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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두녕 Apr 19. 2022

세월의 멋은 흉내 낼 수 없지

Apr-22

2022.04

          데이터 ‘사이언티스트'로 일하고 있지만, 아주 가끔씩 과학을 의심하고는 합니다. 의심의 객체는 거의 매번 체중계가 됩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에 뒤늦게 장만한 체중계가 예상치 못한 숫자들을 보여줄 때면 체중계를 불신하며 여러 가설들을 생각합니다. 파운드 계산에 익숙한 체중계가 킬로그램으로 수치 변환을 잘 못하는 것은 아닐지, 혹은 체중계 표면의 센서가 고장 난 것은 아닐지. 놀랍게도 이런 가설에 대한 대답은 과학의 형태를 취하지 않습니다. 다음 날이 되어 회사의 간식 선반 앞에 서서 무얼 먹을지 고민하다가, 문득 떠올리곤 합니다. 지난 몇 주 동안 간식을 고르며 얼마나 즐거웠는지, 무료로 제공하는 점심을 먹기 전에도 배불렀던 기억이 있는지. 그렇게 깨닫습니다. 예상치 못한 숫자들이 말도 안 되는 숫자들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제야 저는 고삐 풀렸던 식욕에 기강을 잡기 시작합니다. 탄수화물과 단 음식을 줄이고, 오후의 금식 시간을 조금 더 철저히 지키고, 주말의 음주에 마리아주(mariage)를 절제하고. 운동의 강도는 늘립니다. 조금 더 오래 뛰고, 그렇지 않더라도 더 많이 걷고. 그렇게 몇 주를 지내다가 몹시 배고픈 어느 날 체중계에 올라서면 드디어 익숙한 숫자들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제야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우습게도 식욕과의 전쟁은 제게 낯선 일이 아닙니다. 환경이 바뀌면 기준점을 찾기 전까지 식욕에게 자유가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급식과 밤 아홉 시면 갓 구운 빵이 나오던 고등학교에서도, 뷔페식 식당을 운영했던 대학교와 미군 부대에서도, 간식과 점심을 무료로 제공하는 지금의 새 회사에서도 살이 찐 스스로를 발견합니다. 이것이 저에게 있어서는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조금씩 바뀌는 것이 있다면 속도와 능숙도입니다. 너무도 빠르게 살이 저버려 운동복 허벅지 부분이 꽉 끼었던 고등학교 때와 비하면 지금은 양반입니다. 새로운 환경에서도 어느 정도의 중심은, 제정신은 잡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감량하기 위한 조치들에서 효율성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만큼 빠르게 감량이 되지는 않지만 내게 ‘무엇이 중한지’는 알게 된 겁니다. 이런 것들은 세월이 지나며 더 잘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비대해진 몸이 점점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때 즈음이면 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끝마쳐갑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며 조금 더 가까이 지내고 싶은 친구들을 찾고, 가까운 영화관과 골프 연습장에 자주 발자국을 찍으며. 한가로이 끄적끄적 대며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는 카페와 분위기 좋게 맥주와 와인을 마실 공간을 기억하며. 달리기 좋은 거리와 석양이 아름다운 언덕을 걸으며. 3년 전, 시카고로 첫 이사를 했을 때와 비교하면 어떤 것들은 다름없이 같고 어떤 것들은 새로 중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제게 큰 즐거움입니다.



           요즘 새로 보기 시작한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첫 장의 주인공인 은희는 술을 한 잔 마시며 노래를 부릅니다.

           

           “지나고 보니 나이를 먹는다는 것 나쁜 것만은 아니야 세월의 멋 은 흉내 낼 수 없잖아” 

            
           노랫말을 마음으로 이해하기에 분명 어린 나이라는 것을 알지만, 저는 노래를 듣고 말없이 웃으며 지난날들을 다시 돌아봅니다. 새로운 즐거움이 하나둘씩 느는 것도, 그중에 변함없는 것 들을 찾는 것도 세월의 멋 중 하나겠죠. 삶은 포장을 뜻지 않은 초콜렛 상자와 같아서, 또다시 새로운 환경에 놓일지도, 삶에 새로운 사람들이 불쑥 들어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앞으로는 더 익숙하고 능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요. 흉내 낼 수 없는 세월의 멋을 이제 알아버렸으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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