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수를 지키고 싶었던 아이

호밀밭의 파수꾼 - J.D. 샐린저

by 레토

THE CATCHER IN THE RYE

20251230_090141.jpg
20251230_090151.jpg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느 한 소년의 짧지만, 격렬한 방황의 기록이다. 주인공 홀든 콜필드는 사립학교에서 퇴학을 당한 뒤 집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뉴욕을 떠돌며 며칠을 보낸다. 그는 어른들의 위선과 거짓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에 어긋난 듯한 불안과 외로움 속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보호하려 애쓴다. 호텔, 술집, 거리, 박물관을 오가며 만나는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홀든은 세상이 얼마나 가식적인지 그리고 그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지를 느낀다.


그럼에도 그가 끝까지 놓지 않는 것은 여동생 피비와 어린아이들에 대한 애정이다. ‘호밀밭에서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게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의 마음속에는 순수함과 성장에 대한 두려움이 함께 표현되어 있었다. 이 소설은 반항적인 청소년의 이야기인 동시에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누구나 겪는 불안함과 상실감을 섬세하게 그려낸 현대문학의 고전이다.



20251230_090251.jpg
20251230_090307.jpg

p.19

“자넨? 부모님께 연락은 했나?”

“아뇨, 아직 못했습니다. 어차피 수요일 밤에는 집에 갈 테니 가서 말씀드려도 됩니다.”

“몹시 실망하실 텐데.”

“아마 그러실 겁니다. 벌써 네 번째 학교니 말입니다.”


p.38

“그 모잔 어디서 샀니?”

“뉴욕에서요.”

“얼만데?”

“1달러.”

“너 훔쳐 왔구나!”


p.47

“사실은 월요일에 영어 작문을 내야 하는데 대신 좀 써주지 않을래? 월요일까지 내지 않으면 벌을 받아야 하거든.”

“난 퇴학당했어요. 그런 내게 작문 숙제를 해 달리니, 우습지 않아요?”

“그건 알고 있어. 하지만 월요일까지 내지 않으면 벌을 선단 말이야. 우리 이제라도 좀 더 친하게 지내자. 어때, 해 줄 거지?”

나는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라도 불안감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였다.

“어떤 내용에 대한 건데요?”


p.60

스트라드레이터가 부탁했지만 나는 집이나 방에 대한 글은 쓰지 않기로 했다. 나로서는 집이나 방에 그리 큰 흥미가 없었다. 대신 동생 앨리의 손가락 없는 야구 장갑에 대해 쓰기로 했다. 그것은 작문하기에 적절한 소재였다.


p.104

셔츠를 갈아입은 동안 누이 동생 피비가 생각났다. 전화라도 걸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피비와 이야기 하고 싶었다. 아니, 꼭 피비가 아니라도 감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와도 이야기 하고 싶었다. 그러나 위험을 무릎쓰고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피비는 아직 어렸고 지금 이 시간에는 분명히 자고 있을 터였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받으면 얼른 끊을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것도 잘 될 것 같지 않았다. 아버지나 어머니는 분명히 내가 전화한 줄 알 것이다. 특히 어머니는 내가 전화할 때마다 누구인지 말하기 전에 항상 먼저 알아차렸다.


p.131

어니는 열광적인 박수를 받으며 형식적으로 인사를 했다. 굉장한 피아니스트와 같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저질 사기꾼이었다. 여기에서 사기꾼이란 속물이라는 뜻이다.


나는 어니가 불쌍했다. 자신이 어떠한 연주를 했는지도 모르고 우쭐해 있으니 어찌 그렇지 않겠는다. 그러나 그것은 어니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클럽 지붕이 날아갈 듯 박수를 쳐대는 그런 얼간이들의 잘못이 더 크다. 그런 일간들은 기회만 있으면 멀쩡한 사람을 망쳐놓는다.


p.165

그때 모리스의 주먹이 날아왔다. 나는 피하려 하지 않았다. 몸도 숙이지 않았다. 다만 배에 들어온 주먹을 강하게 느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완전하게 뻗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상태로 나는 그들이 나가는 것을 보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다.


p.193

박물관으로 가면서 나는 주머니에서 다시 그 빨간 사냥 모자를 꺼내 썼다.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날 리는 없었겠지만 날씨가 너무 추웠기 때문이었다.

