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어서 좋은 오늘의 오렌지

오렌지 - 웬디 코프

by 레토

THE O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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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집을 읽을지 고민할 때 보통 베스트셀러를 찾거나 신간 코너를 기웃거리며 이런저런 시집들을 뒤적거리다 마음에 드는 책을 집어오는 편이었다. 시집을 처음 접한 지가 지난해 8월이니, 이제 반년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베스트셀러를 통해 시집을 읽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시집 리스트에 거의 변화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로 나태주 시인이나 한강 작가처럼 이름이 유명한 분들의 시집이 주를 차지했고, 나 역시 처음 접한 시집은 그분들의 책이었다.


최근에는 신간 코너에서 스스로 읽을 만한 시집을 발견하며 조금 더 용기를 내어 보았다. 도서관 3층 가장 구석, 가장 조용한 코너인 시집 서가에서 책을 뽑았다 넣었다를 반복하다가 한 권의 시집을 발견했다. 표지부터 내 취향을 저격한 『오렌지』. 단순할 수 있는 주황색 오렌지 일러스트에 판매용 작고 둥근 라벨 하나가 더해져 한층 유니크한 느낌을 주었다. 오직 표지가 가진 매력에 이끌려 이 시집을 들고 왔으나, 작가를 검색해 보니 예상보다 훨씬 유명한 시인이었다.


웬디 코프가 한국 2030 세대의 마음을 사로잡은 비결은 일상의 사소한 행복을 긍정하는 담백함에 있다고 한다. '갓생'에 지친 청년들에게 오렌지 한 알만으로도 ‘살아 있어 좋다’고 말하는 그녀의 시선은 따뜻한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복잡한 은유 대신 직관적인 위트를 담은 감성 또한 디지털 세대의 소통 방식과 잘 맞닿아 있다. 거창한 성공보다 오늘의 작은 기쁨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청년들의 마음을 깊게 파고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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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3

오렌지

점심시간에 커다란 오렌지를 하나 샀어 -

그 크기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지.

난 껍질을 벗겨 로버트와 데이브에게 나눠 주었어 -

그들이 사분의 일씩 가지고 나는 반쪽을 가졌지.

그 오렌지 덕분에 너무도 행복했어,

평범한 일들이 종종 그렇지,

특히나 요즘에는. 장을 보는 일도. 공원을 거니는 일도.

모든 게 평화롭고 만족스러워. 새삼스럽게도.

남은 하루도 편하게 흘려보냈어.

해야 할 일을 모두 하면서도

즐거웠고 나중에는 여유시간도 생겼지.

사랑해. 살아있어 참 좋다.


일상의 빈틈이 주는 다정함

일상의 소중함을 알아야 한다는 말은 어느 책에서나 쉽게 접할 수 있다. 나 역시 누구에게나 쉽게 건넬 수 있는 조언일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생각만큼 쉬울까? 곰돌이 푸의 대사 중 크리스토퍼 로빈에게 이런 질문을 하는 장면이 있다. "크리스토퍼 로빈, 오늘은 무슨 요일이야?" 그러자 크리스토퍼 로빈은 푸에게 "오늘은 오늘이야"라고 답해준다. 그 말에 푸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네"라며 응답하는 부분이 있다.


지난주에 멋진 여행에서 돌아왔고, 어제 맛있는 외식을 했다면 오늘보다 그날들이 더 좋고 행복한 날일까? 평범한 일상 가운데 서로 얼굴을 마주하며 작은 웃음을 주고받으며 햇빛 아래 짧은 산책도 하고 작은 여유로 주변을 바라볼 수 있는 날. 일과가 끝나면 몰아치는 숨을 헐떡이며 허둥지둥 바쁘게 잠자리에 들기보다 여유롭게 작은 게으름을 택할 수 있는 빈틈이 있는 날. 큰 고민거리에 잠을 뒤척이며 설치기보다 별 의미 없는 수다를 주고받다 나도 모르게 잠들어버린 날. 이런 날들이 좋다. 어디 크게 아프지 않고 건강하게 살아있기에 감사한 날. 그런 날을 사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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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3

이름들

몇 주 동안 그녀는 일라이자였어.

그녀가 아기였을 때엔 -

일라이자 릴리였지. 그리고 곧 릴리로 바뀌었어.

이후에는 빵집의 스튜어트 양이 되었다가

그다음엔 ‘내 사랑’, ‘여보’, 어머니가 되었어.

