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이 되는 문장과 그림책

반지수의 책그림 - 반지수

by 레토

베스트셀러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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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만한 책을 고르다 '베스트 셀러를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라는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내가 아는 책의 일러스트를 그린 작가일까 싶은 생각에 책의 안쪽 작가 소개를 들여다 보았고 거기에서 무척 반가운 이름을 발견했다. 『불편한 편의점』. 소설은 읽지 않던 내가 소설의 재미에 빠져들게 만들어 준 책. 표지 이외 책 속에는 별다른 일러스트가 없었지만 표지가 주는 풍경과 따뜻함이 소설을 보는 내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느낌의 중심이 되어 이끌어 주었다.


『반지수의 책그림』은 따뜻한 빛과 서정적인 색감으로 일상의 온기를 그려내는 일러스트레이터 반지수의 첫 번째 그림 에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오랜 시간 곁에 두고 아껴 읽은 책들과 그 문장들이 자신의 삶에 스며들어 만들어낸 풍경들을 다정한 글과 그림으로 엮어내고 있었다. 누구에게나 마음을 기댈 책 한 권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하는 이 책은 바쁜 일상에 지친 사람들에게 한 잔의 따뜻한 차와 같은 평온함을 선사해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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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2

내가 그리는 표지는 다소 화려하고 구체적이며 색이 넘치고 여백이 거의 없는 편이라, 추구하는 표지와 취향이 다르다고 느낄 때가 많다. 작업한 책을 볼 때마다 어쨌든 내 그림이 책의 얼굴이 되었으니 뿌듯하면서도 막상 자신이 사지 않는 분위기가 나는 책을 앞장서서 그리`다니 의아하기도 하다.

p.127

작업을 위해 품을 많이 들였다. 『불편한 편의점』은 한국 특유의 골목길을 살리기 위해 실제 내가 살고 있는 마포구 주변을 충분히 답사한 후 그렸다. 모델은 성산동에 있는 한 골목이었다.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 는 망원동 골목을 참고 했다.


진심이 담긴 풍경

『불편한 편의점』의 인기 뒤로 비슷한 분위기와 느낌의 책들이 자기 복제처럼 쏟아져 나오는 현상을 비판하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이후 읽은 『불편한 편의점』은 책 편식이 심해 소설을 싫어하는 반찬을 밀어내듯 멀리하던 내가 소설에 빠져들 수 있는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이 책에서 표지의 힘은 매우 컸다. 어디엔가 있을 법한 그곳. 아기자기하게 그려져 있지만 현실성 있는 그림과 따뜻한 온기.


이후 또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난 뒤 『어서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도 만나보았다. 표지가 주는 분위기가 비슷했지만, 나는 반감이 들기보다 참 좋았다. 비슷한 화풍이라며 비판받던 표지들이 내게 거부감 대신 반가움으로 다가왔던 이유를 알 것 같다. 그것은 복제가 아니라 확장이었다. 작가가 발로 뛰며 담아낸 망원동의 어느 서점 풍경은 내가 사는 지역 어딘가에도 저런 사연을 가진 골목과 공간이 존재할 것만 같은 기분 좋은 상상을 하게 만들어 주었다. 작가님의 발길이 닿은 골목마다 새로운 이야기가 피어나는 것을 보며 나는 그녀가 그려낸 '책의 얼굴'에 마음을 기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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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65

나는 항상 책을 가까이하고 좋아했지만 스스로 그렇게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해 왔다. 나보다 더 많이 읽는 사람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내 기억에 나는 책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책을 많이 읽어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특히 다른 사람의 시선이 민감하게 다가오던 10대 초중반에 유독 그랬다.

p.167

책이 좋고 재미있으니까 많이 보고 싶다는 마음이 반쪽,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반쪽이었던 것 같다. 책을 많이 읽고 많은 것을 알아 사람들의 환심을 사고 싶다는 욕망을 느꼈다. 이런 마음이 불순해 보여서 여태 입 밖에 내놓은 적은 없지만 그런 마음이 있었기에 책 주변을 계속해서 얼씬거렸다.

p.168

오히려 책을 읽다 보니 알게 됐다. 자꾸 무언가가 되려고, 이상적인 것에 도달하려고 애쓰다 보면 점점 그 이상과 현실 사이 갭만 느끼게 될 뿐임. 현실과 이상의 틈바구니에서 괴로워하느니 그냥 내가 밟아온 길 자체를 인정하는 게 지혜임을 깨달았다.

p.170

내가 독서 강박을 느낀 건 교육 환경이 원인이었을까? 학교라는 공간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독서 강박이 점점 희미해졌다. 시험, 숙제, 불필요한 관계, 독후감이 인생에서 사라지자 마음이 이끄는 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그냥 마음에 드는 책, 궁금한 책, 일고 싶은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 것만으로도 바쁘고 즐거운 사람이 되었다.


