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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묭롶 Mar 02. 2024

[검은 사슴]

[한강]

                   「  그는 세계의 내면과 사진기 사이에 놓인 간격을 깨닫고 있었다.


                           사진기로는 어느 것의 안으로도 들어갈 수 없었다. 


                            빛에서 시작하여 빛으로 끝나는 것이 사진이었다.


             사진기가 포착하는 것은 빛이고, 인화지에 드러난 것도 빛일 뿐이었다.


                   만지고 냄새 맡고 통증을 느끼고 피를 흘릴 수는 없었다.  」 p529




소설가 한강의 작품은 어둡고 무겁다.  그녀의 전작 『바람이 분다, 가라』에서처럼 그녀의 문장은 한지에 떨어진 점성 높은 먹물처럼 그 자리에서 마르길 거부하고 뻑뻑한 한지의 결을 힘들게 나아가며 궤적을 그린다. 

그녀는 왜 그렇게 힘들게 문장을 뽑아내는 것일까?  그 대답을 그녀의 첫 장편소설『검은 사슴』에서 찾을 수 있었다. 


빛의 세계에 속한 보이는 대로의 모습을 찍는 것에 혐오를 느끼는 작중인물 '장'처럼 그녀의 문장은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향해 있다.  삶을 위해 어둠과 습기와 위험으로 가득 찬 막장으로 들어가는 광부들처럼 그녀는 밝은 곳에서 보이지 않는 인간이라는 불가해한 존재를 만나기 위해 고통 속으로 멈추지 않는 걸음을 내딛는 것이다. 


 '고통'이라는 공통분모 앞에서 작중인물 인영, 명윤, 의선, 장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는 다 같이 닮은 꼴이다.

고통에 의연한 척, 익숙한 척하는 인영도 고통을 애써 외면하려는 명윤도 빛을 향해 나아가고 싶지만 

기억마저 잃어버린 의선도 그리고 표현되지 않는 세계를 담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장의 모습들은 어쩌면 한 인간이 자신의 삶의 과정을 통해 보여주는 그 모든 행동과 심리의 총체와 같다.  인간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과정 중 고통에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과 행동을 그 제각각의 인물들로 나눔으로써 작가 한강은 

그 개별적인 고통들이 타인의 고통(삶)과 부딪치고 섞이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네 번쩍이는 뿔을 자르게 해 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게 해 주마.


                                        ~네 날카로운 이빨을 자르게 해 다오,


                                        그러면 하늘을 볼 수 있도록 해주마.


                    ~그때부터 이 짐승은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채


                         컴컴한 암반 사이를 느릿느릿 기어 다니며 흐느껴 웁니다.


                             마지막으로 숨이 넘어갈 때쯤 되면 이 짐슴의 살과 뼈는


          검은 피와 눈물로 다 빠져나가, 들쥐 새끼만 하게 쭈그러들어 있다지요.」 p244~245




 작품 속에 등장하는 검은 사슴은 개체수로는 수천 마리이지만 저마다 고립된 외돌토리라는 점에서 무수히 

많은 타인들 속에 섞여 살지만 언제나 외톨이일 수밖에 없는 인간을 상징하는 동물이다.  평생 어두운 

바위 투성이 지하를 벗어나 하늘을 보는 것이 소원인 검은 사슴이 자신을 바깥으로 데려다 주기를 원하여 

인간의 요구에 의해 자신의 뿔과 이빨을 빼앗긴 채 울면서 바위틈을 헤매다 들쥐만 하게 쪼그라들어 죽는 

대목은 인간의 삶을 비유적으로 드러낸다.


과연 인간의 삶(고통)을 이해한다(문장화한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아마도 한강의 첫 장편소설인 

『검은 사슴』의 출발점은 바로 이 질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집을 나간 의선을 찾기 위해 인영과 

명윤이 차도 전기도 없는 의선의 고향마을 월산을 찾아가기 위해 눈 덮인 삼십 리 길을 왕복하는 대목은 바로 그 질문을 나 스스로도 계속해서 되뇌게 만든다.  온몸이 얼어붙어 멈추는 순간 그대로 얼어 죽는 상황 

속에서 끊임없이 걸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내딛어야만 하는 인영과 명윤의 모습은 어두운 바위틈을 헤매는 

검은 사슴과 닮아 있다. 


의선이 왜 팔 차선 도로를 나체로 질주했는지, 그녀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고자 했던 명윤은

월산에 도착해서 애초에 자신의 의문에는 답이 존재하지 않으며 타인을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제야 그는 외면하고 싶었던 자신의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  떠오르지도, 가라앉지도 않으며 소리 없이 멀어져 가는


                                 허공의 푸르른 빛을 향하여 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 푸른빛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어둠의 속으로, 태어났던 곳으로, 태어나기 전의 어떤 곳으로 가는 것일까.」 p10




자신뿐만 아니라 타인도 삶이라는 어둠 속을 햇빛을 찾아 헤매는 검은 사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 순간, 

적어도 타인을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의 삶을 그 자체로 인정할 수는 있다는 가능성이 그녀의 첫 장편소설인 『검은 사슴』에서 푸른빛으로 형상화된다.   장이 막장에 갇혀 익사의 위기 속에서 천장에 매달려 손이 

끊어질 것 같을 때 링거액이 한 방울씩 떨어지듯 자신의 팔에 미미하게 채워지는 힘을 느꼈던 것처럼 새벽의 미명처럼 완전히 밝지 않지만, 밝음의 가능성을 지닌 푸른빛은 인간의 삶의 가능성과 타인에 대한 긍정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어쩌면 한강의 작품이 어두운 것은 그 어둠 속에서만 보이는 푸른빛을 발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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