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생명으로 빚어내는 시간

눈물이 움직인다 - 손택수

by 레토

창비시선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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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택수 시인의 『눈물이 움직인다』는 슬픔을 고통에 가두지 않고 능동적인 생명력을 가진 존재로 인식한다. 시인은 ‘눈물이 움직인다’라는 말에서 슬픔이 가진 유동성을 포착하고 이를 통해 타인과 함께할 가능성을 찾고 있다. 시인의 시선은 낮고 소외된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낡은 의자, 발이 뭉툭한 비둘기, 폐업한 빵집 등 사소한 일상 속 존재들에 애정을 보인다. 이 시집은 지루한 반복 속에 숨은 빛나는 순간들을 찾아내어 슬픔이 고립이 아닌 서로를 껴안는 따뜻한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며 다정한 위로를 건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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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

미륵사지에서

고대의 사랑을 나는

목탑 양식의 석탑이라고 배웠다

그뒤부터다

폐허가 폐어처럼 폐호흡을 한다

층층나무 잎잎처럼 흔들리는 돌들과 함께


폐허에서 길어 올린 천년의 폐호흡

익산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사 시험의 단골 정답인 '목탑 양식의 석탑'이라는 건조한 지식으로 먼저 다가온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국경을 초월한 무왕과 선화공주의 로맨틱한 전설과 발굴 과정에서 드러난 사택지적의 딸(사택왕후)이라는 실체적 진실 사이의 미묘함이 흐른다. 무왕의 진짜 사랑은 누구였으며 진짜 왕비는 누구였는가에 대한 호기심은 박제된 유물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불씨가 되었다.


시인은 석탑이 단순한 건축 기법의 재현이 아니라 누군가를 향한 사랑의 마음임을 보았다. 그것이 선화공주든 사택왕후든, 차가운 돌을 깎아 부드러운 나무의 결을 살리려 했던 그 비효율적이고 정교한 정성 자체가 바로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 시의 진짜 매력은 비슷한 단어의 언어적인 도약에도 있었다. 정지된 공간인 ‘폐허(廢墟)’를 응시하다가 가뭄 속 진흙에서도 폐로 숨을 쉬며 버티는 물고기인 ‘폐어(肺魚)’를 떠올렸던 시인. 그리고 무너진 돌무더기들이 여전히 ‘폐호흡(肺呼吸)’을 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천년의 세월을 견딘 돌들이 층층나무 잎사귀처럼 가볍게 흔들린다는 묘사는 박제된 역사가 살아 움직이는 기분이 들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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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1

수국

꽃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묵묵히

피어나는 수국은

내 헛된 비유들에 대한 위로 같은 것,

꽃을 시늉하는

궁리에 궁리 끝의 작위여

작위의 찬란이여

헛것이라면 참으로

헛꽃이라면

헛헛한 속을 달래는 헛제삿밥의

고봉 같은 것이 있어

수국은 피어난다

나의 삶도 가설

나의 말도 헛것만 같을 때

지는 것이 꽃이라고,

아닌

꽃으로서


헛꽃이 건네는 아름다운 위로

가장 좋아하는 꽃을 물어본다면 언제나 그 대답은 같다. 수국이다. 은은한 빛과 동그란 공 모양이 주는 안정감이 여느 꽃과 다른 인상을 주어 늘 봄이 되면 짧은 기간 볼 수 있는 수국에 눈이 간다. 시를 읽으며 어느 봄, 제주도에 수국을 보러 가서 원 없이 수국을 만끽했던 기억도 났다. 그런데, 그랬던 수국이 꽃이 아니라고? 이게 진짜인가 싶어서 시를 읽다 말고 정보부터 검색해 보았다. 진짜 꽃이 아니었다. 곤충을 유혹하기 위해 꽃받침이 꽃잎처럼 화려하게 진화한 것으로, 암술과 수술이 없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한다. 우리가 수국이라고 보는 대부분의 화려한 덩어리는 바로 '헛꽃'이었다.


