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해진 뿌리 그 이후

마흔부터 지적이고 우아하게 - 신미경

by 레토

품위 있는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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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경 작가님을 처음 만나게 된 책은 『뿌리가 튼튼한 사람이 되고 싶어』 였다. ‘고민 없이 좋아하는 일 하나가 있어야 한다’, ‘혼자서 충분히 행복한 사람만이 다른 사람과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라는 문장은 30대 중후반의 나에게 아직도 오래 남았다.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던 내 안의 뿌리에 물을 주고 양분을 더 하며 나 자신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의 씨앗이 된 책이었다.


그리고 이제 40대가 되어 다시 마주하게 된 작가님의 또 다른 책, 『마흔부터 지적이고 우아하게』는 제목만으로도 한동안 시선이 머물렀다. 뿌리가 어느 정도 단단해졌다면 이제는 삶의 ‘태도’를 가다듬을 때라는 신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지적이고 우아한 삶은 더 많이 갖거나 더 앞서가는 삶이 아니다. 생각을 정리하는 힘, 말과 행동의 균형,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 태도를 통해 자기 삶의 중심을 지켜가는 삶이다. 40대의 시간 위에서 다시 한번 나를 정돈하고 싶어지는 이유가 이 책 안에 조용히 담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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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도 괜찮은 건가

p.45

자신이 최근 들었던 강연에서 인상 깊은 점을 공유하던 지인과 유년 시절 받았던 상처를 어떻게 달래야 할지에 대한 대화를 나눴다. 이미 결론은 나와 있었다. 상처받은 내면의 아이를 잘 어르고 달래가면서 어른인 자신이 보듬어 주면 된다. 잠깐 잊고 살았지만 내 안에도 당연히 토라진 아이가 있다. 아이의 존재는 내 나이가 어릴수록 컸다.

p.47

나는 고작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는 수준의 고민을 부풀려 말하곤 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한 톨의 어려움도 아니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의 어리광을 받아 주는 사람은 흔치 않았다. 확실히 해결책이 필요해 조언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나는 자그마한 일에는 현명하게 입을 다물었다. 말하지 않으니 문제는 쪼그라들어 사라졌다. 내 마음속 아이는 또 성장했다.

p.49

현실 감각 없는 아이를 크게 꾸짖지 않기로 했다. 그 아이보다 스무 살은 더 먹은 내가 느끼기에도 바람직한 미래의 내 모습 같아서. 이미 어른이 된 내가 너의 꿈을 이루게 해 주겠노라 다짐했다. 조금 시간이 걸릴지도 모르지만, 네가 얌전히 다가올 미래를 기다려 준다면 나는 최선을 다해 너를 한번 키워 보겠노라고 말이다. 대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가끔 튀어나와 버릇없이 굴면 없던 일로 하겠다며 약간의 으름장도 더했다.

p.50

나에겐 내면의 아이를 잘 돌봐 주며 키워 나갈기에 부족함이 없는 어른의 힘이 있다.


내면의 아이 키우기

이 부분을 읽으며 ‘역시 신미경 작가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면의 아이. 내가 막연하게만 느끼고 있던, 아직 다 채워지지 않은 철없는 마음에 딱 맞는 이름이었다. 몸은 어른으로 자랐고 어른의 마인드도 어느 정도 갖추었다고 생각하지만, 가끔 불쑥 튀어나오는 어른답지 못한 행동들이 있다. 그 태도는 대개 가장 가까운 가족 앞에서 드러났다.


특히 아이를 키우면서는 더 그렇다. 아이 곁에서 든든한 어른이 되어 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책을 읽고 생각을 다듬고 다짐을 거듭하지만 그 마음이 항상 유지되지 않았다. 어느 순간 아이를 향해 섭섭함이 올라오고, “엄마를 무시하는 거냐”,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니” 같은 말이 나온다. 감정의 그릇이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컸다면 태도를 다듬어 짜증을 빼고 전달하고 싶은 말의 핵심을 더 분명하게 전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작가님이 언급하신 ‘내면의 아이’. 그 아이를 억누르거나 혼내는 것이 아니라 다독이고 성장시킨다는 것은 결국 부끄러운 내 모습에 관한 인정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내 안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태도, 그 지점에서 마흔 이후의 지적이고 우아한 태도가 시작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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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금융 문맹 탈출기

p.93

투자를 시작한 후로 사고 구조가 많이 바뀌었다. 보기만 해도 머리가 멍해지던 숫자와 가까워진 것도, 경제 뉴스를 진심으로 읽는 나도 달라진 점이지만, 무엇보다 이 세상에 사는 나를 보다 현실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p.95

흥미 없고, 관심 없어 하는 영역이란 영원하지 않다. 언제나 어떤 계기 하나만 주어지면 빠르게 내가 사는 세상에 들어오곤 하니까.

p.96

돌이켜보면 진정한 불행은 금융 까막눈으로 살았던 시간이다. 나이가 들수록 노동 소득에 의지해 살아가기 어려운데 나는 자본주의에 지나치게 늦게 눈을 떴다. 금융 문맹률을 나타내는 파이낸셜 리터러시에 따르면, 우리나라 금융 문맹률은 142개국 조사 국가 중 81위라고 한다. 금융 문맹 탈출의 유일한 방법은 관심과 공부, 실전에 있다.

p.97

전전긍긍하면서도 버틸 수 있는 까닭은 내가 매일 공부하며 모은 자료와 노트에 적어 둔 투자일지 때문이다. 덧붙이면 시대를 이끄는 최고의 기업에서 일할 기회를 갖는 건 어무 어렵지만 동경하는 회사에 투자할 수는 있다. 그 자체가 내가 가진 허영심을 약간 충족하는 꽤 흥미로운 부분이다.


