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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을 통해 삶을 배우다.

<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 <밀밭>

by 묭롶

<봄>


나는 추위를 많이 탄다. 그래서 한 여름의 뙤약볕 아래 펼쳐지는 록 페스티벌에는 끄떡없지만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동면에 가깝게 활동이 줄어든다. 햇살 내리쬐는 창가에서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금방 온몸이 노릇노릇하게 구워질 것만 같은 태양빛이 너무 좋아서 마냥 언제까지라도 그 아래에서 졸고만 싶은데 그런 내게 겨울은 매년 어김없이 찾아왔다.


올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따뜻한 봄이 간절히 기다려졌다. 코로나 19로 인해 사람들은 고립 아닌 고립에 처해졌고 추운 겨울이면 내가 좋아하는 록 밴드 로맨틱펀치의 공연장에서 뛰어노는 것으로 겨울을 견뎠는데

그 공연마저 모두 취소되었다. 날이 풀리면 바이러스가 약화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봄을 오매불망 갈구 중이다.



[ "내 영혼 저 노을처럼 번지리

겨레의 가슴마다 핏빛으로

내 영혼 영원히 헤엄치리

조국의 역사 속에 핏빛으로."

죽음을 각오한 처연한 심경을 담은 이 시구는 스물여섯 나이의

장준하가 광복을 목전에 두고 미국 전략 첩보대 대원으로 국내에

잠입하기 전, 국내의 부모와 아내 앞으로 유서와 함께 보낸 것이다. ] p208



되돌이켜 생각해볼 때 코로나 19로 인한 지금의 추위와 고립감이 이명박과 박근혜가 지배했던 지난 십 년 동안 느꼈던 압박감과 분노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도 나는 언론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되는 민주주의의 봄을 간절히 기다렸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 분들이 그 엄혹한 시간을 해방조국의 봄을 꿈꾸며 견뎠던 것처럼 나는 그 십 년의 시간을 절치부심(切齒腐心)해야만 했다.


그 십 년의 시간 동안 일반인인 내가 느끼는 고통이 이토록 컸음에도 나는 나의 분노를 백일하에 드러낼 용기를 지니지 못했지만 그 엄혹한 시간 속에서도 ‘매화’를 피워낸 분이 있었으니 바로 그분이 지금 내가 읽은

<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의 저자인 장희창 교수님이시다.




<장희창 교수님>


[ 4대 강 공사 강행, 천안함 침몰 사건 등으로 세상은 어수선하지만

4월의 금수강산은 의연하고 아름답다.

온 산에 진달래와 개나리가 불꽃처럼 피어난다.

파괴의 힘은 거칠지만 그 파괴를 복원하는 자연의 힘은 더욱 부드럽고 강력하다.

선악을 넘어 세상의 고통과 희망을 전하는 문학의 힘이라는 것도

그 자연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

<사랑할 때와 죽을 때> 역자 후기 中


나는 이분을 레마르크의 소설 <사랑할 때와 죽을 때>의 번역자로서 만나게 되었다. 2010년

이명박 치하에서 역자 후기에 ‘4대 강’과 ‘천안함’을 언급할 수 있는 용기 있는 자가 과연 얼마나 있었을까? 법 보다 주먹이 가깝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인 당시의 대한민국에서 종이호랑이 취급당하는 ‘문학의 힘’을

굳게 믿으며 ‘민주주의’의 봄이 되돌아오기를 바라던 역자의 마음에 ‘이심전심’했던

나는 역자인 장희창 교수님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 분이 번역한 <양철북>도

읽게 되었고 이분이 <부산일보>에 연재했던 서평을 모아서 엮은 <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도 찾아 읽게

되었다. 어느 날 우연히 읽게 된 ‘장 그르니에’의 <섬> 서문에서 ‘알베르 카뮈’를 만나게 되고 ‘알베르 카뮈’를 통해 ‘로맹 가리’를 만나게 됐던 과거의 독서 경험처럼 아마도 나는 장 교수님의 다른 작품들도 곧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장 그르니에와 알베르 카뮈는 거의 이십 년의 연차를 지닌 사제지간이었다. 역자 후기를 통해 장희창 교수님에 궁금증을 느꼈던 그때처럼 나는 스승의 글에 남긴 스무 살 남짓한 제자의 <섬>에 대한 서평 글의 다음 대목을 통해 나는 알베르 카뮈라는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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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에게는 보다 섬세한 스승이 필요하였다.

