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는 숲에 살지 않는다 - 임정은
멸종, 공존 그리고 자연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도서관에서 신착 도서 코너를 둘러보다가 ‘호랑이’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임정은 지음’이라는 책의 저자 이름을 보자 아이가 즐겨 보던 EBS 〈취미는 과학〉 속 보전 생물학자 임정은 박사님이 떠올랐다. 책을 내신 줄은 몰랐던 터라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책을 빌려왔다. 집에 돌아와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자, 아이 역시 무척 반가워하였다. 우리는 함께 〈취미는 과학〉 48화 ‘호랑이, 왜 돌아오지 못할까?’ 편을 다시 보며 책의 내용과 방송 속 이야기를 연결해 보았다.
『호랑이는 숲에 살지 않는다』는 단순히 사라진 동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인간의 선택과 개발 속에서 밀려난 생명들의 자리 그리고 그들과 다시 공존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저자 임정은 박사님는 현장에서 직접 호랑이와 멸종위기 동물을 연구해 온 보전 생물학자로 이 책에서 과학자의 시선과 한 사람의 고민을 함께 담아낸다. 어렵지 않은 문장 속에 담긴 묵직한 메시지는 아이와 함께 읽기에도 어른이 다시 생각해 보기에도 충분히 깊다. 호랑이를 통해 우리가 잃어버린 자연과 책임을 돌아보게 만드는 책이었다.
p.61
이렇게 용맹한 호랑이는 지구 생태계에서도 그 위용에 걸맞은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호랑이의 평균 생존 기간은 10년~15년이므로 평생 1000여 마리의 사슴을 잡아먹는 셈이다. 그런데 만약 호랑이가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주로 나뭇잎과 풀을 먹는 사슴의 수가 폭증하면서 산과 들의 식생이 남아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호랑이가 서식한다는 것은 사슴, 멧돼지 등 중대형 초식동물의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는 의미다. 즉, 호랑이의 존재 자체가 해당 지역 생태계의 건강함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p.62
우리나라에서 호랑이는 어떻게 사라져 갔는가
이렇듯 소중한 호랑이가 현재 우리나라의 야생에는 단 한 마리도 남아있지 않다. 사실상 지역 절멸 단계에 있으며, 동물원에서 볼 수 있는 호랑이도 모두 외국에서 들여온 개체다.
p.64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한반도의 호랑이는 다시 한번 큰 시련을 겪는다. 섬나라 일본인들에게 호랑이는 현실에서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존재이자 경외의 대상이었다. 그런 만큼 호랑이에 대한 환상도 우리보다 더 강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호랑이와 표범, 곰, 늑대 등을 해수, 즉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해수구제 정책’을 시행했다.
명분을 앞세운 일본의 행보에는 거침이 없었고 호랑이는 무참히 살해되었다. 호랑이의 뼈와 가죽, 고기는 일본으로 대거 반출되었다.
호랑이가 사라진 숲에서, 우리는 무엇을 잃었을까?
우리는 흔히 호랑이를 ‘무서운 동물’로 기억하지만, 저자는 그 존재가 오히려 숲을 지켜온 존재였다고 말한다. 호랑이가 있었기에 사슴의 수가 조절되고 숲은 스스로 균형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강한 존재가 약한 존재를 억압하는 구조가 아니라 모두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런 호랑이가 자연의 섭리가 아닌 인간의 판단으로 사라졌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일제 강점기에 자행된 호랑이 학살은 잔혹한 폭력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지금 ‘호랑이가 살지 않는 땅’에 살고 있다.
생태계 보전은 생각보다 거창한 환경운동이 아니었다.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겸손해야 하는지를 배우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랑이가 사라진 숲은 결국 인간에게도 안전하지 않다는 사실. 호랑이의 부재는 곧 자연과 단절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이 책은 사라진 동물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지금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p.192
그들이 호랑이를 사냥하는 방식은 치밀하고도 독특했다. 호랑이는 큰 먹잇감을 사냥하면 며칠에 결쳐 나눠 먹는 습성이 있는데, 바로 그 점을 노렸다. 호랑이의 공격으로 죽은 소 안에 ‘감자 폭탄’이라고 불리는 장치를 숨겨두고, 호랑이가 다시 먹이를 찾아 돌아오는 순간을 기다린 것이다. 감자 폭탄은 감자 등에 비료나 화약 같은 폭발물을 넣어 급조한 폭탄을 말한다.
