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넋을 잃고
모르겠다, 세상이 나한테 왜 이런지…
한동안 넋을 잃고 살았다.
아무도 모르게, 나만의 어둠 속에서.
애써 괜찮은 척, 조금은 과장된 몸짓으로 일상을 버텨냈다.
그러다 문득 새로운 도전을 생각했다.
일을 시작하자.
임신이라는 절벽에 나를 내던지지 말고, 내 인생을 먼저 살아가자고.
그렇게 살다 보면, 언젠가 부가적으로 임신이 따라올지도 모른다고…
그때 한창 공인중개사 시험이 인기였다.
생각보다 책은 두껍고 페이지 수는 많았지만, 그래봤자 시험 아닌가.
이건 내가 공부만 하면 되는 거니까.
임신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지만, 시험은 내 노력으로 정할 수 있으니까.
그냥… 나를 건져내고 싶었던 것 같다.
실패와 낙오가 아닌 정상의 궤도로 내 삶을 다시 올리고 싶었다.
자격증 취득 자체보다는 신경을 딴 데로 돌릴 구멍이 필요했던 거다.
박문각 학원에 상담을 갔다.
책값도, 학원비도 생각보다 비쌌다.
1년에 한 번뿐인 시험인데, 공부할 양은 끝이 없었다.
그래도 책을 사들고, 2개월짜리 1회분 수강을 신청했다.
그것이 또 다른 실패의 쳇바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첫 학원 수업날, 깜짝 놀랐다.
20대 대학생부터 6~70대까지, 온갖 사람이 넘쳐났다.
강의실 자리 잡기 전쟁이 벌어지고, 새벽부터 대기표를 받으려는 사람들까지 있었다.
공부를 놓은 지 오래였던 나에겐 버거운 풍경.
1~2년 공부는 당연하고, 학원과 인터넷 강의를 병행해야 한다는 현실에 질식할 듯했다.
2달짜리 강의도 최소 3번은 들어야 하고, 족집게 강의, 기출문제, 모의고사까지…
돈에 민감한 남편에게는 말도 못 하고, 직장생활로 모아둔 쌈짓돈이 쉴 새 없이 빠져나갔다.
젊은 층에선 법대생들이 많았다.
문제 유형은 길고 꼬아놔서, 성격 급한 나에겐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도시락을 싸서 나간 학원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돈 많은 강남 부인, 고교생,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아줌마들, 실직한 남편들…
그 와중에 나는 또 시험관 시술에 도전했다.
강의를 듣던 중 화장실에서 전화를 받았다.
"실패입니다."
그 순간, 동기가 들어왔다.
나도 모르게 그 아이 어깨에 기대어 훌쩍였다.
난생처음 해보는 진상짓이었다.
"언니, 왜 그래? 무슨 일이야?"
"도전했는데… 안 됐어. 또 안 됐어…"
나보다 작고 야윈 그 아이는 말했다.
"언니,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다음엔 잘 될 거야. 언니, 힘내."
다음에 잘 될 거라고? 그걸 믿으라고?
그걸 믿은 게 벌써 몇 번째인지 아니?
거울 속 내 몰골이 너무 처참했다.
급히 눈물을 훔치고 머리를 넘겼다.
"나가자. 사람들한테 말하지 마."
강의실로 돌아왔지만, 교수님의 목소리는 웅웅 울릴 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술을 처음 마셨을 때처럼. 토할 듯이 어지러웠다.
멈추고 싶었지만 세상은 계속 돌았다.
강남역에서 걸어 집으로 돌아오니, 불 꺼진 빈집. 아무도 없었다.
어둠을 무서워하는 내가, 거실에 앉아 무릎을 세우고 고개를 파묻었다.
눈물이 뚝, 뚝.
"흥, 두고 봐라. 어림없어. 될 때까지 할 거야. 난 안 져."
옆집과 창이 붙어 있어 소리 내 울지도 못한 채, 거실 바닥에 쪼그려 누워 밤을 보냈다.
내 인생의 칠흑 같은 어둠은 아직도 반경이 넓다.
더 넓어지는 것 같다.
아리다. 왜 이리 가슴이 아린지.
모르겠다.
세상이 나한테 왜 이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