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지금 하는 기술영업 판에 들어온 건 2021년이었다. 입사는 2020년 초에 했지만, 1년 정도는 사장님이 일을 배우라는 의미에서 우리 주력 장비가 아닌 보조 장비를 영업시켰기 때문이다.
2021년에는 정말 멋도 모르고 영업했다. 경쟁사가 이 산업군에서 가진 영향력이 얼마나 막강한지, 그들이 가진 영업망과 서비스 신뢰도, 레퍼런스, 시장점유율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모르고 그냥 닥치는대로 전화해 만나주는 고객들에게 우리 회사 이런 장비도 있습니다, 수준으로 영업했다.
그러나 몇 년 영업을 하면서, 입찰에서 규격을 다 맞췄는데도 규격에서 탈락하고(단순히 점수가 낮은것이 아닌, 규격 통과 자체가 안되는), 이미 완벽하게 경쟁사의 스펙으로 작성되어 있는 입찰규격서를 보면서 파고들 틈이 없는 경험을 몇 번 하고 나자 새삼 업계 1위의 강력함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쉬지 않고 꾸준히, 열심히 하면 될 줄 알았다. 제품을 더 공부하고, 고객을 더 많이 만나고, 가격을 더 맞추면 언젠가는 뒤집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었다. 기술영업에서 가장 잔인한 점은 검증되지 않는 업체는 검증을 할 기회조차 얻기 어렵다는 점이다. 우리 제품이 업계 1위의 제품보다 품질면에서는 더 낫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고 실제로 글로벌 시장에서는 마켓 쉐어가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객관적인 데이터도 가지고 있었지만, 국내 시장에서의 레퍼런스가 없다는 점이 고객에게 그렇게 큰 걸림돌로 작용할 줄은 몰랐다.
단순했다. 고객은 어디를 선택하면 안전할지를 본다. 그 안전이라는 건 장비의 좋고 나쁨이 아니다. 혹시라도 문제가 생겼을 때, 자신을 방어할 논리의 안전성이다. 즉, 업계 1위의 제품을 선택하면 그래도 이 업체는 검증된 업체고 가장 많이 사용하는 장비라는 방어논리가 형성되지만, 우리 같은 작은 기업의 제품을 선택하면 만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길 시 '그러길래 왜 듣도 보도 못한 기업 제품을 골라서' 라는 공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내가 아무리 좋은 조건과 가격을 가져가도 의미가 없었다. 물론 가격을 최우선으로 치는 고객들이 간혹 있긴 했지만, 우리 회사가 성장할만큼의 매출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그때 알았다. 이건 '잘해서 이기는 게임'이 아니라는 걸.
그래서 생각을 바꿔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장비를 선택해야만 할 이유는 뭐가 있을까?
솔직히 먼저 생각난 건, 접대였다. 술과, 백마진과, 기타 말로 하기 어려운 여러가지 뒷거래들.
그러나 그 생각은 곧바로 접었다. 우선 내가 그런 것들을 능숙하게 할수도 없고 하고싶지도 않았을 뿐 더러, 가장 중요한건 그런 건 나보다 경쟁사가 훨씬 잘할거라는 생각이었다.
내가 떠올린 질문의 답은 어느 한 대형 프로젝트에서 나왔다.
우리 장비의 경우, 대형장비일수록 장비 운용이 어려웠다. 모든 장비들이 그렇겠지만, 실제로 장비가 커질 수록 세팅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구조였다. 몇 년 전부터 시장에서 요구하던 초대형 장비의 경우 세팅 시간만 거의 8시간, 거의 하루를 날리는 수준이었다.
이 부분을 고객들에게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지금 문제는 장비의 메인 파트가 1대여서 생기는 문제였다.
그렇다면 메인 파트를 2대를 제공한다면?
바로 계산기를 두드려보았다. 과연 메인 파트를 2대로 제공했을 때 경쟁사가 현재 납품하고 있는 가격에 맞출 수 있을 것인가?
메인파트가 2대가 된다는 것은 단순하게 장비 1대가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선, 제반사항, 지반공사 등 모든 부분이 늘어나는 일이다. 단순히 장비 가격 1대만 늘려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다행히도, 우리 마진을 어느정도 남기면서도 경쟁사의 1대 가격과 경쟁할만한 가격으로 제공이 가능하다는 결론이 섰다. 반대로 말하면, 경쟁사는 이 시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마진을 남기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국가 사업으로 초대형 장비를 구매하고자 하는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고객은 내가 오는 걸 막지는 않았지만 명확한 메리트가 없다면 우리 장비를 사지는 않을 거라고 분명하게 말하던 고객이었다.
그 고객에게 찾아가서 현재 잡혀있는 예산에서 메인 파트를 2대로 늘려주겠다고, 그리고 이렇게 했을 때 세팅 시간이 8시간에서 2시간으로 줄어드는 이점에 대해서 설명했다. 뿐만 아니라 메인 파트가 2대로 늘어나며 당연히 제품의 내구성도 늘어나고 또 장비 세팅에 있어 조작이 줄어들기 때문에 조작 미스로 인한 고장도 줄어든다는 점도 함께 어필했다.
고객이 쭉 듣더니 내게 물었다.
“이건… 왜 지금까지 이렇게 안 했죠?”
그 질문이 나오는 순간, 나는 이건 이긴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건, 판을 뒤집을 수도 있겠다.
그 고객은 내가 한 번 생각의 물꼬를 터 주자, 본인이 예산을 추가하며 본인에게 맞는 세팅을 요구하기 시작했고 결국 그 입찰은 우리가 이겼다.
뿐만 아니라 입소문이 나기 시작하며 특히 초대형 장비 쪽에서 많은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경쟁사도 곧바로 우리의 전략을 따라하기 시작했다. 생각하기가 쉽지 않았을 뿐, 기술적으로 어려운 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전략을 시장에서 처음 퍼트린 건 나였고, 경쟁사는 오히려 지금까지 도대체 얼마를 남겨먹은 것이냐 라는 새로운 의혹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경쟁사는 우리를 따라하는 회사가 되었다. 이 이미지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물론 그렇다고 곧바로 경쟁사를 제치고 우리가 업계 1위가 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경쟁사도 같은 세팅을 할 수 있었고 우리 회사를 견제하기 위해 노마진 전략으로 나와서 지금은 엄청나게 치열한 경쟁중이다.
그러나 내가 잡은 포지션은 곧바로 1위가 되는 포지션이 아니라, 고객이 대안을 찾을 때 최 우선적으로 찾을 수 있는 제 1 대안의 위치였다. 지금은 이것으로 충분했고, 또 이미 판이 바뀌기 시작했다.
이 판을 완전히 뒤집기 위해서는 보다 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판을 뒤집기 시작한 순간은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아주 작은 생각의 전환은,
업계의 판도를 바꿀 수도 있다.
이것이 기술영업의 매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