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신경림-
창비시선 518
신경림이라는 이름을 마주하자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시집을 들고 도서관에 서서 검색을 해보니 학창 시절 교과서에서 만났던 시들이 줄줄이 흘러나왔다.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잊고 지냈기에 처음엔 낯설었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던 어렴풋한 운율이 반가움으로 다가왔다. 「가난한 사랑 노래」와 「농무」 같은 작품들을 확인하고 나니 시집이 조금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
사실, 이 시집 『살아있는 것은 아름답다』는 시인의 마지막 숨결이 담긴 유고 시집이다. 2024년 우리 곁을 떠난 시인의 1주기를 기리며 2025년 5월에 세상에 나왔다. 생전에 시집으로 묶이지 못했던 발표작들과 시인이 병상에서 메모지에 정성 들여 적어 내려간 미발표 유작 60편이 담겨 있다. 교과서 속 박제된 시인이 아니라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삶을 긍정하고자 했던 한 사람의 진심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었다.
p.62
비대면 시대의 여행
여권도 항공권도 없는 여행을 떠날 거야
사자자리로 큰곰자리로 염소자리로
어쩌다 사람 사는 별에 이르기도 하겠지
예사롭게 거기 섞여 한 두어달 묵으면 좋지
둥그렇게 동산 위에 떠 있는 내 땅을 쳐다보며
조금은 뉘우치고 조금은 부끄러워해도
세상 살며 밴 땀과 때 빠져나가진 않겠지
고집과 심술 많이 풀려 풀잎처럼 순해지면
공작자리 전갈자리 두루미자리 돌아야지
친지들한테 줄 선물도 하나씩 마련할 거야
작은 별똥별 하나에 꽃잎 하나씩 묻혀서
내 서른 마흔 그리고 여든을 오가면서
뉘우치면서 부끄러워하면서 다시 뉘우치면서
전갈자리 큰곰자리 물뱀자리를 오가면서
별자리를 유영하는 소년
제목에 등장하는 '비대면'이라는 단어는 코로나 이후 이어지게 된 비대면 방식의 인간 교류, 지극히 현대적인 상황을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한 줄 한 줄 시를 읽어 갈수록 내가 떠올린 비대면과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스크를 쓰고 거리를 두며 지내는 일상의 여행이 아니라 여권도 항공권도 필요 없는 육신을 벗어던진 영혼의 여행이었다.
영혼의 자유로운 여행. 어쩌면 시인은 생애 끝자락에서 깜깜한 우주 어딘가에서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영혼의 모습을 상상한 것이 아닐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모든 무게를 벗고 별들 사이를 유영하는 소년이 된 시인. 나도 시를 읽으며 똑같은 상상을 해보았다. 그랬다. 나 역시 남는 것은 원망과 한탄보다 부끄러움과 뉘우침이라는 아쉬움이 먼저 떠올랐다. 지나간 시간들 속에 더 잘해주지 못한 내 사람들, 더 다정하게 다가가지 못했던 내 사람들. 그들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시인의 이 시는 아직 그 아쉬움을 줄일 기회의 마음을 선물해 주었다.
p.66
미세먼지 뿌연 날
퇴원해 귀가하는 차 안에서,
거실 창밖으로 산언덕을 바라보며,
핸드폰 속에서 울리는 손자들의 목소릴 들어며,
나는 행복했는데
한달을 지나 두달을 지나
텔레비전을 보고 신문을 읽으며
증오에 찬 구호를 들으며
귀에 익은 날 선 노래를 들으며
나는 우울해진다.
꿈속에서 다시
전쟁으로 폐허가 된 고향 마을을 헤메고
아내와 함께 살던 산동네 비탈길을 헐떡이고
중풍을 앓는 아버지 기침 소리에 귀를 막는다.
지하실 벽을 긁는 손톱이 보이고
등 뒤로 육중한 철문이 닫힌다.
내가 이룬 일도, 내가 얻은 것도
돌아보면 빈 허공뿐이고
뿌연 안개뿐이지만
그래도 나는 행복하다고
정말 행복하다고
안개뿐이고 허공뿐이어도 행복하다고 되뇌며 걷는 둘레길 골목길에
매일처럼 뿌옇게 미세먼지 끼고.
