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창 - 구병모
切創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 『절창』은 상처를 읽는 능력을 지닌 ‘아가씨’라는 인물을 통해 이해가 어떻게 폭력이 될 수 있는지를 파고들고 있다. 제목 ‘절창(切創)’은 칼에 베인 상처를 뜻하지만, 이 소설에서 상처는 단순한 흔적이 아니라 타인이 함부로 들여다보고 해석하려 드는 통로가 된다.
소설의 주인공은 타인의 베인 상처에 손을 대면, 그 사람이 겪은 고통과 기억을 이미지처럼 받아들이는 능력이 있다. 이 능력은 재능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녀의 의지와 상관없이 타인의 내면에 침투하게 만드는 위험한 능력이다. 그녀의 곁에는 이 능력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소유하려는 남자 오언과 독서와 해석을 통해 그녀를 이해하려 드는 선생님이 있다. 몸을 통해 언어와 텍스트를 통해 행해지는 ‘읽기’는 어느 순간 공감이 아니라 지배로 변한다.
p.27
스물 하고도 예닐곱 먹었을까요. 그 몸속에 어떤 실패의 잔재가 집적되어 있으며 무슨 허황된 꿈이 영글어가고 있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나 역시 언제가 지나온 시절의 중턱에 있는 아가씨였는데 그 얼굴이며 몸짓은 어쩐지 퍼져나가는 악취를 마지못해서 맡고 있는 사람의 그것이었습니다.
p.64
―그 애는 나의 질문입니다.
질문이라는 대답에서 자연스레 골칫거리 내지는 불안 요소로 가득한 미해결 과제가 연상됐고, 그토록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뜻인지 알 듯도 모를 듯도 한 그걸론 내게 거의 대답이 되지 않았는데 보스는 한 번 더 강조했습니다.
―나한테 주어진 지극한, 가장 어려운 질문입니다.
p.75
“선생님이 한 실장이랑 올라오기 전에 내가 그 사람한테 했던 마지막 말? ‘때려죽여도 너만은 절대로 안 읽어’ 였어.”
오직 한 명만 읽는 대신, 선택한 고통
선생님의 시선으로 시작하는 보스 그리고 아가씨에 대한 인상이 이 소설의 초입 부분이다. 『절창』은 주인공의 내면으로 들어가 풀어내는 대신 누군가의 관찰과 판단, 해석을 먼저 들이밀었다. 소설이기에 가능한 아가씨의 능력 설정 역시 한없이 어두운 지점에서 출발한다. 타인의 베인 상처에 손을 대면 그 사람의 고통과 기억이 이미지처럼 흘러들어오는 능력. 이 능력은 아가씨를 그녀를 타인의 고통에 무방비로 노출시키며 원치 않는 침투를 반복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 능력은 아가씨에게 거의 쓸모가 없다. 그녀의 삶을 나아지게 하지도 선택지를 넓혀주지도 않는다.
그 능력이 필요했던 것은 오직 보스, 오언이다. 오언에게 아가씨의 능력은 이해의 도구이자 지배의 수단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 사랑은 아가씨의 의지를 존중하지 않았다. 오언에게 중요한 것은 아가씨가 무엇을 느끼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읽어낼 수 있는가였다. 그렇게 아가씨의 능력은 그의 확신에 대한 증거이자 타인을 판단하는 무기가 된다.
『절창』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는 말은 “때려죽여도 너만은 절대로 안 읽어.”였다. 이 문장은 분노의 언어라는 겉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의 상처가 타인의 확신을 위해 열리는 통로가 되기를 거부하는 선언처럼 느껴졌다. 아가씨에게 ‘읽힌다’는 것은 공감이 아니라 침해이며 이해가 아니라 폭력이었기 때문이었다.
p.97
상처가 손바닥을 닿는 순간, 편집을 거치지 않은 이미지와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어. 분명 눈을 뜨고 있는데 눈앞에 그자의 얼굴만이 아닌 다른 이미지가 깨어진 유리 조각들처럼 군데군데 삽입됐어.
p.143
아까는 조금 긴가민가 했는데, 오언의 얼굴에 다시 한번 떠오른 미소는 이번에야말로 뒷골목에서 우연히 입수한 도자기나 유화의 제작 시기며 기법이니 보존 상태에 따른 가치를 포함하여 진품 여부를 감정하는 것처럼 보였어.