어떤 사물은 언제까지나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다. 유리집에 넣어서라도 그대로 두고 싶었다. 물론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불가능이라는 것이 나를 너무 우울하게 한다.


p.203

그런데 샐리는 정말 눈치가 없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었다.

“방금 아주 신나는 일이 떠올랐어.”

오히려 더 명랑하게 나왔다. 그녀는 항상 그렇게 신나는 일만 생각하는 여자였다.


순수를 지키고 싶어 했던 소년의 기록

『호밀밭의 파수꾼』은 퇴학 통보를 받은 홀든이 학교를 떠나기 전 며칠을 보내는 이야기로 시작된다. 그는 이미 네 번째 학교에서 쫓겨난 상태지만 그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 못하고 있다. 실망할 것을 알기에 말하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기에 더 불안해진다. 이후 그는 뉴욕을 떠돌며 사람들을 만나지만 누구와도 깊이 연결되지 못한다.


홀든은 위선적인 사람들을 혐오하지만 그 이면에는 순수함이 훼손되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불안이 엿보였다. 피아니스트의 과장된 연주에 분노하고 어른들의 열광을 경멸하는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그는 진짜와 가짜를 예민하게 구분하려 하지만 세상은 그런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결국 폭력적인 현실 앞에서 그는 저항하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맞고 쓰러진다.


박물관에서 느끼는 감정은 홀든의 진짜 본심을 가장 잘 보여주었다. 변하지 않는 전시물처럼 모든 것이 그대로였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에 그는 더 방황하게 된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소년의 이야기라는 포장지를 입고 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일찍 세상의 복잡함을 알아버린 아이가 순수를 지키려 애쓰다 지쳐버린 기록이 들어있다. 그의 흔들림은 성장의 문 앞에 마주했던 우리 모두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20251230_090318.jpg
20251230_090344.jpg

p.245

그래서 생각한 것이 피비를 만나보자는 것이었다. 죽을 경우를 대비해서 어머니 아버지 몰래 말이다. 잠시 이야기라도 누눈다면 훨씬 편하게 죽을 것 같았다.


p.253

피비는 원래 잠귀가 밝았다. 덕분에 아주 쉽게 깨울 수 있었다. 큰 소리 따위는 지르지 않아도 되었다.

“피비야!”

침대에 걸터앉아 살짝 불렀을 뿐이었다.

“오빠!”

피비는 어김없이 눈을 떴다. 그리곤 벌떡 일어나 팔로 내 목을 껴안았다. 피비는 정말 정이 많은 아이다. 어린애치고 속정이 깊었다.


p.259

“아빤 오빠를 죽일거야.”

그 말만 계속 되풀이했다. 나는 아무래도 피비를 달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답답하게 머리 위로 베개를 뒤집어쓰다니.

“아무도 날 죽이지 못한다니까. 피비, 난 여기 있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할 거냐면, 얼마 동안 농장 같은 데서 일할 거야. 할아버지가 콜로라도에서 농장을 하고 계신 친구가 하나 있어. 거기 가서 일자리를 얻으면 돼.”

나는 아주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너한테는 계속 연락할 거야. 자, 이제 그걸 머리에서 치워. 응?”


홀든이 붙잡고 싶어한 순수한 존재 피비

홀든이 피비를 찾아가는 이 장면은 그의 내면이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세상과 단절하고 싶어 하면서도 완전히 혼자가 되지는 못하는 인물이다. 그는 끝내 누군가에게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 한다. 피비가 잠에서 깨어 오빠인 홀든의 품에 아무 설명 없이도 안기는 모습이 바로 홀든이 끝까지 잃고 싶지 않았던 순수함의 모습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는 늘 세상을 의심하고 사람들을 경계하지만, 피비 앞에서는 그런 방어를 내려놓는다. 그만큼 그녀는 홀든에게 안전한 세계의 흔적이다.


그러나 대화가 이어질수록 그의 불안은 더욱 선명해졌다. 아버지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는 피비의 반복된 말은 과장이지만 홀든이 느끼는 압박과 공포를 짚어낸다. 그는 더 이상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고 느끼게 되며 농장으로 떠나겠다는 말을 꺼낸다. 이 계획은 현실적인 도피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책임 없는 공간에서 상처받지 않으며 잠시 숨을 고르고 싶은 마음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끝까지 피비를 달래는 홀든. 자신이 흔들리고 있으면서도 동생을 안심시키려는 태도에서 그의 진심이 보였다. 그는 반항적인 소년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누구보다 타인의 감정을 깊이 받아들이는 아이였다. 피비를 향한 그의 태도에서 도망치고 싶어 하면서도 누군가를 끌어안고 싶어 하는 인간적인 온기가 느껴졌다. 이 소설이 놓지 않았던 희망이었다.