강박에서 위로로 나아가는 독서

반지수 작가님은 10대 시절, 책을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이 되어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컸다고 고백했다. 나에게도 그와 비슷한 결의 강박이 찾아온 순간이 있었다. 바로 생후 일주일 된 아이를 집으로 데려와 오롯이 혼자 마주해야 했던 그 막막한 시간이었다.


임신 기간 내내 정독했던 『임신육아대백과』는 정작 현실의 육아 전쟁터에선 별다른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의 상태,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소리 앞에서 나는 무방비 상태였다. 그때 내게 하나의 '바이블'이 되어준 책이 바로 『베이비 위스퍼』였다. 낯선 변화와 상황을 힘들어하는 아기들의 본성을 이해하게 되면서 보이지 않는 공포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시 나의 독서 강박 역시 '완벽한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이상과 '서툰 현실의 나' 사이의 틈을 메우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뒤로도 계속 이어진 육아와 훈육의 파도 속에서 붙들었던 그 책들은 나를 지탱하는 중심축이자 좋은 눈과 마음으로 아이를 바라봐야 한다는 강박이 되어 갔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지나 아이가 유치원을 졸업하고 초등학교에 입학할 즈음에 알게 되었다. 내가 행복해야 아이도 나의 행복이 주는 볕 아래 함께 행복감과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이제는 더 이상 '완벽한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물러나 그저 내 마음이 이끄는 책을 품에 담는 여유가 생겼다. 결국 책이란, 우리가 가장 휘청거리는 순간에 내미는 다정한 손길 같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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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97

나 또한 20대 중반까지 그림책은 아이의 것이라고만 믿었다. 부모님이 침대에서 아이에게 읽어주는 책, 그러니까 그림이 많이 나오고 글은 적은 책. 내 마지막 기억 속 그림책은 어릴 적 읽은 전집이었고, 그 후로 그림책을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서점에 가도 유나 코너는 내 영역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p.199

아이들이 보는 쉬운 책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다. S의 말처럼 예술적인 책, 철학적인 책은 물론 아이디어가 재기발랄하여 웃음이 나오는 책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훌륭한 그림이 너무 많았다. 그림책 카페가 아니라 미술관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숀 탠, 앤서니 브라운, 로베르토 인노첸티. 완성도 높은 그림과 꽉찬 채색, 세밀한 묘사가 마음을 사로잡았다. 특히 로베르토 인노첸티의 『빨간 모자』와 『그 집 이야기』는 지금도 자주 펼쳐본다. 『빨간 모자』는 우리가 아는 그 내용이 아니라 성폭력에 관해 매서운 통찰력과 시선을 담은 현대식 동화다. 아동 성폭력의 현실과 원인을 빨간 모자 이야기를 빌려 소름 돋을 정도로 멋지게 그렸다. 이 책 한 권으로 열띤 토론을 벌일 만큼 압축적이고 놀라운 그림책이었다.

p.204

그림책의 세계는 정말 무궁무진하니, 자신의 취향을 찾아 나서는 여정을 떠나본다면 어떨까. 나 역시 어른이 되어서야 진정 그림책에 열광하게 된 것처럼 더 많은 어른이 그림책의 매력을 알아 인터넷 서점에 더 이상 ‘유아’나 ‘어린이’가 아닌 ‘그림책’이라는 단독 카테고리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p.210

그림책이 아이들에게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을 싫어하진 않지만 고미 타로처럼 책이라는 것을 삶에서 만나는 우연한 사건으로, 재미있는 놀이로 대하는 작가를 만나면 왠지 신난다. 의미보단 잔난에 가깝고 인간이 정한 규율보단 자연의 이치에 가까운 것을 따르고 즐기는 어린아이가 아직 남아있는 거겠지.


다정한 미술관, 그림책

남편에게는 누나가 네 분 계신다. 그래서 아이가 태어났을 때, 우리 집에 물려받은 그림책들은 든든함을 넘어 어디다 얼마만큼 둬야 하나 싶을 정도로 가득 채워졌다. 그렇게 수많은 그림책과 강제로 첫 만남을 갖게 되고 아이에게 하나둘씩 읽어주며 그림책의 매력에 내가 더 빠져들게 되었다. 생각지 못한 창의성에 놀라기도 하고 글 없이 그림으로만 되어 있는 그림책을 오래 붙들고 앉아 이런 상상, 저런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 감동적인 스토리에 눈물 맺힐 정도로 슬프기도 했다.


아이의 잠자리 시간을 지키기 위해 펼쳤던 책들이 사실, 고단한 육아에 지친 내 마음을 먼저 다독이고 있었다. 그림책은 아이의 것이라는 편견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었다. 글자 하나 없는 『구름공항』의 페이지마다 머릿속 생각 구름들이 채워졌고, 『지원이와 병관이』시리즈 책들을 읽는 동안에는 웃었다가 또 마음 한구석이 찡해지는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그림책은 단순한 육아용 교구가 아니라, 작가님의 표현처럼 따뜻한 색채로 내 안의 어린아이를 일깨워주는 통로가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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