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이라는 칸을 채우는 방법

나의 모험 만화 - 김보나

by 레토

문학과 지성 시인선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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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나의 모험 만화' 라는 제목을 만났을 때부터 호기심이 생겼다. 모험과 만화라는 단어, 뭔가 찰떡궁합인 느낌이다. 김보나 시인의 이 시집은 일상의 아주 사소한 순간들을 기발한 상상력으로 비틀어 마치 한 편의 탐험기처럼 보여주었다. 익숙한 풍경을 낯설고 흥미롭게 만드는 감각이 탁월했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시어들이 만화 칸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기분을 들게 하는데, 비유 대신 투명한 언어로 건네는 이야기들이 마음을 기분 좋게 간지럽혀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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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30

나의 모험 만화

키 작은 주인공이

딱 한 번 용기를 낸다.

만화 그리는 게 좋았다.

심장은 두근거렸으나

힘껏 찬 축구공이 낮은 호를 그리고

빌려준 노트를 읽는 짝꿍의 입꼬리가 올라갈 때

모험은 쉽게 시작되지 않았다.

나의 주인공은 그저

다들 지나치는 사육장의 토끼를

혼자 돌보는 사람

혹시 동물의 말을 알아듣게 되었나

귀 기울여보지만

사각사각

자신의 말은 구름을 닮은

말풍선에 밀어 넣곤 한다.

(털 달린 마음이 철창에 갇혀 풀을 씹는다)

(눈동자에 비친 풍경이)

(경이로울 때도 있었다)

나는 보여주고 싶다

독서기록장에 쓰지 못한 문장 혹은

어린 토끼에게 건초를 부어 주며 쏟아낸 마음

성장소설에 관해 말하고 싶다

정체를 숨긴 외계인이 학교를 짓밟는 이야기

그러나 눈물 한 방울 떨구면

사각사각

쓰러진 친구가 되살아나는 이야기를

토끼에게 먹이면서도 나의 주인공은

공조차 앞지를까 봐

달리는 속도를 조절하는 사람

어찌할 줄 모르다가 우연히 가까워진 공을

부딪쳐 오는 강한 햇빛을

피하지 않으며

다시 힘껏 (발을 밟는다)

명대사를 터뜨릴 시간인데

주인공은 그저 웃는군

이 모험의 끝은 친구를 만드는 일이라는 듯

(훗날……) 어른이 된 6시

칸칸이 나뉜 지하철에서 나는

백팩의 무게를 버티며 서 있다

칸 속 사람들의 말풍선을 속속들이 알고 싶다

내년을 얘기할 때 사람들은 왜

밝은 표정을 지으려 애쓰는지

해가 진 뒤로

저마다의 모험은 어떻게 지속되는지

(계속)


작은 용기가 만드는 세계

이 시에서 '모험'은 뭐 엄청난 승리가 아니라 '친구를 만드는 일' 혹은 '독서기록장에 쓰지 못한 진심을 건네는 일'을 뜻했다. 어린 시절, 만화 칸 속 주인공처럼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던 아이는 어느덧 백팩을 멘 어른이 되어 지하철이라는 '칸'에 서 있게 된다.


시인은 타인의 머리 위에 떠 있을 '말풍선'을 궁금해하며 고단한 퇴근길에도 저마다의 모험을 지속하는 우리 모두를 다정하게 응원했다. 굴곡진 성장 서사가 아니더라도, 햇빛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칸을 채워가는 평범한 주인공들. 그 모두가 우리의 모습이다.


태어날 때부터 알에서 태어나 나라를 건국할 운명을 지닌, 엄청난 위인이 아니고서야 누가 처음부터 큰 용기를 가지고 있을까? 작고 작은 용기를 냈던 그 기억들이 하나둘 눈덩이처럼 모여, 팍팍한 삶에 모래바람을 맞아 건조한 얼굴에 생채기가 나도 눈꺼풀에 끼인 모래 먼지를 털어내고 눈을 뜰 수 있는 것이다. 매일 크고 작은 모험을 하고 있는 우리 모두의 모험은 박수받아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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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5

공휴

무슨 생각해?

그냥 은행에서 나눠 준 달력 생각해

돈을 불러온대서

줄 서서 받은 거?

