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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Mar 12. 2024

[희랍어 시간]

[한강]

받아들이기 힘든 고통에 직면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실을 부정하려 한다.  적이 나타나면 우선 머리부터 숨기고 커다란 몸통은 다 드러낸 타조처럼, 대부분 그 순간 눈을 감고 눈을 뜨면 그 모든 것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눈을 뜨면 눈앞에 떡 하고 버티고 있는 고통에 더 크게 절망하고 분노한다.

"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것은 꿈꾸는 것입니다."라는 보르헤스의 말처럼 인간은 고통에 발 디딘 채 새로운 고통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존재이다.  하지만 지금 내 몸무게를 지탱하는 바닥이 고통이라는 사실을 자주 잊고 사는 존재가 또 인간이다.  고통이 없다는 건 보르헤스 식으로 얘기하자면 이 세상에 내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통 속에서도 꿈꿀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고, 꿈꾸기 때문에 고통을 잊는 게 인간이라면 다만, 

단지 그뿐이라면 고통을 받아들이는 게 더 쉬워질까?  아니다.  큰 불행에 처한 사람에게 다가가 그런 식으로 말을 한다면 뺨 맞기 십상이다.  


 


 언젠가 소설가 김영하작가란 질문을 자신의 작품으로 답하는 사람이라 말한 적이 있다.  그의 말처럼 

한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전작과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희랍어시간』도 그의 전작 『바람이 분다, 가라』의 연장선상에서 읽혔다.  나는 한강의 전작에 등장하는 '푸른 돌'이 이번 작품을 빌어 구체성을 띤 결과물로 형상화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 ~......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지만.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을 꿨어.  꿈에 보니 난 이미 죽어 있더구나.  


                                               얼마나 홀가분했는지 몰라.  


                                 햇볕을 받으면서 겅중겅중 개울가를 뛰어갔지.   


                                           시냇물을 들여다봤더니 바닥이


                   투명하게 보일 만큼 맑은데, 돌들이 보였어.  눈동자처럼 말갛게 씻긴.....


                                                 동그란 조약돌들이었어.  


                                       그중에서 파란빛이 도는 돌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지. 그때 갑자기 안 거야. 그걸 주우려면 살아야 한다는 걸.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걸.」  p342-344 『바람이 분다, 가라』


 


                                 「 수유리의 우리 집 기억하니.  


        ~새벽에 깨어서 거실로 나오면 모든 가구들이 푸른 헝겊에 싸여 있는 것 같았지.  


파르스름한 실들이 쉴 새 없이 뽑아져 나와 싸늘한 공기를 그득 채우는 것 같은 광경을, 


                        내복 바람으로 넋 없이 바라보고 서 있곤 했어.  


               마치 황홀한 환각 같던 그 광경이 약한 시력 때문이었다는 걸


                                    그땐 알지 못했지. 」 73  『희랍어시간』


 


그의 작품 속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작중인물들의 꿈 이야기는 고통과 상실에 처한 인간의 자아와 현실 인식을 대변하는 기제이다.  현실에서는 비극인 작중인물의 실명을 앞둔 시력저하는 꿈속 같은 새벽 풍경 속에서는 마법 같은 아름다움으로 다가오고, 현실에서 약화된 인물들의 자아는 꿈속에서 길을 잃고 언어를 잃는 형태로 표출된다.  한강의 전작이 인간의 '고통'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삶'이 지속되는지에 대한 고민이었다면 이번 작품은 인간의 '상실'과 '상실'을 경험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지를 묻는다.


 


                                        「그 느낌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독일 생활을 시작한 십 대부터 수없이 반복해 꾸어온 꿈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꿈속에서 나는 잘못 올라탄 버스에서 당장 내리고 싶었지만 


                     ~대체 처음의 목적지가 어디였는지 기억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 세상은 환이고 산다는 건 꿈꾸는 것이다,라고 그때 문득 중얼거려 보았다.  


                                    그러나 피가 흐르고 눈물이 솟는다. 」 p 71


 


                                 「  그러나 지금 그녀의 몸속에는 말이 없다.  


                       단어와 문장들은 마치 혼령처럼 그녀의 몸에서 떨어져, 


                               보이고 들릴 만큼만 가깝게 따라다닌다.  


   그 거리 덕분에, 충분히 강하지 않은 감정들은 마치 접착럭이 약한 테이프 조각들처럼 


                                                이내 떨어져 나간다.  


                        ~ 눈에는 계속해서 다른 사물들의 상. 이 맺히고, 


                         그녀가 걷는 속력에 따라 움직이며 지워진다.  


                      지워지면서, 어떤 말로도 끝내 번역되지 않는다. 」 P67 


 


우리는 살아가며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상실감을 반복적으로 겪는다.  상실감을 극복하는 과정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모두 베이거나 뚫린 상처가 나아가는 과정처럼 상실감으로 뚫린 가슴을 다른 뭔가로 채워나간다.    인간은 저마다 다른 방식을 빌어 자신을 치유하지만 현재에서 자신이 어떤 포즈(李箱이 생활을 못했던 것처럼)를 취해야 하는지 모를 상실을 경험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시력을 잃어가는 희랍어 강사와 말을 잃어버린 여자는 길을 찾지 못한 채 빠져나가려 몸부림칠수록 벽에 머리를 부딪치는 '박새'(p128~130)처럼 현실에서 디딜 자리를 찾지 못한다.


 


   「.......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아테네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델포이 신전의 신탁을 받은 뒤, 


                                             ~그는 모른다고 반복해 말했습니다.  


                                            아무것도 나는 알고 있지 않다고.  


                                 누구든 좋으니 제발 나에게 지혜를 가르쳐달라고.  


                            ~흑판에 써진 모국어 단어들이 그녀의 오른 주먹 안쪽에, 


                    땀으로 축축해진 육각 연필의 매끈한 표면에 소리 없이 으깨어져 있다. 


                              그녀는 그 단어들을 알지만, 동시에 알지 못한다.  


                                      구역질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  


                  그 단어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지만, 관계를 맺을 수 없다.  


                                   그것들을 쓸 수 있지만, 쓸 수 없다.」 p 87


 


오래전에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희랍어에 집착하는 그들의 모습은 칠흑 같은 상실 속에서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빛을 찾는 몸부림(검은 사슴)과 같다.  세상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위해 기본적으로 전제되어야 하는 보기와 말하기를 잃어버린 그들에게 세상은 낯선 곳이며 오히려 꿈속(보거나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인식되는 자신) 세계가 실감 있게 다가온다. 아마도 작가는  인간의 내부에 일반적인 

소통(보기, 말하기)의 방식과는 다른 방식이 존재함을 이야기하는지도 모른다.  말하기 않아도 전달되는 마음,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표정 등, 우리가 일반적인 생활 속에서 인지하지 못하는 또 다른 방식이 상실을 

극복하는 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믿음을 글 속에서 짐작하게 된다.  


 


 작가는 아이의 양육권을 빼앗기고 말을 잃어버린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세상 그리고 인간과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 한지에 떨어진 물방울이 한지가 나무였을 때 흘렀던 물의 길을 찾아 힘겹게 나아가는 것처럼 남자의 흉터에서 눈물길을, 말의 길을 찾아 더듬는 여자를 통해 답을 구하고 있다.  삶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라면, 그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나오는 빛이 어디에 있는지를 작가는 작중 

인물들이 나아가는 길의 궤적 속에서 찾고 있는 듯하다.  아마 그가 '파랑새'를 찾기까지의 여정이 다음 작품이 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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