내 지나온 나날들 같은 뿌연 미세먼지 끼고.
뿌연 안개를 걷어내는 감사
이 시를 읽다가 잠시 휴대폰을 다시 들었다. 신경림 시인이 민주화 운동을 하셨었나? 나는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정말 처음 들은 것인지, 아니면 그동안 무심했던 것인지. 시 속의 '지하실 벽을 긁는 손톱'이나 '육중한 철문' 같은 시구들. 고문이다. 고문의 기억을 형상화한 이미지들이었다.
병원에서 퇴원하며 느꼈던 소박한 일상의 기쁨 사이로, 텔레비전과 뉴스에서 쏟아내는 우울한 소식들을 마주하며 시인은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세상은 여전히 변한 것이 없구나'라는 탄식은 아니었을지 감히 그의 마음을 상상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일이 뿌연 미세먼지가 낀 날 같아도, 역사가 반복되어 그때와 지금이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일지라도 나는 말하고 싶다. 지금은 아주 조금씩, 정말 아주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습니다. 시인의 그런 치열한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 사회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인식이 더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 헌신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다.
p.86
제주, 이 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꿈이여
늘 바람은 먼저
이 멀고 외진 섬부터 휩쓸고
어둠도 죽음도 늘 이 섬부터 불어와,
툭하면 가로수가 꺽이고
지붕이 날아가고 사람들이 쓰러지지만,
그래서 오름에 분화구에 억새밭에
깊고 굵은 상처가 패지만.
이 나라의 재앙을 막는 것은 우리들,
어둠과 죽음을 앞장서 막고 있는 것도
우리들의 이 외진 섬.
나라에 변란이라도 일면 다시
총을 메기도 하고
횃불을 들기도 하면서.
그러는 사이 우리들의 이 섬은
이 나라에서 가장 억센 땅이 되었으니,
가장 점은 힘이 되었으니,
이 나라를 온통 작은 품에 껴안는
작으면서도 가장 넓은 가슴이 되었으니,
보라, 온 섬에 깔린 이 활기와 푸름을.
“이어도 사나이어도 사나”
어떤 거센 비바람도 이겨내는
잠녀들의 물질과
“어려려려 요 소 말들이아”
어떤 고됨도 아픔도 이겨내는
어멍들의 밭갈이와
하르방들의 피와 땀이 온통 하나가 되어,
마침내 이 섬은 이 나라에서
가장 깊은 뿌리가 되었으니,
가장 아름다운 꿈이 되었으니.
늘 비바람은 이 외진 섬부터 처들어와
툭하면 나무가 뽑히고 방파제가 무너지지만,
이 나라의 온갖 기쁨과 슬픔을
작으면서도 넓은 이 가슴에 안으면서.
넓은 가슴을 가진 설렘의 섬
내게 ‘제주’라는 단어는 언제나 설렘의 상징이었다. 노란 유채꽃밭 뒤로 펼쳐지는 에메랄드빛 바다. 비행기로 단 30분이면 마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낙원. 하지만 역사를 공부할수록 그 화려한 풍경 뒤에 숨겨진 아픈 사연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시인에게 제주는 그저 푸른 바다가 있는 휴양지가 아니라 바람과 어둠 그리고 죽음이 가장 먼저 불어오는 외진 섬이다. 거상 김만덕의 이야기 속에서 보았던 조선 시대의 출륙 금지령부터 한국 현대사에서 6·25 전쟁 다음으로 인명 피해가 극심했다는 제주 4·3 사건에 이르기까지. 제주는 고립과 억압 아래 가장 깊고 굵은 상처를 입어야 했던 땅이었다.
시인은 비바람에 나무가 뽑히고 방파제가 무너지는 고통 속에서도 그 모든 아픔을 안으로 삭여낸 제주의 강인함을 보았다. 억센 땅이자 젊은 힘의 상징. 작으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넓은 가슴을 가진 섬. 시인이 노래한 제주는 이 나라의 온갖 기쁨과 슬픔을 묵묵히 끌어안으며 상처 입은 이들의 뿌리가 되어주고 있었다. 제주에 대한 시인의 문장은 이제 제주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 또한 단순한 설렘을 넘어 깊은 존경과 애정으로 바꾸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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