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토 컵라면 - 차정은
시집 코너를 돌아보다 지난여름 고민하다 놓친 시집을 다시 발견했다. 지난해 늦은 여름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과 『토마토 컵라면』 두 권의 시집을 고민하다가 제목의 끌림이 주는 대로 『심장보다 단단한 토마토 한 알』을 읽어 보았다. 그 이후 『토마토 컵라면』이라는 시집은 기억에서 잊혔다.
다시 발견했을 때, 이상하게 반가운 마음이 들었던 것은 그때 선택하지 못했던 미안함 때문일까? 가볍게 펼쳐본 시집의 분위기는 이 겨울에 읽기 좀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세상에 그런 게 어디 있냐며. 여름이 지나갔지만, 또 여름은 다가오는 거라고. 겨울에 읽는 여름 향 가득한 시집을 자신 있게 품에 담아왔다.
『토마토 컵라면』에는 여름의 기억과 청춘의 감정이 담겨 있다. 토마토의 붉은 색과 컵라면의 뜨거운 온기는 이 책에서 사랑과 추억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그려진다. 차정은 시인은 혼자 먹는 한 끼 같은 일상의 장면을 통해 식어가고 정리되는 사랑의 시간을 표현한다. 가볍게 읽히지만, 문장 끝에는 여운이 남아 있었다.
p.23
토마토 컵라면
해변가 위 버려진 붉은 조각들은 빛이 나고
물과 맞닿은 금빛 모래들은 황빛의 풍경이었지
차갑게 물든 바다에 발을 담그고
낡은 의자에 앉아 뜨거운 물을 들이붓고
비집고 나오던 새빨간 열기들은
붉은 석류를 매달던 토마토 같았어
우리의 여름은 노을 진 추억이었고
푸르게 피어난 토마토가 붉게 익어 물러질 때까지
나는 그때의 향기를 비집기로 했어
그리도 열망하던 붉은 입자는
그리도 뜨거운 여름날에 사람을 심어주고
지나버린 청춘이 남긴 향기를 맡으며
시를 읽으며 해변에 앉아 컵라면을 먹는 청춘의 모습이 그려졌다. 물론 나에게 똑같은 추억은 없다. 한적한 해변과 그곳에 발을 담그고 앉아 컵라면에 물을 붓는 모습. 그때의 청춘은 모를 것이다. 평범했던 그날의 그 장면이 지나고 나면, 참 예쁜 추억이 될 거라는 것을. 나에게 청춘은 바쁘게만 살아온 청춘이었다. 마음이 닿는 대로 훌쩍 어디론가 떠나 배가 고파지면 그저 그곳에 주저앉아 가볍게 컵라면 하나를 먹을 수 있는, 반짝이던 청춘에 그런 예쁜 추억 정도 남길 용기도 없었다.
토마토가 푸르렀다 붉게 익고 결국 물러지듯 뜨거웠던 여름과 열망도 그렇게 지나가지만, 그 향기는 끝내 사라지지 않는다. 나의 청춘은 소란스럽고 숨 가빴지만 그래서 인지 이 시가 그려내는 한 장면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지나간 계절을 대신 살아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장면을 읽으며 비집고 나온 향기 덕분에 청춘을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지나버린 청춘과 그때 없던 용기에 대한 아쉬움을 뒤로하고,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 시간이 또 어떤 향기를 남기게 될지 궁금해진다. 은은하고 좋은 향기를 오래 남길 수 있는 삶을 살아내고 싶다.
