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시리즈. 85화. 가정조사 D-1

가정조사 전야, 나를 지키는 선언

by 나은

아이를 학교에 배웅하고 도서관에 왔다.

구청에서 주관하는 시집 출간 사전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학교 다닐 때 수필은 몇 번 썼지만 시는 내 영역이 아니었다.

그런데 요즘 들어, 마음을 한 줄의 언어로 압축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심란한 마음을 글로 쏟아내다 보면 과거의 어둠 속으로 침몰해 버리기도 한다.

그 매너리즘을 조금이라도 건져 올리고 싶어 시를 쓰기로 했다.

게다가 출판까지 가능하다니, 기대가 없을 수 없다.


이른 시간에 도착해 창밖을 바라본다.

어젯밤, 채 두 시간도 못 자 비몽사몽이다.

넷플릭스 드라마 〈은중과 상연〉을 15화까지 내리 달렸기 때문이다.

김고은과 박지현이 보여 준 생의 무게는 깊은 공감과 설렘,

그리고 죽음에 대한 묵직한 사유를 불러왔다.

“싫어하는 건 생각하지 않아 좋은데,

미워하는 건 자꾸 생각이 나서 짜증 난다”는 대사는

내 마음을 곧장 꿰뚫었다.


이혼은 결국 상대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결정할 수 있다고들 말한다.

나는 이미 그 단계를 지나왔다.

분노도 원망도 내 안에서 오래전에 소진되었다.

그래서 이제야 담담히, 오히려 차분히 이혼을 선택할 수 있다.

새우등을 하고 누워 있는 그의 뒷모습을 볼 때도

내 마음을 흔드는 것은 화가 아니라

그와 함께했던 세월이 남긴 진중한 결론뿐이다.


시험관 시술 시절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임신만 되면 남편의 분노도,

나의 비굴함도 희석될 거라 믿었던

그 어리석은 확신이 미치도록 후회된다.

자신을 지키겠다는 은중의 단호한 결별처럼

나는 왜 결단하지 못했을까.


어릴 적부터 “씩씩하다”는 이유로

모든 선택을 스스로 떠안아야 했다.

나도 보호받고 싶었고, 응원받고 싶었고,

누군가의 시선 안에서 온전히 사랑받고 싶었다.

그러나 자유라는 이름의 무관심은

결혼생활 속에서 나를 을(乙)로 만들었다.

평생 친구이자 조력자가 될 상대를

놓치면 평생 루저로 살 것이라는 강박,

그 왜곡된 두려움이 내 판단을 흐리게 했다.


그래서 책임졌다.

서른 해를 담대히 버티며

역경을 혼자 넘었다.

그런데 내 손에는,

먼지처럼 사라진 시간만 남았다.


이혼 준비 과정에서조차

“이 정도 이야기까지는 하지 말자”

“그의 변호사가 그를 어떻게 볼까”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 나를 본다.

오지랖이 아니라 어리석음이다.

내가 아무리 조심해도

그가 달라질 일은 없다.

그는 내 상처를,

내 아픔을 모른다.

전혀.


그래서 내일의 가정조사에서는

정화도, 미화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말할 것이다.

불임으로 스스로를 탓하며

내 삶을 비워낸 세월,

그 끝에서 내가 배운 것은 하나.


나는 나를 지켜야 한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고,

온전히 나로서 나를 세워야 한다.

이혼 확정은 그 출발점이다.

그때 비로소

내가 나로 사는 삶이 시작될 것이다.


내일, 나는 내 전심을 다해

그 사실을 증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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