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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두녕 Jun 26. 2022

삶은 두께를 알 수 없는 책과 같기에.. (*)

Jun 22

2022.06


몇 차례 고민 끝에 자주 가는 영화관에 1년 치 회비를 내고 회원 등록을 했습니다. 한국어로 말하자면 CGV에 멤버십 등록을 한 셈입니다. 불법 다운로드된 영화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한 지 3년 반 만의 일입니다. 이는 영화 애호가의 삶에서 또 하나의 이정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Everthing Everywhere All at Once](이후 에브리띵)과 [닥터 스트레인지: 대혼돈의 멀티버스](닥터 스트레인지) 그리고 [탑 건: 메이버릭](탑 건)을 연달아 관람했습니다.


영화를 볼 때는 주로 '왜'와 '어떻게'를 묻습니다. 사건이, 혹은 갈등이 생겨나면 화자는 '어떻게' 이를 해결하고, '왜' 그런 선택을 하게 되나요? 관객이 충분히 동의하고 동감할 수 있는 선택들인가요? 영화관을 나오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면, 영화가 짜임새 있는 스토리텔링으로 위 질문들에 적당한 답을 주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는 영화에만 한정된 기준은 아닙니다. 자주 찾아 듣는 음반들 역시 열 곡 즈음되는 수록곡들로 훌륭한 서사를 만들어 낸 작품들이니까요. 제가 영화와 오페라, 음반을 그림과 조각보다 선호하는 것도 같은 이유 때문일 거라고 생각합니다. 움직이지 않는 그림들에서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아직 어려운 까닭입니다. 


이렇게 날이 선 질문들을 쟁여두고 영화를 관람함에도, 가끔씩 질문하기를 잊게 될 때가 있습니다. [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에서 너무도 슬픈 눈을 하고 있는 조엘(짐 캐리)을 보았을 때, [The Shape of Water]에서 갑작스레 엘라이자(샐리 호킨스)가 주인공이 된 흑백 뮤지컬이 시작 됐을 때처럼 말이죠. 최근에 [CODA]에서 잠시 영화가 음소거 됐던 장면도 생각이 나네요. 이렇게 관객을 무장해제시키고 질문하기를 잊게 만드는 영화들은 좋은 울림을 주어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됩니다. [에브리띵]은 그런 면에서 너무도 참신하고 또 한편으로는 황홀한 영화였습니다. 언젠가 정제된 단어들로 [에브리띵]이 얼마나 멋진 영화인지 소개할 수 있다면 좋겠네요.   


[닥터 스트레인지]와 [탑 건]은 위 영화들과는 결이 좀 다릅니다. 두 영화에는 확실한 영웅이 있고, 영웅은, 소수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영화가 끝나갈 즈음에 맡은 임무를 완수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관객으로서 던질 수 있는 합당한 질문은 자연스레 '어떻게'가 됩니다. 닥터 스트레인지는 어떻게 악역을 멈추게 되나요. 메이버릭은 어떻게 임무를 완수하게 되나요. 그들이 소명을 다함에 있어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감정이나, 억지 혹은 우연의 힘을 빌리지 않나요? 


[닥터 스트레인지]는 마블 영화답게 능숙하게 이야기를 풀고 맺습니다. 중간중간에 코믹한 요소를 불어넣는 여유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마블이 많은 관객들에게 사랑받을 수 있는 근본적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탑 건]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과도한 감정을 배제한 클리셰와 톰 크루즈 형님의 뛰어난 신체적 능력을 빌려 이야기를 마무리 짓습니다. 극의 초반과 후반에는 할리우드 특유의 냄새를 풀풀 풍기긴 하지만 이 정도는 눈감아 줄 법합니다.  


극에 후반부에 다 달아 우리의 톰 형이 '어떻게' 임무를 완수할지가 대체로 드러나, 한 숨 돌리며 영화를 볼 무렵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삶도 한 편의 히어로 영화처럼 '어떻게'에만 집중해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의 삶이 언젠가 어떠한 소명 - 그것이 지성의 경계선을 넓히는 연구가 되었든, 적당히 큰돈을 버는 일이 되었든,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일이 되었든 - 을 이룰 것이 분명하기에 그 과정을 믿음과 함께 즐거운 마음으로 흘려보낼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과 함께 어둑어둑해진 밤을 터벅터벅 걷다가 집에 다다를 즘에는 앞선 질문에 대한 좋은 대답을 발견해 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어떠한 소명을 이룰 것인지 알 수 없더라도, 차분한 마음으로 그저 그리 믿어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무너질 것만 같은 순간들을 찾아오면, 영웅이 거쳐가야 할 고난의 일부라 생각하며 힘겹더라도 계속 나아가면서 말입니다. 그러다 보면, 아주 가끔씩, 삶에 의문을 가지는 것을 잊을 정도로 마음이 폭신해지는 순간이 찾아와, 멈추지 않고 걸어왔음에 감사한 마음이 들지도 모릅니다. 


 때때로 다가올 멋진 순간들을 기다리며, 저는 즐거운 내일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저와 가까운 사람들도 즐거운 순간들을 더 자주 조우하길 소망해 봅니다. 


  

(*) 제목은 지인의 쓴 글의 표현을 빌렸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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