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임 60화. 교도소 수감 — 기대했다, 은근히

누가 누구를 가두었나

by 나은

그가 ‘교도소’를 입에 달고 산 그 시간, 나는 잠깐 기대했다.


거짓이 규칙처럼 굴지 않는 곳이라면, 차라리 그곳이 낫지 않을까.


아이와 나를 도구로 쓰던 세상에서 잠시라도 숨을 고를 수 있는 방을.



남편은 한동안 “교도소에 갈지도 모른다”를 입에 달고 살았다.

내가 놀란 건 그가 그렇게 겁이 많은 인간이었나 하는 점이었다.

평소의 그는 욱하는 성질을 주체 못 해 누나들에게도 하대했고, 이름 앞에 ‘누나’라는 호칭은커녕 입에 담기 힘든 말로 통칭했다.

해병대 제대를 평생 자부심으로 달고 살았지만, 그건 남자다움이 아니라 억지와 곤조의 다른 이름이었다.

술·담배를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걸 하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고, 모든 판단의 중심엔 늘 자기 자신만 있었다.


대화가 뜻대로 흐르지 않으면, 보통은 접거나 설득을 시도한다.

그는 윽박질렀다. 의견이 다른 상대는 곧 천하의 몹쓸 인간이 되었고, 그 몹쓸은 과장과 유포로 주변을 감염시켰다.

돌이켜보면 그의 막가파엔 조력자가 있었다.

누나들. 그를 정면으로 말리지 않는 대신, 자기가 직접 손에 흙 묻히지 않고도 누군가를 ‘골로 보낼’ 수 있게 박수와 거들떠보기를 제공했다.


결혼 한 달 만의 오토바이-택시 교통사고. 그는 세 달 넘게 입원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본 건 만행이었다.

6인실에서 식판이 날아다녔고, 내 머리를 내리찍어 캐비닛 모서리에 눈가가 찢어졌다.

사람들은 내 처지를 안타까워했지만, 시댁의 안타까움은 침상 위 ‘그’ 한 사람에게만 향했다.

병원 복도엔 소독약 냄새가 매일같이 속을 뒤집었고, 화상 전문 병동은 생과 사가 오가는 전쟁터였다.

나는 대소변을 받아내며 과민성 위궤양을 얻었고, 찢어진 눈가를 꿰매고도 다른 보호자에게 웃어야 했다.

연민과 동정의 눈빛은 오히려 내 스트레스의 가시였다.


친정 부모님이 멀리서 올라오던 날에도 그는 또 한바탕 병실을 엉망으로 만들고 사라졌다.

나는 병원을 뒤져 다른 층 복도 의자에서 만화책을 읽는 그를 찾았다.

후우—. 지금 돌아보면 의문은 한 가지다.

“어떻게 그 시간을 견뎠지? 아니, 왜 버텼지?” 정말 답답한 인간은 남편이 아니라, 그 곁을 버틴 ‘그때의 나’였을지 모른다.

미련한 곰처럼.


그런데 작은 유산모세의 기적처럼 편을 가르며, 시댁은 갈라섰다.

10원 더 받기 위해 이쪽저쪽 줄 서기가 시작되었고, 상황 파악 못 한 남편이 툭 내뱉은 “여자들이 무슨…” 한 마디로 관계는 돈과 말 사이에서 무너졌다.

시댁에 갈 일도, 만날 일도 사라졌다.

솔직히 편했다.



명절이면 20분 거리의 친정을 두고, 나는 혼자 시댁 대기 조가 되었다.

형님이 오면 함께 음식 준비, 명절 아침을 먹고 헤어지고… 그들 사이의 수십 년 묵은 다툼과 험담의 중간역은 늘 나였다.

도찐개찐의 레퍼토리. “이 대목에서 웃고, 저 대목에서 호응하고, 여기서 반문하라”는 듯 복붙 된 대사가 해마다 반복됐다.

그 사이 내 친정은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왜 그곳에 가지 못하는지 스스로를 설득해야 했다.

한 번은 ‘며느리 전상서’라는 종이를 들고 막내 시누이가 읊었다.

딸들이 친정으로 몰리면 며느리도 보내라— 글에는 분명히 적혀 있었지만, 현실은 그들만의 꺄르르였다.


