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옷 추척기 - 박준용·손고운·조윤상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최근 배우 김석훈 씨가 이 책을 소개하는 짧은 영상을 우연히 보았다. "당신이 버린 헌 옷들은 어디로 가서 어떻게 될까요?"라는 의문. 헌 옷 추적기라는 ‘다큐’스러운 제목과 초록색 의류 수거함을 꼭 닮은 책의 표지는 호기심을 가지기에 충분했다. 보자마자 동네 도서관 어플로 책을 검색해 보았지만, 나온 지 한 달 정도 된 신간이라 그런지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없었다. 희망 도서 신청을 하고 책을 받기까지 궁금증이 커졌지만 일부러 추가 영상은 찾아 않았다.
마침내 마주한 책은 나에게 죄책감과 함께, 대상조차 모호한 배신감마저 느끼게 했다. 새로 산 '옷'이 '헌 옷'이 되어 집 밖을 나섰던 수많은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며 지인들과 옷을 물려주고 물려받기도 했지만, 정작 내 옷은 그저 취향이 변했다는 이유로 멀쩡한 상태임에도 밖으로 내몰곤 했다. 이 책은 '헌 옷'에 가려진 진실을 마주하며, 동시에 '옷'이라는 물건의 진정한 가치를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었다.
p.8
추적기 단 헌 옷의 ‘우여곡절’
“옷 40벌 20만 원어치 리뷰합니다.”
최근 ‘테무깡’, ‘쉬인깡’ 콘텐츠가 인기를 끌고 있다. 테무, 알리익스프레스 등 중국 이커머스에서 산 상품을 개봉하는 영상인데, 주로 의류가 리뷰 대상이 된다. 중국 이커머스에서 판매한 옷은 몇천 원에서 1만 원 사이로 소비자의 구매 충동을 일으킨다. 이 옷들은 H&M, 자라, 에잇세컨즈 등 기존 패스트패션을 넘어서는 울트라 패스트패션이라고 불린다.
p.22
결국 우리는 2024년 7월 19일 의류에 추적기를 다는 작업을 시작했다. 의류마다 레이블링을 하고, 소매나 주머니 등의 올을 따고, 추적기를 휴대전화에 연결했다. 추적기는 의류에 넣은 채 미싱으로 박음질 했다.
p.32
2024년 11월 6일. ‘나의 쓰레기 아저씨’로 불리는 배우 김석훈 씨의 검은색 바지에 달린 추적기는 이곳에서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이 바지는 석훈 씨에게 기부받아 8월 14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한겨레신문사 사옥 인근 의류 수거함에 버렸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난 뒤, 바지가 한국에서 4,50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말레이시아 조호르주에 있는 항구에 도착한 것이다.
p.37
수출업계 관계자들과 전문가들은 수출된 옷 절반 이상이 결국 버려진다고 본다. 우리 또한 현지 취재를 통해 이 같은 추정을 눈으로 확인했다. 수출업체 B사 대표는 “가나에 갔었는데, 중고 상인들이 주변 강에 헌 옷을 버리고 있었다. 이런 사례들처럼 해당 국가에서는 주로 헌 옷을 팔다가 못 파는 건 버릴 것”이라고 말했다. 국외로 간 의류 일부는 재판매나 재활용 시도도 없이 바로 버려지기도 한다.
p.45
수출되지 않고 국내에 남은 옷은 소각됐고, 재활용이나 재사용된 사례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수출된 헌 옷들 또한 대부분은 인도, 말레이시아, 필리핀, 타이 등 개발도상국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재판매되기도 하지만 대부분 매립지와 소각장으로 향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p.59
무심코 버린 모직 코트 한 벌, 종이컵 912개 버린 것과 같다.
p.84
파니파트는 인도 수도 뉴델리에서 북쪽으로 90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인구 60만 명 규모의 산업도시다. 연간 10만 톤의 옷이 세계에서 수입돼 재활용되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헌 옷의 수도’라고 불린다.
p.101
파니파트의 지역 활동가인 타야기는 한국에서 인도로 수출된 옷이 재활용되는 과정은 주민을 병들게 하고 마을을 황폐화한다고 했다. “그래도 의류가 오래도록 쓰이게 만드는 것이니 재활용은 좋은 것이 아닌가”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깨는 말이었다.
