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상을 여행하기로 했다 - 리밍
매일이 여행이 되는 삶
매일 똑같이 흘러가는 하루가 지루하게 느껴질 때, 리밍 작가는 우리에게 '일상 여행자'가 되어보라고 권한다. 리밍 작가는 낯선 땅 일본에서 살게 되며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해외 생활에 불안해하기보다 긴 여행을 하는 기분을 찾기로 했다. 이 책에는 거창한 목적지로 떠나는 여행 대신, 발길 닿는 동네 골목과 창가에 비치는 햇살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는 법이 담겨 있다.
리밍 작가는 사소한 순간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며, 행복은 발견하는 것이라며 지친 현대인들에게 잔잔한 위로의 메시지를 건네주었다. 먼 곳으로 떠날 여유가 없어도 내 곁에 숨어있던 보석 같은 순간들을 다시 마주한다면 좋은 일상 여행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p.94
일본은 위험하다고 판단되면 열차 운행을 중단하는 경우가 많다. 강력한 태풍이나 폭우가 예상될 때도 마찬가지. 안전에는 타협이 없는 나라다. 태풍이 상륙하기 직전까지 휴교를 고민하는 우리나라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르다.
p.98
지진을 겪고 한동안은 삶이 허무하게 느껴졌다. 괴로웠던 일과 미워했던 사람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며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당장 내일, 아니 오늘 죽는다면 그런 것들에 신경을 쏟을 시간이 없었다. 물건도 마찬가지였다. 내 몸 하나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이런 짐들은 뭐 하러 이고 사는지.
재난이 가르쳐준 삶의 본질
저자는 지진이라는 극한의 공포 속에서 삶의 허무를 목격했다. 죽음이 코앞에 닥쳤을 때, 그토록 마음을 괴롭히던 미움과 애착하던 물건들은 거추장스러운 짐에 불과했다.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우리를 짓누르던 것들을 순식간에 날려버린다.
아이가 어릴 때 언양과 대구에 살았던 적이 있다. 2016년 경주지진 때 우리는 언양에 살았다. 차로 경주까지 30분 걸리는 곳에 살았던 우리 가족은 두 돌이 되지 않은 아기를 안고 늦은 밤 공포에 휩싸여 집에서 탈출해 한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 뒤 작은 소리에도 예민해졌고, 긴급상황을 대비한 짐가방을 싸서 현관 앞에 대기해 두기도 했다. 그러다 대구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2017년 포항 지진이 일어났다. 낮 두 시, 아이는 낮잠을 자고 남편도 회사에 출근한 시간. 혼자 거실에 있다가 집 전체가 흔들리는 공포를 느꼈다.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기도 전에 끝나긴 했지만, 포항과 가까운 대구에서는 지진의 강도가 강하게 느껴졌다.
지진이 남긴 공포와 현관 앞의 짐가방은 일상의 평온함이 얼마나 깨지기 쉬운 유리 같은 것인지를 매일 일깨워주는 흔적이었다. 결국 우리 삶의 본질은 대단한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고 없는 위협 앞에서도 끝내 품에 안아 지켜내야 할 소중한 존재에 있을 것이다. 재난은 우리에게서 많은 것을 앗아가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지금, 이 순간 우리가 무엇에 온 마음을 쏟아야 하는지를 가장 선명하게 가르쳐주기도 한다.
P.137
우리는 이곳에 있는 동안 일상을 여행하기로 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해외 생활에 불안해하기보다 마치 긴 여행을 하는 기분으로, 돌이켜 보면 소중하고 귀할 이 순간을 즐겨보기로 했다.
p.140
살면서 ‘우연’이 쌓이고 쌓여 ‘인연’까지 닿는 일을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마주하게 될까?
산책 중 아무 이유 없이 다른 길로 들어섰고, 멋진 카페를 만났다. 멋스러운 외관만큼 카페는 소란스럽지 않았고 커피는 본연의 맛에 충실했다. 사장님은 어색함을 깨기 위해 그 흔한 날씨 이야기조차 건네지 않으셨다.
p.156
이건 무슨 종류의 망각일까.
날 좋은 가을, 오늘은 장바구니 대신 에코백을 들고 집을 나섰다. 어쩐지 기분이 좋다. 이제 나만 쓰는 것 같은 유선 이어폰의 꼬인 줄을 풀다 성질을 버릴 뻔했지만, 귀에 꽂는 순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저 멀리 학교가 보이고 합창 연습을 하는지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모든 소리를 한 차례 지나오니 드디어 목적지인 마크가 보인다. 다시 마음의 안정을 되찾고 이어폰을 정리하려는 순간 깨달았다.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았다는 것을.
