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락은 어디까지인가…
어정쩡한 인사를 남기고 집으로 돌아왔다.
떠나는 내 등 뒤로 수사관의 애잔한 시선이 따라왔다.
동정이 공기처럼 깔린 자리에서는 아이와 눈을 맞출 겨를도 없었다.
차에 오르자마자 남편은 쉴 새 없이 말했다.
“저 사람 생각보다 얘기가 통하더라. 처음엔 벌레 보듯 하더니 사정 설명하니까 공감하더라고. 선처받게 도와준다네. 좀 기다려보자고.”
'그래, 그래서 좋겠다. 아내와 아이를 네 도구로 쓰는 세계에서는 오늘도 네가 주인공이겠지. 도촬이라는 영광스러운 사건에 내가 동참했으니 박수라도 쳐야 할까.'
며칠 뒤, 낯선 번호가 울렸다.
남편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며 수사관이 나에게 연락했다.
며칠 날 다시 경찰서로 오라는 통보. 알겠다고 하고 끊으려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를 붙들었다.
“위중하시다던데… 너무 걱정 마시고 수술 잘 받으세요. 아이 때문에 많이 힘드실 텐데, 잘 되실 겁니다.”
경찰관에게 위로 아닌 위로를 받는 이 촌극.
더 당혹스러운 건 내가 시한부 선고라도 받은 사람처럼 취급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직장암 ‘초기’다.
생명을 흥정할 자리는 아니고, 동정의 무게를 감당할 처지도 아니다.
허풍은 집안 내력이지만, 자기 살자고 아내를 말기 암 환자로 포장하는 상상력에는 새삼 혀를 찼다.
수사관의 다음 말이 더 가관이었다.
“아이 치료비가 300 넘는다 들었어요. 수술비까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신경 쓰고 있을게요.”
300만 원? 그 치료는 한참 전에 끊겼다.
아이에게 어떤 치료를 해야 하는지에는 관심도 없던 그가 매달 청구서 숫자만 보며 말했다.
“나아지는 것도 없는데 언제까지 돈을 쓰냐. 니 돈 아니라고 펑펑 쓰지 마라.”
몇 년을 버티다 코로나를 기점으로 모든 치료가 중지됐다.
그런데 300이라니.
거짓말이 생활습관이 된 사람의 말은 이렇게 정교하게 남을 속인다.
모멸감이 목구멍을 탔다.
그의 하루는 이랬다.
일을 쉬던 그는 거실 매트리스에 비스듬히 누워 늦은 아침을 시작했고, 핸드폰 게임과 유튜브를 보다가 의견 다른 댓글창에 울분을 쏟아냈다.
한때는 그 울분이 신고로 되돌아오기도 했다.
돈 들어가는 도박만 빼고, 세상에서 공짜를 캐는 법에 능한 사람.
귀를 막고 눈을 감았던 지난날의 내가 떠오른다.
분명했다.
그때의 나는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다.
'어떻게 참았을까. 도대체 어떻게 공존했을까'
그때의 나를 붙들어 묻고 싶다.
저녁, 귀가한 남편에게 수사관의 말을 전했다.
나는 물었다.
“나를 말기 암이라고 했어?”
그는 되물었다.
“왜? 그건 왜 물어?”
말끝이 흐렸다.
맞다, 역시 그랬다.
그는 덧붙였다.
“야, 내가 교도소를 가냐 마냐인데 절실하게 말해야지. 어차피 해결되면 두 번 다시 안 볼 건데, 뭐.”
'두 번 다시 안 볼 거면, 왜 없는 사실을 지어내 내게 덮어씌우는가. 왜 네 죄를 내가, 그리고 아이가, 대신 감당해야 하는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토해낸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안다.
내 모멸감엔 관심이 없고, 그에게 모멸감이라는 단어는 없을 테니까.
오히려 '배려가 없다'라고 윽박지를 사람.
없는 사실은 그의 구명보트였고,
내 이름엔 따개비 같은 오물이 달라붙었다.
아무리 몸부림쳐도 떨어지지 않는다.
누가 내게 달라붙은 이 찌꺼기들을 쓸어낼 수 있을까. 숨이 막힌다.
쌓이고 쌓여 나를 가라앉히는 것들. 지금의 해결책은 분명하다.
하루라도 빨리 이 사건에서 벗어나는 것. 제발 빨리 끝나기를.
그리고 문득, 섬뜩한 생각 하나가 스쳤다.
교도소가 더 낫지 않을까. 최소한 그곳에서는, 거짓이 규칙처럼 군림하진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