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골드 마음 사진관 - 윤정은
『메리골드 마음 사진관』은 윤정은 작가님의 베스트셀러 《메리골드 마음 세탁소》를 잇는 따스한 힐링 판타지 소설이다. 이 책은 마법 같은 사진관을 찾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지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사진 속에 담으며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가는 과정을 다정하게 그려낸다. 누구나 품고 있는 후회와 슬픔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지나온 모든 순간이 결국 자신을 만드는 소중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한다. 지친 일상에서 잠시 멈춰 서서 마음의 풍경을 들여다볼 수 있는 다정한 위로와 응원 같은 이야기이다.
p.18
트럭 앞자리에 나란히 앉은 세 사람은 말이 없다. 아빠는 거뭇해진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집으로 향한다. 세 사람은 서로에게 미안해 창밖만 바라본다. 우리는 왜 이리 미안해야만 하는 걸까. 가난은 사랑하는 이를 매일 미안하게 만든다. 침묵을 깬 건 봉수가.
“윤아, 배추랑 호박 넣고 맛있게 끓인 된장국도 먹고, 고소하게 호박전도 부쳐줄까?”
“아빠, 배추랑 호박 시들었어? 팔아야 하는데 어떡해.”
언젠가부터 트럭에서 못 팔고 남아 시든 채소들만 먹어 온 아들이었다.
p.23
국가에서 재공하는 무료 건강검진을 받았는데 병원에서 당장 입원하지 않으면 목숨이 위험하다고 한다. 어쩌면 길어야 석 달을 살 수 있다고 했다. 봉수는 당장 입원하라는 말에 벌떡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트럭으로 돌아왔다.
“이보시오, 사람 형편 봐가면서 돈 벌려고 해야지. 아무리 병원이 영리여도 이러면 안되는 거 아닙니까? 죽어도 내 집에서 죽을랍니다!”
p.42
지우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가요.
마음의 얼룩을 행복한 기억으로 바꾸어 찍어 드려요.
보고 싶은 마음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줄 수도
보고 싶은 순간을 사진으로 찍어 보여줄 수도 있어요.
당신이 행복할 수 있다면
얼룩진 마음을 행복한 마음으로 바꾸어 드립니다.
어서 오세요, 행복한 마음을 찍어 드리는 마음 사진관입니다.
-사진관 주인 백-
p.47
“오메 비가 다시 오네, 장마인가. 저리 비가 시원하게 와야 무지개도 뜨고 해도 나제. 비가 오고 폭풍이 불고 바람이 불어야, 또 마른 날이 오제. 시원하게 내리는 비 핑계삼아 시원하게 울어재낄 수도 있고 말이여. 오늘 밤은, 저 비에 많은 게 씻길 거여. 암, 그런 겨.”
p.58
“그 사진을 볼지 말지도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사진을 보신다고 해서 저희가 미래를 바꾸어 드리지는 않습니다. 그저 선택을 하게 도와드릴 뿐입니다. 저도 정답을 찾고 싶지만, 아마도 인생에 정답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우리는 물음표를 지닌 채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집니다. 최선을 다해. 그런 사람들을 우리는 어른이라고 부르죠.”
p.63
“태어날 땐 우리 마음대로 선택하지 못했지만 죽을 장소는 우리가 선택하자 영미야. 우리 마지막 눈 감는 순간은 아름답게 죽자. 하지만 우리 열심히 살자. 그런 날이 오지 않도록. 영미야 우리 같이 살자.”
p.70
인간이 가진 재능 중 쓸 만한 것이 바로 망각 아닌가. 온통 시궁창 같던 암흑의 시간이 망각을 통해 희미해지며 새벽을 밝히고 새 아침을 만든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는 의미 없는 희망 고문이 아닌, 시계태엽을 돌리는 마법의 주문인 것이다.
