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록 #문학동네#책
코로나 19로 인해 바깥출입을 못하는 동안 최근 TV 방송 <책 읽어드립니다>에 소개가 되어 베스트셀러가 된 <한중록>을 읽게 되었다. 역사에 대해 잘 모르던 어린 시절에도 너무나 재밌게 시청했던 TV 시리즈 <조선왕조 오백 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을 꼽자면 그건 ‘인현왕후’와 ‘사도세자’에 관련된 방영 편이었다. 영조가 아들 정조(당시 경모궁)를 뒤주에 가둬 근 칠일만에 죽게 만든 임 오화 변에 대해서는 그동안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해 왔지만 이번에 <한중록>을 읽고서야 그 사건의 전후관계와 그에 얽힌 정치구도 그리고 이해관계를 파악할 수 있었으니 이 책을 지은 혜경궁은 자신의 집안을 변호하는 목적 이외에도 후대에 사건의 목격자로서의 진술을 들려줌으로써 ‘임오화변’의 원인과 결과를 후대에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 하지만 일이 그렇지 못하여 일찍이 부모와 멀리 떨어져 사니,
이 한 가지로 인하여 돌고 돌아 작은 일이 크게 되어
마침내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니라.
이는 경모궁의 불행이며 동시에 국운의 망극함이라.
이 일이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나,
내 원통함이야 또 어찌하리오. ] p 27
물론 이 책은 ‘혜경궁 홍 씨’의 사적 기록물이므로 이 자체를 역사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정사가 기록하지 못한 사관이 함께 하지 못하는 현장에서 벌어진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역사가 미처 말하지 못해서 생길 수 있는 행간(아들인 정조와 순조 그리고 당시의 정치권)의 오해를 미연에 예방하려는 혜경궁의 집필 의도가 담겨 있다는 점에서 사료 외의 변별적 우위를 점하는 작품이다.
[ 경모궁 돌아가신 경위를 내 차마 기록할 마음이 없으나,
다시 생각하니, 경모궁 손자이신 순조가 그때 일을 망연히 모르는 것이
망극하고, 또한 옳고 그름을 분별치 못하실까 안타까워,
마지못하여 이리 기록하나, 그중 차마 못 일컬을 일은 뺀 것이 많도다.
내 백발 노년에 이를 능히 써내니, 목숨의 끈질김이 이러하리오.
하늘을 불러 눈물 흘리며 운명을 한탄할 뿐이로다. ] p 155
먼저 한 권으로 묶인 <한중록>은 실은 전체 4권으로 제일 먼저 집필된 [나의 일생]은 혜경궁이 61세이던 1795년 조카 홍 수영의 부탁을 받아 저술되었으며 [내 남편 사도세자]는 68세에서 71세로 추정되던 시기에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의 요청에 의해 쓰였으며 68세 쓴 [읍혈록]은 친정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해 씌었으며 72세 되던 해 쓰인 [병인 추록]은 [읍혈록]에 첨언하는 내용을 덧붙이기 위해 써졌다.
<한중록>에는 열 살의 어린 나이에 경모궁(사도세자)의 세자빈에 간택되어 궁궐에 들어가 82세의 나이로 궁에서 목숨을 다하기까지 한 사람의 여성이 겪어야 했던 험난한 삶이 담겨 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처럼 인생은 본인이 원하고 계획했던 삶 대신 그 모든 것을 송두리째 뒤집어 엎어진 형태의 삶을 혜경궁에게 내밀었다..
어찌 보면 혜경궁 홍 씨가 지은 <한중록>은 계획대로 움직이지 않는 질풍노도의 운명에 맞선 한 인간의 안간힘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리라.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청새치를 잡았지만 항구로 돌아오는 도중 장완흉상어들에게 그 모든 것을 빼앗기는 과정은 <한중록>의 삶과 닮아 있다.
[ ~내 집이 누대로 벼슬을 한 집으로 집안 운수가 형통하는 때를 만나,
자제들이 잇달라 과거에 급제하여 집안이 번성하고 권세가 지나치게 무거워지니,
이를 어찌하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성내고 귀신이 꺼림도 괴 이치 않느니라.
그릇된 후 생각하니 번영할 때 자취를 거두지 못하고
벼슬에 계속 몸을 적시고 있었던 것이 천만번 후회되고 한이 되니라.
~우리 집이 이미 번성하였다가 쇠하였으니,
이제 원통함을 깨끗이 씻어 화를 굴려 복을 이룰 때가 오라,
피눈물을 흘리며 하늘에 비노 라.