p.43
식목일
우리의 매일은 항상 그런 날이었지
말장난에도
그저 그런 신호에도 반응하는 나의 모습이
상쾌한 공기와도 같아서
안전 구역이라 칭한 그것은 거뭇한 숯 향이 가득해
그래도 그렇게 사랑하며 세상을 정화하니
그렇게 매일은 푸른빛이 가득한 것을
사라진 식목일 대신, 매일 식목일이어야 한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식목일은 공휴일이었다. 학교에 가지 않아 괜히 더 신나던 날. 나무를 심으라는 날이기에 산에 나무를 심으러 갔던 기억도 어렴풋이 한 번쯤은 남아 있다. 학교에서 작은 묘목을 나눠 주어 심어본 적도 있고, 봉투에 담긴 씨앗을 받아 키워본 적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식목일을 지나왔음에도 기억이 희미한 것을 보면, 정작 나무를 심은 경험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다. 그때는 식목일이 왜 필요했고, 왜 국가 공휴일이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식목일이 사라진 지금에서야, 나무를 심는 일을 넘어 나무의 중요성이 더 크게 느껴진다. 지구는 죽어가고 있고 이를 되돌릴 방법 중 하나는 생태계의 다양성을 지키는 일이라고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생산자인 나무, 곧 식물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시인이 말하듯 우리의 매일은 항상 그러해야 한다. 식목일이 사라졌다는 것은 그날 하루만 나무의 중요성을 떠올릴 것이 아니라, 매일이 푸른빛을 띠도록 세상을 정화해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물론 시인이 『토마토 컵라면』에서 식목일이라는 소재로 말하고자 한 것이 실제 나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시를 읽으며 진짜 식목일을 떠올렸고, 그 생각을 글로 옮겨보았다. 시인의 의도와는 다를 수 있지만, 시를 읽다 자연스럽게 떠오른 나의 생각 또한 나만의 방식으로 시를 읽은 결과일 것이다.
p.59
무지개를 새기는 방법
비가 개면 창틀 사이로 무지개가 들어오곤 해
네 조각으로 나누어진 무지개는 화사한 날씨를 예보하고
지구 반대편에 새겨진 무지개는 습한 날씨를 그려주고
하늘에서 보는 무지개는 동그란 원형 모양이야
우리의 세계에는 무지개의 절반밖에 보지 못하고
원형의 무지개는 나의 상상 속 무지개와 달라서
어쩌면 우리는 반절뿐인 무지개를 더 사랑할 뿐이니
그래도 우리는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더 사랑하니 말이야
익숙해진 무지개, 그렇다면 원형의 무지개는 어때?
아이 방에는 붙박이장이 있고, 유리창과 마주 보는 쪽에 거울이 부착되어 있다. 집이 남동향이라 그런지 새벽에 비가 오고 난 다음 날이면 아침부터 무지개가 간혹 보인다. 무지개가 보일 때면 아이는 호들갑을 떨곤 했다. “엄마, 여기 봐봐. 무지개야. 무지개!”그런데 나는 아이만큼 그렇게까지 반가운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어, 무지개네. 예쁘다.”하고는 약간은 무미건조하게 반응하곤 했다. 잠이 덜 깨어 텐션이 올라오지 않은 상태였다는 핑계를 대어본다.
시를 읽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나도 어릴 때는 무지개를 보고 호들갑을 떨었는데, 나는 왜 이제 무지개를 봐도 그저 그런 기분이 드는 걸까. 아이 역시 이제 5학년을 바라보니, 자기 방에서 같은 무지개를 봐도 반응이 예전 같지는 않다. 나를 불러 와 보라며 호들갑을 떨지도 않고, 그저 “어, 무지개네” 하고 말아버린다. 아마도 모든 사람이 겪는 마음의 변화일 것이다.
이제는 그다지 놀라울 것 없는 무지개가 되었지만, 『토마토 컵라면』에 등장하는 원형 무지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동그란 무지개라니. 늘 그림을 그릴 때면 산을 그리고 그 위에 걸쳐진 반원형의 무지개만 떠올렸는데 말이다. 다음에 또 아이 방에서 무지개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때는 오랜만에 내가 먼저 아이에게 말해보고 싶다. “무지개다! 저 무지개는 반원 모양 저게 다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나머지까지 이어져 동그란 모양일까?” 그렇게 먼저 작은 호기심을 건네어 함께 나누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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