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 리쿠:[꿀벌과 천둥]
요즘 생성형 AI의 작업물을 놓고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딥페이크로 제작된 영상물로 인한 피해는 물론 AI를 이용한 논문 및 대학과제물에 이르기까지 인공지능은 창작이라는 인간고유의 영역마저 잠식해들어가고 있다. 지금의 추세를 놓고 봤을때 과연 어떤 분야가 AI로부터 분리된 인간 고유의 영역을 지킬 수 있을까.
나는 음악이 그 최후의 보루가 되어주길 바래본다.
「음악은 항상 '현재'여야만 한다.
박물관에 진열돼 있는 전시품이 아니라,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예술이 아니면 의미가 없어.
아름다운 화석을 캐냈다고 거기에 만족해서는
그냥 표본에 그쳐버리기 때문이지.」 p305
사진 수십장. 상황 설정글만 가지고도 블로그 여행후기를 뚝딱 만들어내는 AI는 전자렌지에 데운 인스턴트 음식을 떠올리게 만든다. 체온이 느꺼지는 따스한 글, 사람냄새 나는 글의 영역마저 인공지능의 알고리즘에 빼앗긴 요즘 제발 음악만은 남아주길 바라는 나의 마음이 이 책을 읽는 동안 내 속에서 계속 메아리쳤다.
「"그래서 그 얘기를 들은 멜리나 메르쿠리가
음악가들에게 말하는 거야.
' '말도 안 되는 소리!
새는 악보를 볼 줄 몰라도 결코 노래하길 멈추지 않아.'
그 말을 들은 음악가들은 눈을 빛내며
다시 광장에서 연주를 하지."
와!"
"음악이란 분명 그런 걸 거야."」 p82
"새는 악보를 볼 줄 몰라도 결코 노래하길 멈추지 않아."
라는 문장을 보는 순간 어둠속에서 찾은 한줄기 빛처럼 어쩌면 음악은 인간 고유의 영역을 지킬 수도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사진. 설정처럼 준비된 악보라는 알고리즘 속에서 노래하는 것이 지금의 AI라면
악보없이도 노래할 수 있는건 인간의 고유성 내지는 음악의 고유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의 손가락에서 태어나는 소리
하나하나가 전부 심오하고 의미 있었다.
곡 구석구석에서 그녀가 살아 숨 쉬고 있는데도
동시에 그녀는 익명의 존재였다.
그녀의 음악에는 보편성이 있다.
참으로 음악이란 신비하다. 그는 새삼 깨달았다.
'연주하는 것은 그곳에 있는 작은 개인이고,
''손끝에서 태어나는 것은
매 순간 사라지는 음표다.
하지만 동시에 그곳에는 영원과
'거의 같은 의미의 존재가 있다.
~음악을 통해 우리는 영원히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p569~570
문학과 회화. 음악 이 세 장르는 각각 무언가를 재현한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음과 악기를 통해, 글을 통해
그리고 물감과 각종 도구들을 통해 어떤 대상을 실체화함으로써 그 실체화된 결과물로 또 다른 결과물(감수성과 감동)을 이끌어낸다. 어찌 보면 작중 고인이 된 유지 폰 호프만이 음악계에 자신이 가르친 가자마 진을 놓고 기프트라고 표현했던 것처럼 음악, 문학, 회화는 인간에게 주어진 큰 선물이다.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고 변명해 왔다.
사랑하니까 용서받을 거라 생각했다.
울고 싶은 충동이 북받쳤다.
관자놀이가 뜨겁게 펄떡였다.
연주하고 싶다. 가자마 진처럼.
'연주하고 싶다. 과거의 나처럼.
과거의 그 환희를, 다시 한번 연주하고 싶다.
아야는 결국 눈을 꾹 감은 채로, 연습실에서 한 번도
피아노를 건드리지 않았다.」 p231
문제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선물로 받아들일 때 선물이 된다는 점이다. 실제로 작중에서 기존의 표준화되고 제도화된 음악계를 대표하는 이들에게 가자마 진의 음악은 그들이 지닌 정통성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진다.
그 반대로 요시가에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 참가한 마사루와 에이덴 아야에게 가자마 진은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하나의 영감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꿈을 포기하고 평범한 삶을 살아가던 스물여덟 살의 아카시에게는 새로운 도전과 또 하나의 시작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미 만들어진 음악의 틀에 갇혀 그 안에서 완벽함을 추구하려는 기성 음악인들과 자연의 재현으로서의
음악을 다시 본래의 자유로움의 공간에 해방시켜 음악이 지닌 본연의 확장성과 공감력을 복원하려는 가자마 진의
음악세계의 대비를 인물 간의 대치와 갈등이 아닌 연주 장면을 보며 느끼는 인물들의 심리를 통해 섬세하고 긴박감
넘치게 그려낸 이 작품의 칠백여 페이지를 나는 앉은자리에서 단숨에 읽어버렸다.
귀로 듣는 음악을 소재로 그 연주과정과 인물의 심리를 글로 풀어내는 온다 리쿠의 필력에 연신 감탄하며 책장을 넘기다 보니 어느덧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몰입해서 들은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처럼 순식간에 마지막 장에 이르렀다.
작중에서 놀라운 청음능력으로 오케스트라의 악기 배치의 문제점을 파악해서 이를 재배치하고 피아노 조율사와 협력해서 피아노를 조율하는 가자마 진의 협연 대목을 읽으며 온다 리쿠가 이 작품을 쓰기 위해 오랜 기간 동안 각 장에 들어갈 에피소드들의 소재인 콩쿠르 예선전에 쓰이는 프로그램을 작중 인물들의 특성과 상황에 맞춰 얼마나 치밀하게 자료를 준비해 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작중인물 마사루가 리스트의 대작을 연습하는 과정을 엄청난 저택을 구석구석 청소하며 빠짐없이 관리해서 깨끗하게 유지하는 과정으로 묘사했던 것처럼 온다 리쿠는 『꿀벌과 천둥』이라는 대작의 세밀한 부문의 배치마저도 단 한 개의 블록만 미세하게 틀어져도 실패하는 도미노를 제작하는 과정처럼 단락, 단락을 구성하고 재배치하며 문장과 단어를 골랐을 것이다. 단 한 번의 공연을 위해 같은 곡을 몇만 시간 들여 연습하고도 공연 전 대기하며 마음을 졸이는 음악가처럼 매일매일 규칙적으로 11년간의 취재를
바탕으로 성실하게 써나갔을 그녀를 생각하니 이 작품이 주는 큰 감동의 원천이 작가의 엄청난 노력과 준비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작품이 갖는 강점은 클래식 음악과 피아노 콩쿠르를 소재로 삼았지만 이에 대해 문외한인 사람도
이 작품을 읽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음악이 시대와 문명과 인종을 구별하지 않고
감동을 줄 수 있는 것처럼 물이 흐르는 듯 자연스러운 그녀의 문장이 갖는 공감력은 글로 쓴 음악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작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지만 트롬본 연주를 즐기는 마사루나
재즈밴드에서 활동한 에이덴 아야처럼 글을 쓰는 온다 리쿠에게 장르와 소재는 한계가 없어 보인다.
그녀가 다른 소재와 다른 장르를 글을 통해 어떻게 변주해 냈을지가 궁금해서 당분간 그녀의 작품을 더 많이 접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ps: 『꿀벌과 천둥』이 작중인물 가자마 진을 통해 아야와 마사루 그리고 아카시를 음악적 성찰과 개인적 상실의 극복으로 나아가게 했던 이끌었던 것처럼 이 작품이 힘든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