절망의 끝에서 마주한 삶의 무게
소설 속 봉수의 선택을 따라가다 참을 수 없는 울컥함이 밀려왔다. 뉴스에서 종종 마주하는 ‘생활고 비관 가족 동반 사망’이라는 소식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남겨질 아이가 걱정되어 내린 선택이라 해도 나는 결코 납득할 수 없었다. 아무리 부모라 한들 그 누구에게도 타인의 생명을 결정지을 권한은 없다.
봉수의 상황은 잔인할 만큼 숨이 막혔다. 시한부 판정을 받은 자신과 몸이 성치 않은 아내 그리고 너무 일찍 철들어버린 순수한 어린 딸. 소설은 판타지라는 방패로 그의 병도, 극단적인 선택도 막아 내지만 현실은 소설보다 훨씬 무겁고 냉혹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런 선택의 앞에 서는 사람들에게 간절히 바란다. 그 죽을 용기로 부디 살아내기를.
누군가는 상황을 모르는 소리라 할지 모르지만, 죽음을 결심할 만큼 끌어모은 그 거대한 에너지를 하루를 견디는 힘으로 바꿀 수 있다면 어떨까. 그 엄청난 용기의 방향을 아주 조금만 틀 수 있다면 소설 같은 기적은 아니더라도 살아있기에 마주할 수 있는 또 다른 내일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p.156
범준은 아빠의 등을 떠밀어 욕실로 들여보낸다. 평생 은행원으로 성실히 살다 퇴직하고 연금 받으며 쉬엄쉬엄 살아도 되는 사람이 작년부터 택시 기사를 한다고 나셨다. 아빠는 어쩜 저렇게 성실할까. 하고 싶은 것도 없고, 무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는 범준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집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누워 있는 게 제일 좋다. 집에만 있어도 잠도 자고 유튜브도 보고 게임도 하고 넷플릭스도 보고 하루가 바쁘다. 정말 종일 집에 틀어박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지만 아빠에게 부담을 주기는 싫어서 용돈이라도 벌려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다. 자신이 꼭 아니더라도 상관없는, 언제 그만두어도 이상하지 않은 자리가 자신의 자리 같다.
p.183
“사람들이 어떻게 볼지가 아니라 내가 나를 어떻게 볼지가 중요한 거야. 일을 대하는 마음의 자세를 단정히 해야지, 마음을 찍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 더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그게 내가 생각하는 일에 대한 예의야. 이 사진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싶다면 내가 생각하는 일의 예의를 너도 지켜줬으면 좋겠어.”
“일에 대한 예의라고요? 이런 말 하는 사람 처음 봐요.”
p.196
“형, 근데 저는 제가 정말 하루살이 같아요. 세상이 쓸모없는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버거워요. 근데 있잖아요. 왜 모두가 나비나 꿀벌로 살아야 하죠? 하루살이가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가 있잖아요. 모두가 똑같은 얼굴로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하나요? 하루살이도 있고 모기도 있고 파리도 있을 수 있잖아요.”
“모든 사람은 저마다 다른 고유성을 가지고 있지.”
“근데 형, 자꾸 꿈을 찾아 나비나 꿀벌이 되라고 하니까 숨 막혀요. 다른 얼굴이나 다른 일생을 산다고 해서 루저는 아니잖아요.”
p.200
“있잖아요. 이건 형한테 처음 말라는 건데… 저는 이번에는 나비가 되고 싶은 꿈이 있어요.”
해인이라면 범준의 꿈을 터무니없다 비웃지 않을 것 같아 용기를 내본다. 범준은 말을 하고 눈을 질끈 감는다. 피상적이고 추상적인 꿈이라고 핀잔할 것 같아서.
“아름다운 꿈이네.”
p.208
“근데 또 꿈꾸지 않을 자유라면서 저처럼 이렇게 살다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면요?”
“아무것이 되지 않아도 괜찮아. 지금까지 살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한걸. 아무것이 된다든가 평범하다든가 특별하다든가, 그런 기준들도 어차피 사람이 정한 거 아닌가? 내 삶에 대한 기준은 내가 정하면 되는 거야. 그리고 아무것이 되지 않아도 괜찮은 시절이 청춘 아닌가. 방황하고 헤맬 특권을 낭비해도 될 거 같아. 사실 나는 그런 청춘을 보내지는 못했지만 말이야.”