초록색 수거함에 버린 나의 무지
주기적으로 집을 정리하는 편이다. 추구하는 삶의 모습은 '미니멀리스트'.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옷 사는 일을 너무 좋아한다. 그 시간을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마음먹고 옷을 사러 나가는 날은 꼭 필요한 옷 한두 벌을 정해두는 날이 아니라 이른바 취향에 맞는, 눈에 띄는 옷들을 가득 담아오는 날이다. 남포동 옷 가게 골목을 한 바퀴 휩쓸거나, 특히 애정하는 자라(ZARA) 세일 기간에 마음에 드는 옷을 여러 벌 품에 안고 돌아오는 날은 왠지 모를 뿌듯함마저 느껴졌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한 번씩 옷이 가득 생기는 날이면 기존의 옷들은 어김없이 정리 대상이 된다. '하나가 들어오면 하나가 나가야 한다'는 미니멀리스트의 철칙을 지키기 위해서다. 나름대로 유행을 타지 않는 옷을 골랐고 정기적으로 비워냈기에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내가 그동안 초록색 의류 수거함에 던져 넣은 수많은 옷더미가 환경오염의 주범이 되어 개발도상국에서 소각되고 있었다니. 여태껏 그 옷들이 누군가에게 다시 판매되거나 유익하게 쓰일 거라 막연하게 믿어왔다. 나의 믿음은 무심했다. 멀쩡한 옷들을 가차 없이 내몰았던 지난날의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p.123
남아시아 인권 단체 ‘아리사’와 네덜란드 섬유 수거 기관 ‘심퍼니’가 펴낸 ‘섬유 재활용의 비밀 보고서(2020)’ 또한 파니파트에서 헌 옷을 재활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표백 노동자의 건강 악화 문제를 지적했다.
p.181
패스트패션 기업이 내세우는 ‘재활용’ ‘친환경’ 정책. 어쩌면 성립조차 되지 않는 말일 수 있다. 세계 의류 생산량은 2015년 기준 매년 800억 벌에 달하는데, 이는 20년 전보다 4배나 증가한 수치다. 이렇게 폭발적인 의류 생산 증가를 이끈 것이 ‘빠르게 만들어서 빠르게 소비한다’ 는 패스트패션(일명 SPA) 기업들이다.
p.187
물론 헌 옷이 단순히 부정적이라고 말할 순 없다. 다만 의류가 개발도상국으로 이동했다는 점은 패스트패션 브랜드의 매장 수거함 속 의류가 제대로 처리되고 있는지 의문을 남긴다.
파니파트 사람들의 고통
책장을 조금 더 넘겨 마주한 진실은 처참했다. 인도 파니파트 노동자들의 기록은 충격 그 자체였다. 헌 옷을 새것처럼 만들기 위해 독한 표백제를 쓰며 건강을 잃어가는 사람들의 모습. 표백제로 푹 적셔진 옷더미 사이에서 천진난만하게 미끄럼틀을 타는 아이들. 그 독한 물이 스며든 땅에서 자란 당근을 먹으며 웃고 노는 또 다른 아이들. 그리고 암으로 신음하는 어른들. 그 비극적인 풍경 위로 내가 버렸던 멀쩡한 옷들이 자꾸만 겹쳐 보였다.
