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을 피하던 소녀

마음이 살짝 기운다- 나태주

by 레토

나태주 시인의 시집 『마음이 살짝 기운다』는 일상의 작고 소중한 조각들을 꿀벌이 꿀을 모으듯 엮어낸 작품집이다. 세상을 향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과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 은은한 수채화 일러스트가 시적 감성을 풍부하게 채워주는 것도 시집을 읽다 만나는 또다른 즐거움이었다. 이 시집은 드라마 <로맨스는 별책부록>이라는 드라마에서 배우 이종석이 맡은 역할, 편집장 차은호의 진심을 전하는 매개체로 등장하며 화제를 모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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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하고 간결한 문체 속에는 지친 일상을 다독이는 위로와 평온한 분위기가 주를 이룬다. “사랑아, 너 그냥 그 자리에서 있거라”라는 서문의 글처럼, 시인의 다정한 언어들은 읽는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물들인다. 안부가 필요한 순간, 곁에 두고 꺼내 보기 좋은 선물 같은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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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6

나의 골리앗

내가 다윗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다윗에게처럼 내게도 언제나

골리앗이 있었다

어떤 모습으로든

어떤 이름으로든

골리앗이 있었다

골리앗은 내 앞에서 내 뒤에서

언제든 틈만 있으면

나를 쓰러뜨리려고 으르렁거렸고

때로는 내 안에서

내 몸과 마음을 찢고 밖으로 나와

나를 부수려고 용을 쓰곤 했다

그러나 나는 번번이

그 골리앗을 피해 갔다

골리앗을 죽이거나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다

다만 골리앗의 눈을 속이고

골리앗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으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나는 지금도 골리앗을 피해 도망치는 중이다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라는 골리앗을 지나, 다윈의 생존법

시 속의 골리앗은 내 앞뒤에서 틈만 나면 나를 쓰러뜨리려 으르렁거리고 때로는 내 안에서 몸과 마음을 찢고 나와 나를 부수려 한다. 이 시를 읽으며 떠올린 나의 어린 시절, 그곳엔 도저히 꺾을 수 없었던 거대한 골리앗인 아버지가 있었다. 자식을 소유물로 여기며 당신의 뜻대로 휘두르고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땐 짓밟기까지 했던 아버지는 다윗인 내가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도 이길 수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골리앗은 그 형태를 달리하여 내 안으로 숨어들었다. 이제 나를 위협하는 것은 외부의 폭력이 아니라, 걱정이 많고 도전 정신이 부족한 내 안의 소심한 마음이다. 골리앗을 죽이거나 없애버리면 진정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라는 골리앗을 피해 도망치며 살아남았던 것처럼, 지금도 나는 내 안의 불안과 망설임이라는 골리앗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완벽한 승리는 아닐지라도 오늘 하루 골리앗에게 잡히지 않고 나의 길을 걸어가는 것, 그 자체가 다윗의 생존일지 일 수 있다. 아슬아슬하게, 그러나 끈질기게 나 자신을 지켜내고 있는 모든 순간, 이것이 바로 이 시가 주는 위로이자 삶의 정답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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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19

육아퇴근

애기 둘 다 재우고

10시 넘어 11시 가까워

겨우 퇴근한다는 말

마음에 돌을 던진다

그래 퇴근, 좋다

하루 종일 엄마 노릇

그 노역을 내려놓고

퇴근, 좋겠다

잘 자거라 잘 쉬거라

꿈속에서라도 혼자가 되어

훨훨 너의 동산에

맨발 벗고 뛰어놀고

하늘을 날아 구름도 되고

그러렴

내일은 또 아침

아이들 잠에서 깨면

출근해야지.


육퇴 후,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던 시간

시를 읽는데 나민애 교수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태주 시인의 딸, 나민애 교수님. TV 어느 한 프로그램에 나와 눈물을 보이며 아버지를 떠올렸던 그 모습. 나는 어쩌면 이 시가 나태주 시인이 자신의 딸인 나민애 교수님이 어린아이를 키우며 고군분투하던 시절을 보며 쓰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인은 부모 노릇을 노역이라 표현하며 꿈속에서만큼은 그 고단함을 내려놓고 맨발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자유로운 구름이 되기를 바란다.