20251230_090407.jpg
20251230_090425.jpg

p.265

“그러니까 오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싫다는 거 아니냐고!”

피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점점 우울해졌다.

“그건 아냐. 왜 그렇게 말하니?”

“사실이니까. 오빤 어느 학교든 다 싫다고 했잖아. 아마 오빠가 싫어하는 건 백만 가지도 넘을 거야. 안 그래?”

p.270

“내가 뭐가 되고 싶은지 말해 줄까?”

나는 다른 곳을 보며 실없이 물었다.

“만약 내가 선택할 수 있다면 난 말야…….”

“뭐가 되고 싶은데?”

“너 그 노래 알지? ‘호밀밭을 걸어가는 누군가를 잡는다면’하는 노래 말야.”

“틀렸어. ‘호밀밭을 걸어가는 누군가를 만난다면’이야.”

피비가 정정했다.


아무튼 난 그 노래를 들으면 넓은 호밀밭 같은 데서 어린아이들이 노는 것이 떠올라. 어린아이들만 잔뜩 있고 어른은 아무도 없는 거지. 그러니까 어린아이들과 나만 있는 그런 풍경. 그런데 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 옆에 서 있는 거야. 어린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서 말야. 어린아이들은 놀다 보면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잖아. 그럴 때 내가 있다가 얼른 붙잡아 주는 거지. 하루 종일 그 일만 하면 돼. 그러니까 나는 호밀밭의 파수꾼인 셈이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건 그런 어야. 물론 바보 같은 생각인 줄은 알아.

나는 꿈을 꾸듯 말했다.


p.329

이제 하고 싶은 말은 다 하였다. 어떻게 집에 돌아왔고 어떻게 병이 생겼고 다음 학기에 어느 학교로 가게 되었는지는 말하고 싶지 않다.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으니 말할 기분이 나지 않는 것이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었던 이유

피비는 홀든의 태도를 정면으로 지적한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 다 싫은 거 아니냐”라는 말은 피비의 단순한 투정이 아니라 홀든의 삶의 방식에 대한 정확한 통찰이었다. 그는 늘 무언가를 혐오하고 어딘가에 속하기를 거부하며 세상과 거리를 둔다. 피비의 말처럼 홀든은 정말로 거의 모든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마음은 냉소나 반항이 아니라 지나치게 예민한 감수성에서 비롯된 방어였다.


이어지는 대화에서 홀든은 마침내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말한다. 바로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는 것. 그는 아이들이 아무 생각 없이 뛰놀다 낭떠러지로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장면은 이 소설의 제목이자 핵심 상징이다. 홀든이 지키고 싶어 하는 것은 규칙이나 질서가 아니라 아이들이 세상에 상처받기 전의 순수한 순간이다. 그리고 그 순수함이 깨진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는 그 경계에 서서 아이들을 붙잡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꿈은 처음부터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아이들은 언젠가 자라고 세상은 반드시 복잡해지며 낭떠러지는 피할 수 없다. 홀든 스스로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바보 같은 생각”이라고 말한다. 그의 말 속에는 체념이 담겨 있다. 그는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래도 누군가는 아이들을 지켜줘야 한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홀든은 더 이상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자신이 어떻게 집에 돌아왔는지, 왜 병이 들었는지, 앞으로 어디로 가게 되는지조차 말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는 여전히 불안하고 여전히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 『호밀밭의 파수꾼』은 완결되지 않은 이야기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홀든은 어른이 되지 않았고 문제를 해결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는 세상을 혐오한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이들을 다치게 만드는 방식이 두려웠을 것이다. 그는 그 두려움이라는 성장통을 겪는 중이다.


20251230_090442.jpg
20251230_090505.jpg


#호밀밭의파수꾼

#JD샐린저

#홀든콜필드

#세계문학

#고전소설

#문학감상

#책리뷰

#북리뷰

#독서기록

#독서에세이

#성장소설

#청소년문학

#순수와성장

#불안과성장

#문학으로읽는삶

#책추천

#고전읽기

#감성에세이

#독서일기

keyword
월요일 연재
이전 03화겨울에 볼만한 영화 짐캐리의 크리스마스 캐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