예컨대 다른 바닷가에서 태어나, 그 또한 빛과 육체의 찬란함에

매혹당한 한 인간이 우리들에게 찾아와서 이 겉에 보이는

세상의 모습은 아름답지만 그것은 허물어지게 마련이니

그 아름다움을 절망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그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말해 줄 필요가 있었다. ] <섬> p7



<사랑할 때와 죽을 때>에 실린 장희창 교수의 역자 후기가 내 마음을 흔들었던 것처럼

‘모방 불가능한 언어’로 쓰인 문학을 그 자신만의 독법으로 읽어내는 것이 고전을 읽는 하나의 방법이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그의 서평 모음을 읽으며 해보게 된다.





<또다시 봄!>



[ 봄기운이 천지에 가득하고, 개나리 진달래 지천으로 피어나건만,

역사의 봄바람은 문간에서 멈칫거린다.

민주주의가 시들면 친일 후예들이 득세하고,

민주주의가 만개하면 친일 후예들이 종적을 감춘다.

과거사 청산 없는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봄은 왔으되 봄이 아니다. ] p223


[ 타자와의 절절한 마주침이 없으면 삶의 고양도 없다.

타자의 문제는 사람살이의 절대 화두이다.

~장자는 보다 시원스럽게 표현한다.

여물위춘(與物爲春). “타자와 더불어 봄을 이룬다.” ] p235



<장희창의 고전 다시 읽기>에서 자주 등장하는 단어는 ‘봄’이다. 코로나 19로 고립에 처한 사람들의 마음은 겨울과도 같다. 따뜻한 온기와 꽃바람을 휘감은 봄이 그 겨울을 퇴장시키기를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에게 ‘봄’이라는 단어는 희망과 동의어이다. 그런 사람들의 마음의 추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들의 준동은 잠깐의 추위를 견디기 위해 성냥팔이 소녀가 켜버린 성냥불과도 같다. 금방이라도 영원한 영혼의 안식과 평화를 약속해 주리라는 거짓된 약속의 면죄부를 남발하는 종교도 진정한 ‘봄’을 가져올 수 없다.



[ 안나 제거스는 이렇게 설파한다.

“이름 없이 사라져 간 사람들의 이름을

우리가 항상 떠올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유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지금 말할 수 있고 들을 쓸 수 있는 우리가 말이다.” ] p147


[ 독자들이 자신의 책을 즐기기보다 분노하기를 바랐던

스위프트는 이런 묘비명을 남겼다.

“나그네여,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운 이 사람을 본받아다오.”

분노와 풍자는 자유정신의 또 다른 이름이다. ] p87


[ 요컨대 역사는 실천 속에서의 가능성으로 주어져 있다.

루쉰의 말대로 역사에 대한 믿음, 즉 희망이란 길과 같은 것이다.

길이란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다니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p247


엄혹한 겨울 추위의 눈 속에서 피어나는 매화를 보며 우리는 이 엄동설한도 결국은 지나갈 것이며 끝내 봄이 오리라는 것을 믿게 된다. 그 작은 식물의 꽃 피움이 빚어내는 놀라운 희망의 가능성처럼 ‘고전’은 현재를

살아가는데 길을 잃은 우리에게 방법이 있음을 고전에 실린 무수히 오래된 역사를 들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불의에 저항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삶에는 현재도 미래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과거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결코 길을 잃지 않는다.”와 “착한 인간은 어두운 욕망 한가운데서도 올바른 길을 알고 있는 법이네.”라는 괴테의 글과 “고정관념의 더께를 박차고 신화를 해체하는 정신의 꿈틀거림을 따라가는 것은 곧 세상 변화를 바라는 자의 독법(讀法)이라는 장희창 교수의 글은 닮은꼴이다. 아마도 이 책의 내용을 네 글자로 줄인다면 ‘온고지신’ 일 것이다.

과거의 고전에 비추어 현재를 성찰하고 옮고 그름의 시시비비가 그 누구에게나 정당하게 적용된다면 ‘봄’은 더 빨리 찾아오지 않을까. 고전에서 코로나 19의 해법을 찾을 수는 없겠지만 이 시국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나는 이 책을 통해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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