이제 나비가 되고 싶은 하루살이
범준의 모습을 보며 '히키코모리'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그런데 이 단어를 찾아 검색해 보니 '오랜 기간 집에 틀어박혀 사회와의 접촉을 극단적으로 기피하는 행위, 혹은 그런 사람을 칭하는 일본의 신조어. 정신병리학적으로는 회피성 성격장애와 유사하다'라는 결과가 나왔다.
범준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면 니트족(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 NEET)? 즉, 무직 상태이면서 취업을 위한 교육이나 훈련을 받지도 혹은 그 외 학문을 공부하고 있지도 않는 이들을 일컫는 말에 가까울까? 백수 중에도 취업 의사가 전혀 없는 경우라는데. 과거의 캥거루족인가? 범준은 이것도 아닌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는 것으로 보면 완전한 백수도 아닌 것이. 그렇다면 범준은 어떤 상태일까?
범준의 모습은 히키코모리나 니트족 같은 단어들로 정의하기에 어딘가 모호하다. 사회적 접촉을 극단적으로 기피하지도 그렇다고 부모에게 전적으로 기대며 취업 의사조차 없는 상태도 아니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제 몫의 용돈을 버는 그는, 어쩌면 우리 시대 가장 흔하면서도 복잡한 청춘의 얼굴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눈에는 그저 의욕 없는 게으름으로 비칠 수 있으나, 그 이면에는 '나비나 꿀벌'이 되어야만 한다는 강박 속에서 길을 잃은 하루살이의 방황이 숨겨져 있다. 이것이 청춘의 특권인 방황인지, 아니면 단순한 정체인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범준의 마음속에는 나비가 되고 싶다는 작은 불꽃이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해인이 건넨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다’는 다정한 허락이 역설적으로 범준의 멈춰 있던 시계태엽을 돌렸다고 생각한다. 방황할 권리를 인정받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타인의 기준이 아닌 오직 자신의 의지로 고치를 뚫고 나갈 용기를 얻은 것이 아닐까? 결국 어떤 이름으로 정의되든, 다시 날아오르기로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는 힘은 외부가 아닌 나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p.293
걸어갈 길이 꽃길일 줄 알았는데 뒤돌아보니 흙과 풀만 뒤덮인 길이다. 꽃길도 흙길도 잔디 깔린 길도 모두 좋지만 해인은 어떤 길인지 모르고 가는 오늘은 살고 싶어졌다. 내가 가는 길이 꽃길인지 잔디밭 길인지 고민하며 길을 만들어 가고 싶어졌다.
p.296
가지 못한 일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스스로 걷는 길을 아름답게 받아들인다면 아름다운 인생이었다고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꽃길보다 예쁜, 내가 정한 다음 한 걸음
'꽃길만 걸어요. 당신의 앞에 꽃길이 펼쳐지기를.' 상대방을 응원하는 문구로 이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참 좋은 말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런 다정한 인사를 건네준다면 참으로 감사한 일일 테니까. 그런데 이 문장의 방향을 틀어, 이것이 '나의 결심'이 된다면 어떨까? ‘나는 꽃길만 걸어야지. 내 앞에는 꽃길만 펼쳐질 거야.’이것이 긍정의 언어나 주문 정도로 머문다면 좋겠지만 만약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다짐이 되어버린다면 우리네 인생길은 오히려 더 고되지 않을까 싶다. 해인의 말처럼 당장 내일, 아니 세 시간 뒤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누가 알 수 있을까.
행복이 가득한 꽃길이건, 땀 흘리며 실패의 경험을 쌓는 흙길이건, 누군가 정성껏 정돈해둔 잔디길이건 상관없다. 다음 한 걸음을 내가 정하고 내가 가는 방향으로 길을 만들어가는 것 자체가 가장 좋은 길 아닐까. 그저 하루하루, 그 순간의 아주 작은 행복들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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