서른 살에 과부가 된 그녀는 다시 일터에 나가면서

핸드 부인이 되었어. 그녀의 딸이 자라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지.

이제 그녀는 할머니가 되었어.

‘모두가 나를 할머니라고 부른답니다’,

그녀는 방문객들에게 이렇게 말했지.

그래서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어 –

친구, 상인, 의사 모두.

노인 병동에서

사람들은 환자들의 기독교식 이름을 사용했어.

‘릴’, 우리는 이렇게 불렀어. 또는 ‘할머니’라고

그러나 그건 그녀의 기록지에 없었지

그리고 그 정신없던 마지막 몇 주 동안

그녀는 다시 한번 일라이자가 되었어.


호칭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웬디 코프의 시 「이름들」은 한 인간의 일생을 그가 불렸던 호칭의 변천사를 통해 표현하였다. 시 속의 주인공은 아기 ‘일라이자’로 시작해 ‘릴리’라는 애칭을 거쳐, 누군가의 아내이자 어머니, 그리고 ‘핸드 부인’이라는 사회적 이름을 입고 살아간다. 세월이 흘러 노년에 이른 그녀를 향해 세상은 ‘할머니’라는 단일한 호칭을 부여했다. 친구도, 의사도 그녀를 고유한 개인이 아닌 사회적 역할로만 규정하기에 그녀의 고독은 점점 더 커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시의 가장 시린 지점은 생의 마지막, ‘정신없던 마지막 몇 주’에 나타났다. 알츠하이머 혹은 망각의 시간으로 짐작되는 순간이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를 평생 가두어 온 수많은 역할로부터 해방시켜주었다. 아내와 어머니, 할머니라는 사회적 껍데기가 기억 너머로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그녀가 태어났을 때의 이름인 ‘일라이자’. 병원 차트는 그녀를 환자로 기록할지 모르나 그녀의 내면은 다시 자신으로 돌아가 생을 마감한다. 결국 우리의 삶이란 타인이 붙여준 수많은 이름표를 하나씩 떼어내며 가장 순수했던 본연의 나로 회귀하는 긴 여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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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47

맹세

절대로 화내지 않겠다 약속은 못하겠어.

항상 친절하게 대하겠다 약속은 못하겠어.

당신은 무엇 때문인지 알 거야, 내 사랑아 -

사랑이 맹목적인 시기는 처음뿐이잖아.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당신이 함께하고 싶은 사람이고

당신도 역시 나에게 그런 사람이야 – 그것만은 확실하지.

당신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

내가 기다려왔던 연인이자 안식처야.

당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겠다 약속은 못하겠어

당장 오늘은 말이야. 내가 그 기준을 통과하면 좋겠네.

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거든.

정말이지 최선을 다하겠다 약속할게.


결혼 16년 차, 완벽한 맹세보단 노력

결혼 16년 차가 되었다. 항상 화내지 않고 친절하겠다는 약속은 불가능이다. 그런 관계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어느 한계를 통달했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한쪽이 참고 있을 것이다. 10년, 15년이 지나자 '화는 내지만 빨리 풀겠다'라는 생각으로 변했다. 아니, '빨리 풀려고 노력하겠다'가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친절하겠다'가 아니라 '조금 더 친절하도록 노력하겠다'로 바뀌었다.


"확신은 못 하고 어정쩡하게 노력하겠다는 게 뭐야? 나에 대한 존중이 부족한가?"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 나를 위해 노력한다는 말과 마음 자체가 사실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상황을 모면하려는 거짓말이 아닌 이상, 그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 일이다. 물론 형식적인 말뿐인 일이 계속 반복되면 결국 나도 화가 나겠지만 말이다.


16년을 살았지만, 아직도 우리가 함께한 세월보다 따로 살았던 시간이 더 길다.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장 든든한 아군임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알아가는 중이다.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며 나는 그가 안쓰럽고 그도 내가 안쓰러운 순간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그가 있기에 든든하고 그도 내가 있기에 심적인 안정감을 얻고 있을 것이다. 있겠지? 있어야 하는데? 있을 거라고 믿기로 하자.


우리는 서로에게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되어주자는 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옛말 그대로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 그러려면 우선은 건강하게. 일단은 늦잠을 자고 있는 남편을 깨워 함께 아점을 먹고, 겨울치고 따뜻한 공기를 만끽하며 산책을 나가봐야겠다. 일상에서 건질 사소한 행복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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