p.167
말하자면 책을 읽고 반드시 무언가를 느껴야만 하는 것인지, 인간은 바로 그 지점부터 문제 삼을 수 있습니다. 그것도 일종의 고정관념과 강박의 소산 아닐까요. 독서교실 문을 닫기 전에 나를 제일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수업료 상습 체납과 자잘한 민원보다는, 쾌락이든 교훈이든 각종 시험 대비 측면에서 독서를 통해 필히 영양가로 표시될 수 있는 수준의 효능감을 얻어야 한다는 학생 보호자들의 믿음이었습니다. 그 같은 사고는 무용한 과잉에 대한 나의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했습니다.
p.184
그건 이해가 가. 인간은 원래 그런 존재야. 뭐라도 저지르지 않으면 견디지 못해서 매일 같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크고 작은 전쟁을 일으킨 다음, 전쟁터에서 녹초가 되어 침대로 돌아와선 요가 명상 사운드를 들으며 잠을 청하지.
타인의 상처에 노출된다는 것
이 부분을 읽으며 구병모 작가가 소설에서 그리는 상처는 진짜 피를 보고 겉으로 드러난 외적 상처겠지만, 어쩌면 작가가 말하는 상처는 내면의 상처를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타인이 가진 내면의 상처에 대해, 원하지 않는데 노출된다. 생각만으로도 피곤한 일이다. ‘피곤’이라는 단어를 쓰게 되면 너무 냉소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제대로 된 관계가 맺어지지 않은 채 부정적인 상처에만 노출된다는 것은 분명 잔인한 일이다.
아가씨가 겪는 고통은 상처를 ‘본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것은 이해를 거치지 않은 채 쏟아져 들어오는 이미지와 소음처럼 몸 안으로 침투한다. 상대의 상황이나 이후의 책임도 없이 오직 고통의 조각만 떠안게 되는 경험. 그 과정에서 아가씨는 타인의 상처를 일방적으로 견뎌야 한다.
기쁨은 나눌수록 배가 되고, 슬픔은 나눌수록 반이 된다. 이런 말이 익숙하지만, 막상 내가 겪은 상처에 대한 공유는 나눌수록 더 커지기도 했다. 상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연결고리가 준비되지 않은 채, 쏟아내어 버리면 버거워하기 때문이다. 상처를 안다는 것과 상처를 존중한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p.232
―더 이상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돼. 도와줄게. 나를 믿어.
그리고 마지막 한 줄로 쐐기를 박은 거야.
―네 판단이 그 사람도 구할 수 있어.
p.293
아가씨는 용서를 구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이야기가 그쪽으로 흘러가기 전에 내가 잘랐습니다. 내 남편이 그렇게 된게 완전히 아가씨 때문만은 아님을 이성으로는 인정한다고 한들 너의 죄를 사하노라고. 아가씨의 감정까지 돌봐주어야 할 의무는 없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었습니다.
p.295
애초에 바란 건 누구를 때려잡고 법의 가시광선 아래 끌어내고, 거기까지 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 이전에 일단 알고 싶었던 거라고, 확인하고 싶었다고.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p.344
그녀에게 조금 저 다가간다. 아직 닿으려면 멀었고 그 얼마 안 되는 거리가 아득하게 느껴지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을까. 상처는. 그래. 나도 아픈 거 싫어하고 다치지 않고 싶다. 상처 입는 것도 입히는 것도 안 했으면 좋겠다. 그러나 상처는. 나 이제 그녀의 선생도 무엇도 아니지만,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기에 전할 수 있을지도.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에 대한 경계
아가씨에게 손을 내밀었던 기타 선생님과 지금의 독서 선생님, 그리고 오언과 아가씨. 이 네 사람의 관계가 얽히고 또 풀리며 소설은 끝을 향해 달린다. 그 가운데 아가씨에게 ‘오언’은 어떤 존재였을까.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대상이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단순하다. 아가씨에게 오언은 나를 구해준 사람이자, 동시에 나를 가둔 사람. 고통을 덜어주는 손길이었지만, 그 손이 또 다른 고통의 시작이 되기도 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기타 선생님의 죽음과 오언의 죽음은 아가씨에게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온다. 기타 선생님의 죽음이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도덕의 문제라면, 오언의 죽음은 훨씬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다. 그것은 판단의 문제가 아니라 감정의 문제, 이해와 분노가 동시에 존재하는 상태다. 사랑했던 사람의 행위에 분노하면서도, 그 사람 자체를 완전히 부정하지는 못하는 마음.
상처를 이해하는 것과 상처 앞에서 멈추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상처가 얽힌 관계 앞에서, 우리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고 어디서 멈춰야 하는지를 묻게 된다. 소설은 독자에게 조용히 질문을 남긴 채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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