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세계문학전집 75
The Great Gatsby
한 달에 한두 권 정도는 꼭 고전을 읽어야지 결심하고 『싯다르타』를 시작으로 최근에는 『호밀밭의 파수꾼』을 읽었다. 다음 책을 고민하던 중 제목은 익숙하고 내용은 어설프게 알고 있지만 진짜 책을 제대로 읽은 적 없는 책들을 먼저 도전하고 싶었다. ‘아는 척하고 지나온 책들’과 제대로 마주하여 어렴풋이 '안다'라고 하는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 펼치게 된 책이 『위대한 개츠비』다. 이 소설은 흔히 ‘아메리칸드림의 몰락’이라는 한 문장으로 요약되지, 실제로 읽어보면 그보다 훨씬 섬세하고 잔인했다. 화려한 파티와 부, 사랑 이야기의 겉모습 속에는 계급의 벽과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 그리고 과거를 되돌릴 수 있으리라 믿은 한 인간의 순진한 집념이 담겨 있다. 가장 순수하게 꿈을 믿은 인물이 가장 철저히 버려진다는 사실이 오랜 여운을 주었다. 개츠비. 돈 많은 파티광이라는 그의 포장을 벗겨내면 우리가 믿어온 성공과 사랑 그리고 꿈이라는 말의 진짜 모습을 묻고 있는 한 인간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p.22
그리고 그해 여름의 역사는 내가 톰 뷰캐넌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그곳에 자동차를 몰고 간 저녁부터 시작된다. 데이지는 나의 먼 친척 여동생뻘이었고, 톰은 대학 시절부터 서로 알고 지내던 사이였다. 전쟁 직후 나는 시카고의 그들 부부 집에 이틀 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p.44
15미터 떨어진 곳에 또 한 사람의 모습이 옆집의 그림자 속에서 나타나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서서 은빛 후춧가루를 뿌려 놓은 듯한 별들을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한가로워 보아는 동작과 잔디를 굳게 딛고 서 있는 안정된 자세로 미뤄 보아, 이 지역의 하늘 중 어디까지가 자기 몫의 하늘인지 살펴보려고 나온 개츠비임을 알 수 있었다.
p.64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톰 뷰캐넌과 윌슨 부인은 얼굴을 맞대고 윌슨 부인이 데이지의 이름을 언급할 권리가 있느냐를 두고 열띠게 말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데이지! 데이지! 데이지!” 윌슨 부인이 외쳤다. “내가 부르고 싶으면 언제든지 부를 거예요! 데이지! 데이…….”
그 순간 톰 뷰캐넌이 능숙하게 손바닥으로 그녀의 코를 잽싸게 후려 갈겼다.
p.66
옆집에서는 여름 내내 밤마다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개츠비의 푸른 정원에서는 남녀가 속삭임을 주고받으며 샴페인을 사이에 두고 별빛 아래에서 부나비처럼 오갔다. 오루 만조때 나는 그의 손님들이 부진교 탑에서 다이빙을 하거나 해변의 뜨거운 모래 위에서 일광욕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p.131
내가 나가서 문을 열어 주었다. 개츠비가 죽은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로 아령이라도 쥐고 있는 것처럼 윗도리 주머니에 두 손을 깊숙이 찌른 채 슬픈 표정으로 내 눈을 응시하며 물웅덩이 속에 서 있었다.
화려한 세계에서 가장 외로운 얼굴
‘닉’에게 찾아온 그 여름의 우연. 톰과 데이지, 그리고 개츠비까지 소설 초반에 등장하는 그들의 모습은 모두 비슷해 보였다. 영혼 없는 부유층들의 모습. 이스트 에그의 화려한 집과 그들의 말투 뒤에는 다른 사람의 감정에 둔감한 태도가 숨어 있었다. 톰의 폭력은 순간의 분노라기보다 스스로 저지른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억지처럼 느껴졌다. 그는 늘 책임을 피해 갈 수 있는 쪽에 서 있었다.