시속에 담겨있는 표현들은 지금은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 된 아들이 유치원생이던 시절의 나를 불러냈다. 당시 육퇴, 일명 육아 퇴근 후의 시간은 남편과 내가 매일 밤 치러야 하는 가장 치열한 작전이었다. 아이를 재우러 들어간 한 사람이 사투를 벌이는 동안, 거실에 남은 다른 한 사람은 아주 조용히, 그러나 부산스럽게 야식을 준비하곤 했다. 혹시라도 치킨 배달 초인종 소리에 아이가 깰까 봐, 남편은 추운 날도 문밖에서 배달원을 기다리며 서 있기도 했다. 그 짧은 육퇴 후의 한 시간을 위해 우리 부부는 완벽한 한 팀이 되어야만 했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우리는 부모 노릇이 처음이라 모든 게 어설펐고, 자신의 인생과 누군가의 삶을 책임져야 하는 어른이라는 무게 앞에 갑자기 던져진 존재들이었다. 시 속의 퇴근이라는 말에 마음이 아린 이유는 그 짧은 휴식 뒤에 어김없이 다음 날 아침의 출근이 기다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부모라는 이름으로 매일 출퇴근을 반복하고 있지만 나태주 시인의 다정한 위로처럼 오늘 밤은 모두가 꿈속의 동산에서 홀가분하게 뛰어놀 수 있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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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72

다시 중학생에게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버스를 놓칠 때가 있단다

잘못한 일도 없이

버스를 놓치듯

힘든 일 당할 때가 있단다

그럴 때마다

잊지 말아라

다음에도 버스는 오고

그다음에 오는 버스가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떠한 경우라도 아이야

너 자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너 자신임을 잊지 말아라.


버스 정류장에 서 있는 무채색 소녀에게

시인은 우리에게 잘못한 것이 없어도 힘든 일이 닥칠 수 있지만 또 다음 버스가 오듯 기회는 반드시 다시 찾아온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라는 다정한 당부를 건넨다. 이 시를 읽으며 내 생의 가장 혼란스러웠던 중학교 시절을 떠올렸다. 겉모습은 초등학생 티를 벗어 다 큰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은 여전히 서툴고 할 줄 모르는 것투성이인 채 갑자기 쏟아지는 책임감에 압도당하던 그 불안했던 계절.


어른들은 아이가 중학생쯤 되면 이제 다 컸으니 스스로 알아서 챙기길 바란다. 하지만 사실 사춘기라는 치열한 터널 속에서 여전히 길을 잃은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그 시절의 나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무채색의 낯빛으로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무표정한 소녀였다. 이제 나는 시간을 거슬러 정류장의 그 소녀에게 다가가 가만히 안아주고 싶다. “오늘 하루도 견디느라 힘들었지? 내가 너를 좀 아는데, 너는 결국 잘 해낼 거야. 잘 살아낼 거니까 너무 애쓰지 말고 기운 내”라고 말이다.


그때의 나에게 전하지 못한 이 따뜻한 고백은 이제 학교를 마치고 돌아올 내 아이에게 건넬 다정한 진심이 되었다. 이제 곧 사춘기라는 거친 바다를 향해 갈 아들에게 ‘오늘 하루 고생 많았고 내일도 너는 충분히 잘 해낼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라고 다독여주는 그런 어른이 되어주려 한다. 내가 간절히 필요로 했던 단단한 믿음의 말 한마디가, 아이에게는 다음 버스를 기쁘게 기다릴 수 있는 든든한 정거장이 되어주길 바란다. 아슬아슬하게 살아남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귀한 존재는 결국 나 자신임을 시인의 목소리를 빌려 다시 마음에 새겨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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