여행자의 마음으로 걷기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기보다 현재를 긴 여행처럼 대하는 태도는 단조로운 일상의 채도를 바꾸어줄 것이다. 우연히 들어선 길에서 만난 고요한 카페처럼, 삶은 계획되지 않은 순간에 더 선명한 색채를 드러내기도 한다. 우연이 인연으로 닿는 과정은 결국 마음의 문을 열어둔 여행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리밍 작가님이 음악을 틀지 않은 채 유선 이어폰을 꽂고 걷던 산책길의 유쾌한 망각 역시 마찬가지다. 재생 버튼을 누르지 않았음을 뒤늦게 깨닫는 순간, 진정한 여행은 색다른 준비나 자극 대신 세상을 향해 감각을 열어둔 상태 그 자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익숙한 장바구니 대신 에코백을 드는 사소한 변화만으로도 우리는 언제든 일상을 여행할 수 있다.
해외여행에서 가보는 유명한 관광지나 국내 명소 또는 화려한 호텔을 가야만 단조로운 나의 일상에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일까? 어쩌면 내 주변을 평소와는 다른 눈과 마음으로 바라보고 다가서는 것으로도 작은 일탈이 주는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곧 다가올 따뜻한 봄이 오면, 평소 가지 않았던 산책길을 걷다가, 가보지 않았던 동네 음식점도 가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p.271
마법과도 같은 단어 ‘스미마셍’
일본에 살면 가장 먼저 익혀야 할 말이 있다. 일본어를 몰라도 한 번쯤 들어봤을 단어, 바로 ‘스미마셍’이다. 나는 스미마셍을 어떤 상황에서도 먹히는 만능 단어라고 부르는데 그만큼 다양한 상황에서 쓰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이 단어를 얼마나 자주 듣는지, 일본인들이 하루 중 가장 많이 답할 수 있을 정도다.
p.272
처음 일본에 왔을 땐 스미마셍이라도 말하는 게 길거리 간판을 읽는 일이보다 어려웠다. 낯선 글자보다 몇 배는 더 익숙한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던 거다.
생각해 보면 살면서 죄송하다, 미안하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고 살았던가. 실수했거나 잘못한 일이 있다면 분명 인정하고 사과했던 것 같은데 일상에서, 그러니까 길을 걷다가 또는 장을 보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수시로 사과한 적이 있던가. 그런 말을 입에 달고 살면 지나치다는 소리를 듣거나, 얕잡아 보거나, 의도와 달리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한 나라에서 온 나는, 별거 아닌 일에도 머리 숙여 사과하는 일본인들이 솔직히 부담스러웠다. 사과를 받았으니 그에 맞는 반응을 해야 하는데 선뜻 그러지 못했다.
p.273
스미마셍이 쓰이는 상황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에게 피해 끼치는 걸 극도로 꺼리는 일본의 사회적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데, 이를 ‘메이와쿠 문화’라고 한다.
언어에 담긴 사회적 약속
작가님의 설명에 따르면‘스미마셍’은 일본 사회를 움직이는 가장 강력하고도 마법 같은 단어였다. 일상적인 사과가 자칫 얕잡아 보임이나 불편함으로 보일 수 있는 문화권에서 온 이에게 일본의 수시로 이어지는 사과는 처음엔 낯선 부담으로 다가올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메이와쿠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습관이라면 ‘스미마셍’은 단순한 사과를 넘어 서로의 영역을 존중하고 갈등을 사전에 방지하려는 사회적 약속인 셈이다. 결국 타문화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그 사회가 공유하는 언어 습관 속에 담긴 배려의 온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함께 일하던 직장 동료에게 ‘일본 사람 같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남에게 피해 주기 싫어하며 피해를 주지도 않지만, 본인도 피해 받는 걸 몹시 싫어하는 기분이 든다며, 어떤 경우에 ‘정이 없다’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는 진심 어린 고백 아닌 고백을 받았었다. 그 말을 듣고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누구보다 나를 잘 관찰한 기분이 들었다고 해야 맞는 걸까? 그 인연이 연결되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고 있다.
최근에는‘정’이라는 문화가 만연했던 우리나라의 분위기도 많이 변한 것 같다. ‘정’을 잘못 이해했다고 해야 하나? ‘정’을 무기로 선을 넘나드는 사람들을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기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도 말고 받지도 말자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 같다. 어떤 문화가 더 좋다 나쁘다를 떠나 중요한 것은 타인을 향한 존중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선을 넘지 않는 세심한 배려가 새로운 시대의‘정’으로 자리 잡고 있는 지금, 건강한 거리두기가 오히려 서로를 더 오랫동안 따뜻하게 지켜주는 힘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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