개츠비 역시 부자이지만 ‘닉’의 시선에서 느껴지는 결이 조금 달랐다. 밤하늘을 바라보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이미 가진 것보다 아직 닿지 못한 무언가를 향해 있었다. 마치 꿈을 좇는 사람처럼. 개츠비의 얼굴은 가장 화려한 세계 속에서 가장 외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위대한 개츠비』를 보며 지난주에 읽은 『호밀밭의 파수꾼』 속 홀든이 생각났다. 홀든이 막연한 순수함을 꿈꾸는 사람의 상징이었다면, 개츠비는 너무도 명확하고 구체적인 순수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 꿈을 받아줄 상대의 순수함은 점점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p.132
“우린 여러 해 동안 서로 만나지 못했어요.” 데이지는 될 수 있는 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11월이면 오 년이 됩니다.”
개츠비의 기계적인 대답에 우리는 적어도 잠깐 동안이나마 당황했다.
p.146
지금 생각해 보면 물결처럼 파도치는 그녀의 음성이 열띤 흥분으로 그를 사로잡았던 것 같다. 그 목소리는 아무리 꿈꾸어도 부족하지 않을 불멸의 노래였다.
p.148
제임스 개츠―바로 이것이 그의 진짜 이름, 아니면 적어도 법률상의 이름이었다. 그는 열일곱 살 때, 진정으로 인생이 시작되던 바로 그 특별한 순간에 제이 개츠비로 이름을 바꿨다. 바로 그가 댄 코디의 요트가 슈피이러 호수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 닻을 내리는 것을 목격한 순간이었다.
p.152
정신이 멀쩡할 때의 댄 코디는 술에 취하면 자신이 곧 어떤 황당한 일을 벌일지 잘 알았다고, 점점 더 개츠비를 신임함으로써 그런 우발적인 사태에 대처하려고 했다.
그리고 개츠비는 코디로부터 돈을 물려받았다. 2만 5000달러의 유산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돈을 받지 못했다. 그는 자신에게 불리하게 적용된 법적 장치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수백만 달러의 돈은 결국 엘러 케이의 손에 고스란히 넘어가고 말았다. 그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남다르게 받은 적절한 교육뿐이었다. 제이 개츠비의 모호한 윤곽이 비로소 구체적인 인간의 실체로 채워졌던 것이다.
개츠비의 순수함에 대한 상징, 데이지
내가 가지고 있던 개츠비의 이미지는 솔직히 돈 많은 사기꾼, 허영심에 취한 파티광 정도였다. 하지만 개츠비는 사랑을 단순하게 기억하는 사람 그 이상으로 사랑을 보존해 온 사람이었다. 그래서 데이지와의 재회는 설렘으로 반짝인다는 단순한 표현보다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는 순간처럼 보였다. 그에게 데이지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개츠비가 사랑한 것은 데이지이면서 동시에 과거 그 시절 그가 생각했던 가능성이었다.
열일곱 살에 이름을 바꾸고 새로운 삶을 선택한 순간 역시 알고 보니 부에 관한 단순한 욕망에서 시작된 일은 아니었다. 더 많은 돈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나은 이야기를 가진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선택.
책을 읽지 않았다면 개츠비는 정말 억울했을 것이다. 그는 허영심에 취한 인물이 아니라 지나치게 순수하고 진지한 사람이었다. 부와 권력에 익숙한 사람들이 가득한 세상에서 이렇게까지 순수하고 진심인 사람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내용의 중반부를 지나며 그가 데이지 곁을 떠나길, 하루라도 빨리 떠나길 바라게 되었다. 그 순수함이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면서.
p.178
개츠비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 집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요, 형씨.”
“데이지의 목소리에는 신중함이 없어요. 그 애의 목소리에는 뭔가 가득…….” 내가 말했다.
나는 머뭇거렸다.
“그녀의 목소리는 돈으로 가득 차 있어요.” 갑자기 그가 말했다.
p.190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의 등을 살짝 두드려 주고 싶었다. 전에도 그런 적이 있지만 그에 대한 완벽한 신뢰감이 새삼스럽게 되살아났기 때문이다.
p.192
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화가 치밀었지만 톰이 입을 열 때마다 웃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톰은 이제 바람둥이에서 도덕군자로 완벽하게 변해 있었던 것이다.