4.15 총선을 맞아 선거전을 치르는 각 정당처럼 조선시대는 한 군왕의 옹립과 관련된 러닝메이트의 투쟁의 역사와 일치한다. 지금의 정치가 여당의 대통령을 세우고 그 여당이 절대다수가 되는 경우 정국의 진행이 쉬운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왕조 오백 년의 역사는 결국 당권이 아닌 왕권을 누군가로 세울지에 대한 모색일 뿐 지금의 상황과 다를 게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권력에의 욕심은 고래로부터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결국 위정자의 의자와 상관없이 왕좌는 그 왕좌에 의해 얻어질 모든 이해관계를 위해 모여든 장완흉상어들에 의해 결정지어지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이 아무리 그 높은 이상을 세웠다한들 그 이상은 항구에 도착하기 전 장완흉상어들에 물어뜯겨 사라지고 항구에 도착해서는 애초의 이상과는 다른 이상의 뼈다귀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조선시대의 위정자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한편으로는 임오화변 때 남편이냐 아들이냐를 놓고 고민해야 했을 혜경궁이 고심 끝에 아들을 선택하고도 그 오랜 시간을 상어 떼에게 ‘죄인의 아들’이라는 명목으로 물어 뜯기고 ‘삼불필지’로 이복 작은 아버지를 잃었으며 또 달려드는 상어들의 물어뜯음에 아버지를 잃고 또 본인 스스로 친정을 위한다며 화완옹주의 양자와 친분을 권유했던 탓으로 가장 사랑했던 남동생 홍 낙임을 잃게 되었으니 이 삶을 뭐라 말할 수 있을까!
왕권을 이을 세자의 세자빈이요. 그 세자의 적통을 이을 왕세자 정조를 낳고도 자신의 아버지, 그리고 형제를 보호할 수 없어 잃을 수밖에 없었던 혜경궁의 마음이 담긴 <한중록>을 읽으며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가 결국 운명이라는 장완흉상어들에게 물어뜯기는 필연적 존재임을 느끼게 되었다.
Ps: 이 책을 읽고 나는 그동안의 의문을 풀게 되었으니 혜경궁의 말과 동일하다.
1. 영조의 편집증
여러 번의 사화를 통해 왕권을 확립한 숙종은 무수리 출신 최 씨를 통해 영조를 얻게 되었다. 생모인 장 희빈이 사사된 후 왕위에 오른 경종이 게장을 먹고 복통을 일으켰을 때 인삼과 부자를 올렸다는 이유로 영조는 경종 독살설에 휘말렸고, 이를 인원왕후(仁元王后, 1687~1757)가 곁에서 도와 줌으로써 영조는 비로소 왕권을 세울 수 있었다.
왕권을 지닌 왕세자 경종이 있는 상황에서 천민인 무수리를 어미로 둔 영조는 존재 자체로 생존의 위협을 느끼는 상황에서 형님인 경종이 갑자기 승하하게 되면서 형을 독살했다는 의혹 속에서 출발해야만 했다. 그는 흉사와 좋은 일을 구분하여 출입문을 달리하였고 그날 흉사가 생겼을 경우 굳이 싫어하는 대상에게 말을 건네어 그 터부를 털어내는 등 편집증 적인 성격을 드러냈는데 사초가 미처 밝히지 못한 부분을 혜경궁은 <한중록>을 통해 밝히고 있다.
2. 정조는 죄인의 아들인가?
사도세자 경모궁은 법률적인 방법이 아닌 사적인 방식으로 죽임을 당했다. 대역죄로 치죄를 당해 사약을 받은 것도 아니요. 신하들의 중지를 모아 죽임을 당한 것도 아니며 그 죽임에 이르는 과정이 역사에 명약관화하게 기록이 남지도 않아 애매모호한 미궁에 남게 되었다. 결국은 그로 인해 혜경궁의 아버지인 홍 봉한이 뒤주를 들였다는 의심의 상소를 받아 치죄를 하기에 이르니 이는 영조가 세손인 정조의 즉위 과정의 위해 요인을 없애기 위해 임 오화 변 당시의 승정원 일지 기록 일부를 씻어 지운 까닭에 의함이라.
경모궁이 뒤주에 들어간 임오화변 직후 혜경궁과 정조(당시 세손)는 이미 궁 밖으로 거취를 옮겨 임금(영조)의 처분만을 기다렸다. 하지만 영조는 세자만 죄를 주었을 뿐 그 세손의 왕권에 그 어떠한 여지를 두지 않았으니 어찌 보면 정순왕후의 소생을 기다리던 김 씨 네 입장으로서는 미흡한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영조의 연령이 68이 되어가는 상황에 김 씨 네는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밖에 없었고 김 종수를 비롯한 김 씨 네는 죄인의 아들이 왕권을 이을 수 없다는 이유로 정조를 경모궁을 앞세워 일찍 돌아가신 효장 세자의 아들로 양자들 들이게 했다. 그로 인해 정조는 아버지의 삼 년 상을 치르지 못하고 상복을 벗게 되었으니 이때의 한이 정조가 즉위를 하자마자 “짐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니라”를 외치게 한 단초가 되었다.
