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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두녕 May 15. 2022

How to find true love and...

How to find true love and happiness

2018.06

요즘 들어 둔감한 사람들이 부쩍 부러워졌다. 적당히 무감각한 사람들 혹은 아직도 맹목적 적일 수 있는 사람들. 이를테면 ‘중학교 때 아빠가 커서 재규어를 사 오라'라고 했기에 포기 못한다는 [Don Emoji]의 빈지노같이. 친한 선배의 말마따나 세상에 수많은 좋고 나쁜 것들을 이제는 알아버려서, 한쪽으로만 생각하는 일이 조금은 더 어려워졌다. 천국에 있어도 천사들의 얼굴에서 따분함을, 불지옥에서도 몸을 담그고 맥주를 마시고 싶어질 온천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최근에는 잘 모르겠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마침표를 별 의미 없는 미소로 대신하며. 수업 시간 같으면 손을 들어 교수에게 다시 설명을 해달라고 할 텐데, 나는 아직 사는 일에서 그 정도의 권위자를 찾지 못했다. 확신하는 이들의 말보다는 고민하는 이들의 말이 조금 더 거부감 없이 다가오는 까닭이었다. 그래도 수업 시간의 습관이 가진 관성 때문인지 나는 만나는 이들에게 자주 모르겠다는 말을 하고 다녔고, 어느 순간 그렇게 기계적으로 말하는 자신에게 놀라게 되었다. 모르겠다는 나의 말이 질문에 대한 대답인지 질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그제야 말하기를 멈추고 ‘왜’ 모르겠는지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한국으로 돌아옴에 있어 후회가 남지 않을 결정을 하려 힘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있어 앞으로 한국에서의 삶은 정서적 안정감을, 미국에서의 삶은 물질적 여유를 기대하게끔 했다. 마음은 항상 한국에 있었고, 먼 미래를 생각해보라며 타이르는 것이 이성의 몫이었다. 마음이 편한 곳에 있고 싶었지만 몇 년 후면 맞이하게 될 미래에 대해 조금 더 준비된 채로 돌아오고도 싶었다. 저성장 사회에 들어선 한국에서도 ‘여행하고 빈둥거리며 세계의 미래와 과거를 성찰하고 책을 읽고 공상에 잠길’ 수 있는 여유를 좀 더 이른 시간부터 갖고 싶었기에. 두 욕심은 상충했다. 그래서 나에게는 ‘언제’가 중요했다. 그 둘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을 맞출 수 있을 시기. 이는 사람마다 달랐기에 모르겠다는 질문에 내가 원하는 답을 줄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숫자로 된 대답을 내놓아야 할 것 같은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비롯되었다. 여러 생각을 하는 도중에 미국에서의 삶이 결코 정량적인 가치만을 지니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5년간, 혹은 대학을 다니는 3년간 나에게 있었던 변화들의 중심에는 한국을 떠나 있으며, 미국에 있으며, 문화적 소수자로 있으며 그리고 홀로 있으며 겪었던 다양한 경험들이 자리했다. 모든 것이 좋게만 변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시간 동안에는 분명히 질적 성장이 있었다. 한 예로, 자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끝을 모르는 사회에서 동양인으로 위축되지 않기 위해서 더 의연해져야 했으며,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렇게도 다른 사람들과도 어느 정도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변곡점에서 필요를 느끼면 변화할 수 있게 되었고, 그렇기에 변해왔다. 그런 생각 끝에서 ‘언제’에 대한 답을 하는 일은 미뤄야 했다. 정성적인 가치들이 소중하기에 미국에 있어야 한다기보다는, 가까운 미래, 타지에서 보낼 삶이 가질 의미를 지금 알 수 없음을 알았기에. 고생의 연속이라 생각했던 유학생활의 장점들을 대학생활이 끝나가는 시점에서야 이해했기에. 그래서 앞으로의 일은 미래에 결정하는 일이 마땅하다는 결론이었다. 경험하지 못하고서는 알 수 없는 것들이 있기에 경험해보아야 한다. 익히 알고 있는 생각으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언젠가 한국에 들어오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면 그때의 조건이 어떠하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변화가 필요한 순간에서 변해왔으니까. 그렇게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안해졌고 머리가 맑아졌다. 그것은 좋은 결정에 따르는 확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정답을 찾았음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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