낮은 싱크대 앞에서 허리를 굽혀 수북이 쌓인 설거지를 하면, 남편은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밤늦게 고모부의 ‘밤운전’ 동행을 위해 모두가 잠든 사이, 생각 없는 나만 홀로 깨어 기다렸다.

“오지랖”이라고 불렸던 엄마의 마음이 내 등을 떠밀었다.

먼 길을 달려올 누군가가 빈집 문 앞에서 서운해하지 않게.

아둔하면 육체가 고생이라더니, 나는 몸으로 배웠다.


작은 밭과 집 한 채로 서로의 마음이 멀어지고, 명절에도 시댁에 가지 않게 되었다.

좋았다.

한 번 시아버지 제사를 놓쳤을 때, 남편은 나에게 심하게 화를 냈다.

친아버지 제사를 그는 이후에도 출근 핑계로 빠졌고, 나는 혼자 다녀왔다.

그러다 완전한 등 돌림 이후, 시댁에 갈 일이 없어지자 오히려 홀가분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나도 안 가는데, 너도 친정 가지 마.”

나는 또 한 번 그의 마음을 먼저 생각했다.

“형제들과 단절된 채 명절을 보내면 마음이 아프겠지. 그럼 나도….”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엄마의 신념 내 삶의 규칙처럼 굴렀다.


우리 집은 4형제. 매달 회비를 모아 외식·여행 비용으로 쓰고, 요리에 진심인 새언니는 좁은 집의 북적임도 기꺼이 받아줬다.

해마다 엄마 생신·여름휴가·명절에 모였지만, 시댁 사정으로 나는 통 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아픈 건, 수년째 병원에 계신 아빠를 보러 가지 못한 것이다.

남편의 명분은 “어린아이를 병원에 노출할 수 없다.” 5년 넘는 그

시간 동안 남편의 병문안은 3번, 총 체류 시간 30분이 채 안 됐다.

빈손으로 와서는 본인 면도기 새 걸로 교체하며 무용지물을 아빠께 드린 뿌듯함, 친정 엄마가 생일이라고 건넨 100만 원아빠 병원비로 보탰다며 아직도 자부심으로 들먹인다.


“나만큼 처갓집에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 세상물정 모르는 한 문장이 내 가슴을 막는다.

대꾸해 봤자 내 입만 아프다.

엄마는 오지랖 넓게 시어머님께 목걸이를 사 드리고, 병원과 시댁을 발로 뛰었다.

내가 진짜 짜증 난 건 돈의 액수가 아니라, 엄마가 정성껏 보낸 음식들이 시누이들에게 ‘무단 분배’되고 맛 품평의 대상이 되는 그 장면이었다.

엄마의 애씀하대 받는 느낌.

엄마가 준 목화솜 침구를 내가 쓰다 딸에게 주는 건 괜찮았다.

그런데 몸에 걸쳐 맵시가 난 옷대놓고 달라하고, “식구끼리 나누자”면서도 조카 선물의 서운함은 정확히 계산하는 이중 장부가 있었다.

7형제의 2명 안팎 조카들을 어떻게 한 번에 다 챙기냐는 질문 앞에서, 나는 돌아가며 챙기고, 비어지는 지갑사라지는 물건들을 모른 척으로 메웠다.


서울에 산다는 이유로 맡은 뒤치다꺼리는 습관이 되었고, 오면 반기고 가자면 따르며 순종처럼 지냈다.

그러나 복붙 된 추억담은 해가 갈수록 심드렁해졌다.

결국, 시댁과 거리를 둔 건이 되었지만, 동시에 친정과의 만남을 제한하는 새 구속이 되었다.

늘 그렇듯 좋은 일만 일어나지 않는다. 잠깐의 기쁨은 롱런의 불행을 동반한다.


그렇게 순종했지만 아빠의 병세는 나의 무력한 부재 속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다가갔다. 그게 나를 아프게 한다. 지금도.


그리고 남편이 “교도소”를 입에 달고 살던 그 시간, 나는 잠깐 기대했다. 은근히.

거짓이 규칙처럼 굴지 않는 곳이라면—

차라리 그곳이 낫지 않을까.



작가의 이전글불임 시리즈 59화. 시한부 인생이 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