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토피아에 살아가는 미래의 우리

카누를 타고 파라다이스에 갈 때-이묵돌

by 레토

인간성이야말로 새로운 SF의 본질이 되어야 한다.

현실에서 외면당한 우리 ‘인간’들을 초현실에서 보듬어 주길


매주 동네 도서관에 가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신착 도서’ 코너이다. 그런데 이날 세로로 꼽힌 책들 가운데 유독 눈에 띄는 붉은 책이 있었다. 신착 도서에 같은 책이 세 권이나 꽂혀 있는 일은 잘 없는데...


자연스럽게 손이 간 책의 표지는 너무 예뻤다. 글자가 형광등 빛을 받으니 홀로그램처럼 무지개 빛을 띄었고 책의 색감도 좋았다. 제목도 카누를 타고 파라다이스로 간다니, 뭔가 서정적인 책이겠거니 하는 마음에 뒤쪽은 보지도 않고 책을 빌려 집으로 왔다.


집에 와서 뒤표지를 본 순간, 아.. 김영하 작가님의 <작별인사> 때처럼 서정적이고, 잔잔한 이야기일 것이란 나의 지레짐작에 다시 속았다. 또 SF라니 그럴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나는 희한하게 책의 표지가 예쁜 것에 많이 약한 편이라 일단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하루 만에 다 읽을 정도로 빠져들어 읽었다.


피터 팬의 결론

이야기는 어느 대법관이 병원에서 뇌용량을 판정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대법관의 뇌 용량이 고작 7기가 뿐이라니. 그는 도저히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다. 뇌가 손상되지 않은 이상 일정한 시기마다 ‘교체소’에서 육체를 교체할 수 있는 세상. 배경이 되는 세상에서는 죽음을 맞이하는 인구가 이제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p.188

“다시 말해, 네 뇌에는 지식, 즉 텍스트밖에 없다는 거야. 지식은 많은지 몰라도 기억에 남는 장면이나 감정은 거의 없다는 거지.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래. 너는 그 몸으로 120년을 살았지만 그 대부분을 ‘재미없게 살아서’ 뇌용량이 형편없는 거라 이말이야. 맨날 공부만 하다 보니까 뇌가 텅텅, 비어버렸다고.”


p.189

이게 얼마나 허망하냐고, 죽을 때가 다 됐는데, 공부하고 일한 것 빼면 딱히 기억나는 일도 없고, 진심으로 기뻐하거나 슬퍼한 순간도 거의 없었고, 뭐 그런게.


p.194

사실은 지금도 그런 생각이 들어. 나날이 몸이 문드러지는 바이러스에 걸렸을 때, 몸을 교체하지 않고 그대로 죽었다면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랬더라면 적어도 죽는 그 순간까지는 사랑받았겠지. 이제 나는 알고 있어. 인간에게 필요한 건 영원이 아니라, 영원하다면 좋을 그런 행복 속에서 맞이하는 죽음이야.


사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기술의 발전 위에서 영생을 획득하여 삶을 거의 무한에 가깝게 지속하고 싶어 할 지도 모른다. 이야기 속 세상 사람들은 이제 죽음이라는 것이 낯선 세상 속에 있다. 과연 그런 세상이 오면 정말 행복할까? 나는 ‘인간에게 필요한 건 영원이 아니라, 영원하다면 좋을 그런 행복 속에서 맞이하는 죽음’이라는 소설 속 표현에 오히려 공감한다. 어쩌면 우리는 삶에 끝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끝에서 후회하지 않기 위해 한 번뿐인 내 삶을 아끼며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을지 모를 나의 고마운 가족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을지도 모른다.


카누를 타고 파라다이스에 갈 때

한밤중 달빛 아래 카누를 타고 섬으로 향하는 한 소년과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고요하고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잔잔하게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로 점점 깊게 빠져들었고 나와 그들과의 마지막 순간에, 나는 한동안 멍하니 빠져나오지 못했다.


p.354

“그럼, 이 해파리 같은 것은 뭐예요?” 소년이 누렇게 뜬 얇은 껍질 같은 것을 흔들어 보이며 물었다.

“그건 비닐이란다. 아직도 썩지 않았군.”

“비닐이 대체 뭔데요?”

“그러게. 그걸 뭐라고 해야 하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응징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p.358

그러나 엄마는 언제나 소년의 호기심을 못마땅해했다. 아빠는 아예 매를 들어 다그치기도 했다. 이상한 글자를 쓰지 마, 멍하니 먼 바다를 쳐다보고 있지 마, 도형을 그려서 무언가를 계산하지 마, 별들의 움직임을 관찰하지 마, 잘 쓰고 있던 도구를 네 멋대로 바꿔대지 마…. 소년은 커다란 솥에 갇혀 부글부글 끓고 있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p.363

“그때 사람들은 가진 게 그렇게 많았음에도 전혀 만족하지 못했어. 더 새로운 것, 더 넓은 것, 더 대단한 것을 찾아서 끊임없이 자신들의 세계를 넓히고자 했지.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깨달아 버린 거야.”

“어떤 것을요?”

“자신들의 세계가 더 넓어지려면, 다른 것들의 세계가 좁아져야만 한다는 걸”


똑똑할 필요 없는 세상, 아무것도 하면 안되는 세상 속에 살고 있는 꿈틀대는 소년. 처음에는 소년 한 사람만이 괴롭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어쩌면 정말 괴로운 것은 겪어보지 못한 것을 해보고 싶어 하는 강렬한 마음보다, 겪어봤기에 할 수 있으면서도 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소년을 응원했다. 그래서 나는 책의 마지막인 이 세계관에서 유독 더 오랫동안 빠져나올 수 없었다.


우리가 그리는 미래 세상에는 왜 항상 인간이 없을까? 작가의 생각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이 SF소설은 발전을 위한 발전 속에서 ‘우리 인간이 아직 존재한다’라는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닌지 긴가민가한 가정을 유지한 여덟 가지의 세계관을 담고 있다. 멸종하지 않은 채 살아있는 지금 우리의 미래를 상상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반전에 의한 충격과 그 충격이 주는 또 다른 생각. 그 연결을 제시해 주는 책과의 만남이었다.















#카누를타고파라다이스에갈때 #이묵돌 #소설추천 #한국SF #SF소설 #단편소설집 #책추천 #독서에세이 #서평에세이 #오늘의문장 #책속에서찾은나 #상상력 #미래소설 #인문SF #책리뷰 #북에세이 #독서기록 #삶에대한성찰 #생각노트 #브런치북

이전 23화공감·질문·묘사, 당신만 모르는 인생을 바꾸는 대화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