베짱이가 되고 싶지 않은 개미

2025년 겨울이 시작될 때까지 재테크라곤 예·적금밖에 모르고 살았다. 단 1원의 원금 손실도 감당하고 싶지 않아 투자를 경계했고 ‘투자는 도박이다’, ‘공부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라는 말로 스스로를 방어했다. 예·적금만 하는 사람은 바보라는 식의 말들에는 오히려 반감부터 들었다. 원금이 사라지면 누가 책임질 건지, 불확실한 미래에 왜 지금의 안정성을 내놓아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어쩌면 고집이었고 또 어쩌면 변화가 두려워서 쳐버린 방어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과 함께 앉아 우리 둘의 60대 이후의 삶을 상상하고 계산해 보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개미와 베짱이의 개미처럼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베짱이가 되어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당장은 괜찮아 보이던 선택들이 먼 미래 앞에서는 꽤 무모해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모든 변화는 외부의 설득이 아니라 내 마음이 움직일 때 시작된다. 새해부터 남편의 월급을 관리하는 방식도 조금 바꾸어 보았다. 예·적금에만 매달리던 패턴에서 벗어나 저돌적이지는 않지만, 공부 삼아 경험 삼아 천천히 누적해 보기로 했다.


돈 공부를 시작하기엔 너무 늦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금융 문맹 탈출기’라는 작가님의 고백을 읽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40대에 비슷한 고민을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어떤 영역이든 앞선 경험치가 쌓여야 다음 변화를 모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흥미 없고, 관심 없던 일을 내가 사는 세상에 들어오게 했기 때문에 나의 금융 문맹을 탈출기는 이제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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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에코백

p.155

거리를 거닐다 보면 저마다 어깨에 흔히 에코백이라 불리지만 실상 친환경적이지 않은, 가방을 메고 있는 사람들을 자주 본다. 에코라고 불리는 가방이 비닐봉지 대비 환경에 적은 영향을 미치려면 131회를 사용해야 한다. 2018년 덴마크에서 이뤄진 연구에는 면으로 된 가방은 최소 7100회 사용 후 버려져야 이를 생산하며 발생시킨 오염을 상쇄한다나.

p.156

내겐 교토 박물관 로고가 새겨진 작은 신주머니 같은 가방이 있는데 ‘나는 박물관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라고 광고하는 기분이다. 그곳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박물관은 당연히 아니지만, 사용하기 편안한 크기인데다 뮤지엄이란 문구가 뜻하는 어떤 대표성이 좋다. 나의 지적 허영이 담긴 실용적 액세서리를 알아봐 주는 사람은 여태 없었다.


에코백 인생

‘지적인 에코백’ 부분을 읽자마자 우습게도 아이가 즐겨보던 만화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곰 세 마리가 주인공인 《위 베어 베어스》라는 만화의 에피소드 중 하나인 ‘에코백 인생’이라는 편이다. 과장된 설정이지만, 에코백이 결국 ‘에코’를 위한 가방이 아니라 지구를 더 피곤하게 만드는 존재가 되는 장면은 웃기면서도 씁쓸했다. 환경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소비가 늘어나는 아이러니가 담겨 있었다.


나 역시 한때 에코백 유목민이었다. 어린아이를 데리고 다니며 무엇이든 편하게 담아도 되고 바닥에 내려놓아도 마음이 덜 쓰이는 가방, 그게 에코백이었다. 각종 행사 선물로, 도서관 재개관 이벤트로, 동네 빵집 개업 기념으로 거기다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 온 가방까지. 집 안에는 에코백이 하나둘 쌓여 갔다. 그런데 정작 내가 손이 가는 가방은 따로 있었다. 내가 내 돈을 주고 산 코듀로이 재질의 에코백 블랙 하나와 브라운 색상 하나. 이유는 단순했다. 유행 타지 않을 것 같은 디자인에 그냥 예뻐서. 아이러니하게도 집에 그렇게 많은 에코백이 있는데, 결국 내 눈에 예쁜 가방을 또 산 셈이다.


청바지와 점퍼에도, 코트와 정장에도 무난하게 어울려 요즘은 다른 가방을 들 일이 거의 없다. 그런데 내가 들고 다니는 이 에코백이 진짜로 자연을 구하는 역할을 하려면 최소 7100회 정도 사용해야 하니, 아직 6천 번도 넘는 사용이 더 필요할 것이다. 에코백이 진짜 ‘에코’를 위한 ‘백’이 되도록 쉽게 변덕 부리지 말고 꾸준히 사용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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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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