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생의 마감
불임 판정을 받았을 때, 황망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넋이 나간 듯, 삶의 시간이 멈춘 듯,
순간적으로 죽음이라는 단어가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내가 내린 결론은 단호했다.
방법이 아직 남아 있다면, 해 보지도 않고 성급히 문을 닫을 수는 없다고.
그 결심이 수차례의 시술이라는 긴 터널로 이어질 줄은,
그때는 상상조차 못 했다.
중학교 시절 나는 친구들 대신 연애편지를 써 주며
넘치는 상상력으로 교실을 들썩이게 하곤 했다.”
철학 수업을 통해 깨달았다.
내 안은 섬세하고 잘 부서지며,
그렇기에 아픔을 내보이기보다 감추는 길을 택했다는 것을.
누군가의 위로는 늘 버겁고,
진심조차도 내겐 부담이었다.
그래서 타인의 상처엔 소독약을 발라 주면서
정작 나의 상처는 덮어 두었다.
밤마다 숨죽여 울었지만
아침이 되면 또 다른 이의 슬픔을 더 크게 끌어안았다.
나는 나를 지키지 못했다.
내면의 아우성을 차단했고,
감춤으로써 마음을 더욱 곪게 했다.
포장이 나를 송두리째 뽑아내어
전혀 다른 결로 살아가게 만들었다.
아이의 장애 진단은 또 한 번 죽음을 불러왔다.
치료실을 돌며 벗어나려 발버둥 쳤지만
부질없음에 직면하며 다시금 죽음을 떠올렸다.
그때 결심했다.
죽음만은 내 의지로 선택하겠다.
삶의 시작은 어쩌지 못했지만
마지막은 내 손으로 매듭짓겠다고.
사고나 병이 아닌, 스스로의 결정으로.
“그전에, 존엄사를 가장 앞서 제도화한 나라가 스위스다.
스위스의 존엄사 제도는 두 차례의 면담을 거친다.
첫 면담에서 선택의 이유와 의지를 묻고,
둘째 날, 결정 직전 다시 한번 마음을 확인한다.
당일에도 묻는다.
“산책을 하고 다시 생각해도 좋습니다.
언제든 번복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확고하면 약물이 주사되고,
잠시 뒤 의식이 사라지며
생과의 이별이 시작된다.
생명은 존엄이다.
자발적 생의 마감은
삶의 마지막까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깊은 의미가 있다.
조력을 받아 죽을 수 있음에
나는 오히려 감사함을 느낀다.
누군가가 존엄사를 위해 동행을 청한다면
나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다.
그의 선택을 존중하고,
마지막 길 위에서 그를 지켜 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내게도 그런 동행이 있기를 바란다.
죽음 앞에서만큼은
온전히 보호받고, 위로받고 싶다.
나는 나를 지켜내고 싶다.
죽음만은, 아니 죽음만이라도 내가 선택하고 싶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