나는 그동안 누구를 위해 초록색 수거함에 옷을 던졌던 것일까. 그저 내 집을 깨끗이 비우고 싶어서, 혹은 '재활용'이라는 이름 뒤로 죄책감을 털어내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도 맞을 것이다. 세련됨이란 단어로 포장된 미니멀리즘이 누군가에게는 생존을 위협하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참 아프게 다가왔다. ‘재활용은 무조건 선한 것’이라 믿었던 나의 무심한 상식은 철저히 무너졌다. 그동안 누린 저렴하고 달콤한 쇼핑의 즐거움은, 실은 누군가의 건강과 생명을 깎아 만든 잔인한 대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215
삼성물산은 해마다 재고상품 소각량을 늘려왔는데, 삼성물산을 비롯한 패션 대기업들이 ‘친환경’ 마케팅을 하며 뒤에서는 재고 의류를 소각한다는 점에서 ‘그린워싱’을 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p.224
오염을 만든 자가 그 피해에 대한 금전적 책임도 진다. ‘오염자 부담 원칙’은 1972년 OECD가 채택한 환경정책의 기본 원칙이다. 이 원칙은 각국 환경 관련 법의 근간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 원칙이 한국의 의류산업에서는 지켜지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옷을 팔아 이득을 본 기업이 이 오염을 복구하거나 재활용하는 책임을 지게 하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가 없다.
p.234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재고 의류를 소각하는 건 의류산업 종사자들 사이에서 공공연한 비밀이다. 기업은 팔지 못한 재고가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고, 재고를 너무 헐값에 정리하면 브랜드 이미지가 훼손되기 때문에 ‘대외비’ 속에 재고 의류를 소각한다. 재고 소각에 대한 신고 의무도 없어서, 정부는 정확한 규모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p.253
소비자도 역할이 있지만 사실은 생산자가 가장 책임이 크고 중요하다. 기업이 중요하다. 그 다음에는 기업이 자기가 만든 제품에 대해 ‘이건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한, 굉장히 친환경적인 제품이다’라고 알리면 소비자는 그런 걸 사면 되는 거다. 그래야 그런 친환경 의류나 제품들이 선순환되는 거다. 또 한 가지는 가급적이면 오래 입는 게 지구를 위해서 좋다.
우유를 쏟은 아이보다 못한 기업의 책임감
책의 후반부가 되자, 개인의 문제를 넘어 기업적 윤리의식에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대기업들이 앞다퉈 내세우는 ‘친환경’ 이미지 뒤에 숨겨진 기만적인 양면성을 마주했기 때문이다. ‘오염을 만든 자가 그 피해에 대한 금전적 책임도 진다’라는 ‘오염자 부담 원칙’은 무려 1970년대에 OECD가 채택한 환경정책의 기본 원칙이다. 그런데 무려 50년이 지난 2026년인 지금까지도 우리나라 의류산업에서 이 원칙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니.
초등학교 아이들도 교실에서 우유를 쏟으면 스스로 닦아야 한다고 배운다. 대기업들이 이 간단한 상식을 몰라서 하지 않는 것일까? 결코 그럴 리 없다. 재고를 저렴하게 판매하거나 생산 단계부터 철저히 조절하는 대안은 분명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브랜드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소각을 택하고, 그 책임을 개발도상국으로 떠넘기면 그만이라는 인식은 비겁하다.
‘그린워싱’은 녹색(Green)과 화이트워싱(Whitewashing)의 합성어로 실제로는 환경에 해를 끼치면서 겉으로만 친환경인 척 소비자를 속이는 위장 환경 주의를 뜻한다. 매장에 수거함을 두어 재활용 기업임을 홍보하면서 뒤로는 재고를 소각하거나 극소량의 재활용 소재를 쓰고 전체가 친환경인 양 포장하는 행위가 대표적이다. 이는 본질적인 대량 생산 시스템은 그대로 둔 채 사소한 부분만 강조해 문제를 덮으려는 비겁한 마케팅 전략이다.
결국 환경 보호라는 이미지는 챙기고 싶지만 매출이나 생산 방식을 바꿀 의지는 없는 기업들의 기만일 뿐이다. 이것은 개인의 부끄러움을 넘어, 국가적·기업적 차원에서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구조적 문제다. 기업이 쏟은 '우유'를 지구 반대편의 아이들이 닦아내는 이 비정상적인 굴레를 이제는 끊어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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