결국 영조는 사초를 지우는 초유의 일을 감행하고도 손자를 죄인의 아들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자신의 장자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만드는 방법을 택했지만 결국 이를 통해 정순왕후의 일족인 김 씨 문중에 세손의 약점을 넘겨주었다.
3. 사도 세자는 정녕 미친 자인가?
미치지 않았다=반역!
- 참 어려운 일이다. 만약 사도 세자(경모궁)가 당시 미치지 않고 정상인데 뒤주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반역에 해당되는 죽임이므로 이 경우 세손인 정조는 물론 혜경궁 또한 목숨을 보전할 수 없다.
[ “설사 그리하신다 해도 부자의 정이 있고
병으로 그리된 것이니 병을 어찌 꾸짖으리이까.
처분은 하시나 은혜를 끼치시고 세손 모자를 평안하게 하소서” ] p 126
미쳤다. = 필수불가결이지만 반인륜.
- 병환이 깊어져서 주변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물론 임금을 해치겠다는 말마저 주저앉는 세자를 두고 혜경궁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을지는 보지 않고도 알 수 있겠다. 공멸하느냐. 아니면 후일을 도모하느냐를 두고 어떤 고민을 했을지를 나는 영화 <사도>를 보고 짐작할 수 있었다. 정신병을 앓는 남편으로 인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보다는 후일을 도모하자며 죽음을 미뤘던 혜경궁은 이후 아버지와 남동생 그리고 자식인 정조를 앞세웠다.
4. 혜경궁의 친족은 과연 충신이었나?
본래 혜경궁의 집안은 선조의 딸인 정명 공주의 오대조 후손으로 고조부 홍 만용, 증조부 홍 중기, 조부 홍 현보가 이조 예조 등의 판서를 역임했다. 고로 혜경궁의 친정은 노론을 대표하는 명문이었다.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이 소론을 주축으로 했던 반면 인원왕후의 도움을 받은 영조는 노론의 힘을 받아 즉위 초반 왕권을 확립할 수 있었다. 혜경궁이 집안은 대대로 노론 집안으로 혜경궁은 입궁 초반부터 힘들이지 않고 궐 내의 인정을 받을 수 있었고 영조도 혜경궁의 친정을 자신의 정치 동반자로 인정했다.
하지만 영조가 66살 되던 해 계비인 정순왕후가 즉위하면서 정순왕후의 친정인 국구 김 한구를 중심으로 한 김 씨 네가 등장하면서 혜경궁의 친정인 홍 씨는 공한파로 몰리며 척세에 몰리게 되었다.
[ 아버지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근심이 무궁한 밖에,
내 애쓰는 일이나 사람 상할 일이 안타까우셔서,
그 옷들을 마련해주시니라, 그 병환을 육칠 년이나 앓으셨으니,
극히 성할 때도 있고 적이 진정할 때도 있더라, ] p88
개인적으로 <한중록>을 읽으며 왕권 확립을 위한 그 가족의 노심초사에는 동병상련의 마음이 기울지만 혜경궁이 입궐 당시 집안의 형편과 이후의 친척과 문객을 거두었다는 문맥을 두고 보았을 때 혜경궁의 집안이 적극적으로 치부를 하지 않았을지라도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활동에 자금을 아꼈을 것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5. 부부의 세계
요즘 jtbc에서 방영하는 <부부의 세계>가 세간에 인기다. 나는 혜경궁이 경모궁이 던진 바둑판에 눈을 얻어맞아 눈알이 빠질 뻔했다는 부분을 읽을 때 참으로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병환 중 이라고는 하지만 자신의 아이를 낳은 부인에게 폭력을 행사한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우면서 그러니까 영조가 뒤주에 남편을 가뒀을 때 혜경궁이 자식을 선택했을까 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6. 결국은, 지금이 문제다.
<한중록>을 읽고 생각해보니 옛날 사람들은 왕권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고, 지금은 여당을 위해 모든 것을 걸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경궁이 80여 년의 그 험난한 시간을 결국은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줄 군주를 세우기 위해 버텨왔던 것처럼 결국 이 나라의 정권도 자신의 이해관계를 받들어줄 군주를 세우기 위해 그 모든 이해관계가 결집하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문제는 정치인의 이해관계를 위해 우리가 이용을 당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이미 우리는 그 정치인의 이해관계 때문에 이명박근혜에 이르는 기나긴 암흑기를 지나온 바 있다.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되돌이킨 것은 한 번으로 족하다.
역사는 미래를 위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역사의 가장 밝은 중흥기를 가장 어두움 속에 살아야 했던 한 여성의 질곡 깊은 삶을 읽으며 나는 그렇게 때문에 앞으로의 역사는 구중궁궐이 아닌 투명한 대중과 함께 구르는 수레바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바로 내가 그 구르는 수레의 첫 바퀴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