이렇게 포획한 호랑이는 마리당 약 1만 달러 정도에 베트남으로 팔려나갔다. 당시 라오스의 1인당 국민소득은 1000달러를 웃도는 수준이었고, 남엣푸루이 주민들의 연 소득은 고작 300달러에 불과했다.
호랑이 한 마리로 30년 치 수입을 한꺼번에 얻을 수 있었던 셈이다. 과연 이곳에서 호랑이가 살아남을 수 있을지, 눈앞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현실이었다.
p.193
내 박사과정의 핵심 미션은 이 지역 주민들과 호랑이, 그리고 관련 보호단체 및 지방정부 간의 갈등을 파악하고, 그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라오스 정부 역시 주민들과의 갈등을 중요한 과제로 인식하고 있었고 이를 체계적으로 해결할 전문가가 필요했기에 나의 연구 주제와 현장의 요구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다.
호랑이를 살리기 위해서 무엇이 우선인가?
라오스의 호랑이를 향한 폭력이 단순한 잔혹함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감자 폭탄’이라는 이름의 도구가 등장하는 부분에서 사람들이 호랑이의 생태적 습성을 파악하여 사냥할 정도로 이런 일들을 꼭 해야 하는가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폭력을 저지른 이들이 하루 1달러도 채 되지 않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 앞에서는 쉽게 분노할 수 없었다.
호랑이 한 마리가 30년 치 수입이 되는 현실에서 누가 쉽게 “그러지 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 장면은 자연 보호가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저자가 맡은 역할이 단순한 연구가 아니라 갈등을 조율하고 공존의 길을 찾는 일이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호랑이를 살리기 위해서는 총을 내려놓게 하는 것이 아니라 총을 들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삶을 먼저 만들어야 한다.
p.304
과학계에도 주류 mainstream과 비주류 marginal 가 있다. 빠르게 기술적 성과를 낼 수 있는 연구는 ‘쓸모 있는 과학’으로 여겨지며, 예산이나 정책 우선순위에서 앞서게 된다. 반면 보전생물학에서 다루는 의제들은 ‘급하지 않은 문제’로 간주 되어 뒤로 밀리는 경우가 많다. 예산을 논의할 때는 “멸종위기종이 사라지면 당장 무슨 문제가 생기느냐”라는 질문이 늘 따라붙고, “미래 기술로 복원할 수 있지 않겠느냐”라는 막연한 낙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p.307
내 연구의 궁극적인 목표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아무르표범과 아무르 호랑이가 더 이상 멸종위기 동물로 분류되지 않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까지의 보전 노력 덕분에 아무르표범의 개체수는 크게 늘었다. 한때는 전 세계에 30마리도 채 남지 않았지만, 이제는 150마리 이상으로 회복되었다.
하지만 개체수가 늘어남과 동시에 유전적 다양성 저하라는 새로운 문제가 떠올랐다. 유전적 다양성이 저하되는 문제는 단순한 야생 서식지를 보호라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사육 개체의 유전자 관리를 통해서라도 반드시 이 문제를 극복해야 한다.
쓸모없어 보이는 과학의 진짜 가치
‘쓸모 있는 과학’은 어떤 과학을 말하는 것일까? 무엇이 쓸모 있고 무엇이 쓸모없다고 판단하는 기준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당장 눈에 띄는 성과가 없다는 이유로 멸종위기종 보호가 뒤로 밀리는 현실은 인간이 자연을 얼마나 편의적으로 바라보는지를 보여주었다. “지금 당장 문제가 되느냐?”라는 질문 속에는 미래에 대한 책임은 찾기 어려워 보였다.
그럼에도 임정은 박사님은 한때 멸종 직전이던 아무르표범이 150마리 이상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희망을 바라보았다. 보전이 결코 헛된 일이 아니라는 증거다. 하지만 동시에 개체수 회복 이후 찾아온 유전적 다양성 감소라는 새로운 문제는 자연을 지킨다는 일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긴 싸움인지를 보여주었다. 기술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 대신 지금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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