응, 올해 휴일은 이틀 늘었대 동그라미 쳐두었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불현듯

희뜩번뜩한 날치 떼를 보고 싶어졌다

열차에 타고 있으면 어디로든

갈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실은 그냥 오래 쪼그린 상태

설핏 졸던 네가 문득 빨간 실타래를 꺼냈다

그 털실은 아주 두꺼워서 순식간에 손가방이 완성죄더라

그런 실이 필요했어

이틀 늘어난 휴일을 단단히 옭아매어

마음 놓고 우리를 내던질 수 있도록

우리가 모르는 곳으로

은행도 달력도 없는

바다에서 바다 밖으로

솟구쳐 나는 은빛 지느러미처럼

잠시


나는 공휴일보단 그다음 날

가정주부에게 공휴일은 그다지 반갑지 않은 존재다. 아들에겐 설레는 '빨간날'이겠지만, 내게는 조용하던 평화가 깨지고 복작거리는 소란이 시작되는 날이기 때문이다. 남편과 아이가 떠난 뒤 찾아오는 평일 오전의 정적. 엄마가 자신과 함께하는 날보다 그 안정감이 주는 에너지를 더 좋아한다는 진심을 아들이 알아서는 안 될 텐데….


김보나의 시 「공휴」 속 화자는 은행 달력에 동그라미를 치며 휴일을 기다리지만, 정작 그 모습은 '열차 속에서 오래 쪼그린 상태'와 닮아있었다. 직장인 시절의 나도 그랬을 것이다. 어떤 마음인지 알기에 충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시 속의 '빨간 실타래'를 조금 다른 용도로 쓰고 싶어진다. 시인은 이틀 늘어난 휴일을 단단히 옭아매어 바다 밖으로 솟구치는 날치 떼를 꿈꿨다. 그러나 나는 그 실타래로 공휴일의 소란을 잘 묶어두었다가 그다음 날, 모두가 떠난 빈집의 고요 밖으로 내던지고 싶다.


재잘거리는 아들의 소음이 생기 넘치는 풍경임을 알지만 은행도 달력도 없는 바다 밖으로 솟구치는 은빛 지느러미처럼 모든 역할로부터 분리되는 '잠시'가 사실 더 간절하다. 그래서 나는 공휴일보다, 그 폭풍 같은 소란 뒤 찾아오는 공휴일 그다음 날을 더 사랑한다. 짧은 적막함은 내가 다시 일상을 지속할 에너지를 얻는 진정한 의미의 휴식이자 나만의 작은 모험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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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04

상자 놀이

내 방엔

뜯지 않은 택배가 여러개 있다.

심심해지면 상자를 하나씩 열어본다

오래 기다린 상자는

갑자기 쏟어진 풍경에 깜짝 놀라거나

눈을 떴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건 착각이야

누군가 눈 뜨기 전에 세계는 먼저

빛으로 눈꺼풀을 틀어막지

나는 상자가 간직한 것을 꺼내며 즐거워한다

울 니트의 시절은 지났고

이 세제는 필요하다

새로 산 화분을 꺼내

덩굴을 옮겨 심으면

내 손은 순식간에 흙투성이가 된다

그래도 돼

뮬런베키아 줄기가 휘어지는 방향을 따라가도 돼

식물은 쏟아지는 빛의 자취를 따라가며 자란다고

넝쿨을 안겨 주며 친구를 말했지

방을 둘러보면 여전히 상자가 수북하다

이삿짐이나

유품같다

빈 상자가 늘고

열 만한 것이 사라져가면

나는 이 방을 통째로 들어

리본으로 묶을 궁리를 해본다


상자 속에 담긴 삶의 조각들

「상자 놀이」는 택배 상자를 여는 일상적인 행위를 삶이라는 커다란 서사로 확장하고 있다. 상자 속 물건들은 지나간 계절을 대표하는 니트와 오늘의 필요로 대표되는 세제 그리고 내일의 성장을 뜻하는 화분을 상징한다. 흙투성이가 된 손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식물의 자취를 따라가는 모습은 삶의 번거로움을 성장의 과정으로 긍정하는 성숙함을 보여주었다.


택배를 주문하면 하루 이틀 안에 오는 것도 빠르게 느껴졌었는데 이제는 아침에 택배를 시키면 오후에, 한밤중에 시켜도 아침 일찍 집 앞에 상자가 놓여있다. 어느 아침, 택배로 온 물건들을 정리하고 상자들을 접어 재활용 정리를 하는 데만 한 시간 가까이 걸린 적도 있다. 하나씩 열면서 설레기는커녕 어느새 한가득 택배가 오면 처리해야 할 일거리들로 보이기 시작했다.


혹시 내 삶도 그렇게 된 걸까? 새로운 물건들로 채워지며 조금씩 삶의 질이 좋아지기는커녕, 그저 처리해 버려야 할 하루하루가 모여 내 인생이 되면 안 될 텐데…. 시인은 마지막에 방 전체를 리본으로 묶어버리겠다는 상상을 한다. 자신의 삶이라는 공간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선물'로 정의하려는, 다소 엉뚱하면서도 단단한 시인의 세계관이 유독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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