시인은 수국이 꽃이 아님을 알면서도 묵묵히 피어나는 모습을 보며, 실체에 닿지 못하는 자신의 헛된 비유들에 대한 응답을 찾았다. 수국이 꽃을 시늉하는 그 궁리 끝의 작위를 비난하는 대신 찬란함이라 보았다. 비록 가짜일지라도 존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꾸며내는 모든 몸짓에 대한 긍정의 시선으로.


가짜가 진짜보다 더 큰 위안을 줄 수 있다는 역설은 우리의 삶이 정답 없는 가설처럼 느껴졌다. 나의 삶과 말이 때로 헛것처럼 느껴져 자괴감이 들 때, 수국을 보자. 꽃이 아니면 좀 어떠랴. 누군가의 마음을 흔들고 지는 순간까지 꽃의 품격을 지켜낸다면 그 자체로 충분히 꽃으로서 산 것이 아닐까? 제주도에서 만끽했던 그 화려한 수국밭은 단순한 꽃의 군락이 아니라 가짜임을 알면서도 찬란하게 피어나기로 결심한 생명들의 거대한 위로였다. 비록 열매 맺지 못하는 헛꽃일지라도 누군가의 텅 빈 마음을 채워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수국은 이미 완벽한 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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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76

빵 나오는 시간

반죽과 발효 상태에 따라

삼십분의 오차가 있을 수 있습니다

삽십분의 오차로 이 거리는 그냥 거리가 아니지

빵집 문이 열렸다 닫힐 때마다 거리의 공기도 빛도 노릇노릇

빵틀 위로 부풀어 오른 반죽처럼 나뒹구는 전단지도 낙엽도 바삭바삭

낙엽은 우수수 떨어지길 멈추고 버스는 부르릉 달려가길 멈추고

언제나 자동 점멸하는 신호들의 자동과 반복이

고소한 박자에 맞춰 깜박거리지

눈 오는 소리처럼 갓 나온 빵이 내는 소리를 나는 얼마나 좋아하였던가

그건 가마에서 나온 도자기들이 내는 소리와도 같았지

온탕에서 냉탕으로 건너오면 찌릿하던 혈관의 느낌

여느 거리와 다를 바 없는 거리, 여느 시간과 다를 바 없는 시간도

혈관을 따라 전류처럼 번져가는 감각에 새뜻해지곤 했지

개업과 폐업은 이 거리의 일상이 되었으나

기다린다 빵 나오는 시간을,

시간도 반죽이 되어 빵틀 속에서 부풀어 오르는 거리를

안내판만 내어주고 몇 주째 문이 닫혀 있는 빵집

가끔씩 소보로빵을 덤으로 끼워주던 그 사내를


밤식빵의 온기가 주는 고소한 마법

주말마다 가는 우리 동네 도서관 앞에는 맛있는 빵집이 하나 있다. 유명해지기 전부터 단골이었던 이곳은 우리 가족에게 든든한 곳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주말 11시면 가장 인기 있는 ‘밤식빵’을 포함해 대부분의 빵이 다 팔리고 없다. 맛있는 빵집이 있어 든든하면서도 이제는 빵 나오는 시간에 맞춰 서둘러야만 겨우 맛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이 단골로서는 못내 아쉽기도 하다.


시인은 빵이 구워지는 시간이 거리의 공기와 빛을 노릇노릇하게 바꾸고 길 위의 낙엽도 바삭바삭하게 만든다고 한다. 갓 나온 빵이 내는 소리를 눈 오는 소리에 비유하며 무미건조한 일상이 감각적인 경험으로 변하는 순간을 그려주었다. 시인의 표현을 따라가면 빵이 나오는 시간은 단순히 음식을 사는 시간이 아니라 시간 자체가 반죽 되어 부풀어 오르는 마법 같은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시의 끝자락, 개업과 폐업이 일상이 된 거리에서 소보로빵을 덤으로 얹어주던 단골 빵집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대목에서는 쓸쓸함도 묻어났다. 우리 동네 빵집의 밤식빵이 주는 든든함도 결국 그 빵을 만드는 사람의 온기가 담겨 있을 것이다. 비록 줄을 서야 하는 수고로움은 늘었지만, 빵집 문이 열릴 때마다 거리의 공기가 노릇하게 익어가는 고소함을 즐길 수 있다는 것으로도 따뜻함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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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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