일 오후부터는 눈이 예보되어 있지만 999년마다 진행되는 금번 우주쇼를 관측하기에는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
늦은 저녁을 먹다가 틀어놓은 TV에서 개기일식 뉴스를 들은 세화는 불현듯 올해 봄 백송령 위로 빛을 발하던 천월성이 떠올라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필 우리 동네 위로 떠오르다니.... 출산예정일이 한 달이나 남았는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로 옮기려고 의자에서 일어난 순간 세화의 양수가 터졌다.
두 다리 사이로 뜨겁게 쏟아진 액체가 양수임을 확인한 순간 세화는 불안이 현실로 다가옴을 직감했다.
어머니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내려 온 고서(古書)로부터 무수명의 운명을 알게 된 세화는 그 운명의 대상이 자신의 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만에 하나라도 이 아이가 그 아이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고서를 찾아든 세화는 고서를 펼쳐 미친 듯이 읽기 시작했다.
'난 이 아이를 어떻게든 살릴 것이다.
천년을 수행한 백송이라면 분명 이 아이를 지킬 수 있을 거야.'
결심을 굳힌 세화는 핸드폰을 들어 장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장 변호사님, 혹시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제 아이를 부탁드려요. "
"아니, 세화 씨 무슨 일인데 그래요. 제가 그쪽으로 갈까요?"
"아니에요. 혹시 몰라 드리는 말씀이에요. 원래 막달이 되면 불안하고 그런 거잖아요."
"아... 그렇죠. 순간 걱정했습니다. 그럼 다음에 통화하죠."
"네..."
전화가 끊긴 핸드폰을 식탁 위에 올려두고 세화는 출산 준비를 서둘렀다.
'아이를 낳자마자 악귀와 저승사자가 동시에 아이를 거두려 할 거야.
병원에 간다면 백송령 앞에 가기도 전에 아이를 잃겠지.
방법이 없어... 어떻게든 아이를 백송에게 전해야 해. '
주기가 짧아져오는 산통을 느끼며 밤새 탯줄을 자를 가위를 소독하고 아이를 감쌀 이불을 준비한 세화는 고서를 펼쳐 부적을 쓰기 시작했다. 고서는 한문으로 집명술(集命術)이라고 쓰인 부분에 펼쳐져 있었다.
부적을 쓰는 세화의 눈에 눈물이 흘렀다.
'아이 야.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이게 전부야.'
아이는 세 개의 행성이 일치하는 세상이 찰나의 왜곡에 휩싸이는 그 순간에 태어났다. 태어난 아이의 탯줄을 겨우 자른 세화는 아이를 씻길 틈도 없이 미리 써둔 부적에 자신의 남은 수명을 봉인했고 아이의 태어난 날에서 33년 3월 3일이 되는 날의 정오를 기입하여 파(破) 주문을 걸어 수인을 맺었다.
부적을 든 세화는 씻기지도 못한 아이를 아기 이불로 감싼 채 백송령을 향해 뛰었다.
'독한 것. 이렇게까지 하다니.'
세화가 전한 생각을 본 백송은 마음이 참담해졌다. 세화는 아이를 두 손으로 받아 든 채 숨이 끊겼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의 새까만 눈동자가 빛이 났다.
백송은 판단할 시간이 없었다. 세화가 전한 생각을 본 그 잠깐 동안 고민할 시간조차 없이 인간 할머니로 모습을 드러낸 백송은 한 손에 든 자신의 여우구슬에 집명술 부적을 집어넣고 그 구슬을 아이의 심장에 깃들였다.
'이제 이 아이는 33년 3월 3일 12시가 되기 전까지 여우로 살 것이다. 이 아이의 정체는 누구도 알아선 안될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