개츠비가 잔뜩 흥분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었단 말입니다. 알아듣겠소?” 그가 소리쳤다. “그녀는 내가 가난했던 탓에 기다리다 지쳐서 당신과 결혼한 것뿐이오. 그건 아주 큰 실수였지만 그녀의 마음속으로 나 말고는 어느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던 거요!”
p.197
“당신의 ‘약국’이라는 게 뭔지 알아냈소.” 그가 우리를 향해 재빨리 말했다. “이 사람과 그 울프심이라는 작자가 이곳과 시카고의 뒷골목 약국을 여러 곳 가들여 에틸알코올을 판 거요. 그게 저 친구의 작은 재주 중 하나이지. 난 저 친구를 처음 봤을 때부터 밀주업자일 거라고 생각 했는데 크게 틀리지 않았어.”
p.210
데이지는 그가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우아한’ 여자였다.
p.217
그는 거짓 핑계로 그녀를 차지했기 때문에 자신을 경멸했을 수도 있다. 있지도 않은 수백만 달러를 가졌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뜻이 아니라, 데이지에게 고의로 안도감을 불어넣었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이 그녀와 같은 사회 계층에 속하는 인물인 것처럼 믿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를 충분히 보살펴줄 능력이 있다고 말이다. 사실 그에게는 그럴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에게는 풍요로운 가정의 뒷받침도 없었을뿐더러 그는 비정한 정부의 변덕에 때라 세계 어디에서든 갑자기 목숨이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처지였다.
p.235
개츠비 자신도 전화가 걸려 오리라고는 믿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그 옛날의 따뜻한 세계를 상실했다고, 단 하나의 꿈을 품고 너무 오랫동안 살아온 것에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고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그는 장미꽃이란 얼마나 기괴한 것인지, 또 거의 가꾸지 않은 잔디 위에 쏟아지는 햇살이 얼마나 생경한지 깨달으면서 무시무시한 나뭇잎 사이로 낯선 하늘을 올려다보며 틀림없이 몸서리를 쳤을 것이다.
p.258
“부주의한 운전자는 또 다른 부주의한 운전자를 만나기 전까지만 안전하다고 당신이 그랬지요? 그래요, 나는 또 다른 서툰 운전자를 만났던 거예요. 안 그런가요? 내 말은요, 그렇게 잘못 추측하다니 나도 참 부주의했지요. 난 당신이 오히려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게 당신의 은밀한 자부심이라고요.”
p.260
모든 것이 경솔하고 뒤죽박죽 혼란스러웠다. 톰과 데이지, 그들은 경솔한 인간들이었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부숴 버린 뒤 돈이나 엄청난 무관심 또는 자기들을 한데 묶어 주는 것이 무엇이든 그 뒤로 물러나서는 자기들이 만들어 낸 쓰레기를 다른 사람들이 말끔히 치우도록 했다…….
좌절이 되어 돌아온 여름, 진심이 설 자리는 없었다.
소설의 후반부에 다다르자, 닉의 좌절감은 자연스럽게 나의 감정으로 옮겨왔다. 개츠비의 꿈이 무너지는 과정은 그리 갑작스럽지 않았다. 이미 그의 꿈의 상징이던 데이지, 그녀의 세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고 난 뒤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우아함과 매력은 개인의 선택이라기보다 돈과 계급이 만들어 낸 분위기에 가까웠고 그 앞에서 개츠비의 순수함은 점점 설 자리를 잃어 갔다.
개츠비는 끝까지 진심이 담긴 사랑이라면 시간을 거슬러도 변하지 않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속한 세계는 믿음보다는 조건으로 움직였다. 재산과 사회적 안전망 같은 것들이 책임을 대신해 주었다. 톰과 데이지는 그 보호막 안에서 무수한 파괴를 저지르고도 아무 일 없다는 듯 물러날 수 있었다. 반면 개츠비는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자신의 선택뿐 아니라 타인의 잘못까지 떠안아야 했다.
닉이 느낀 분노와 환멸은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 투영된 세상이 어떤 사람을 버리고 또 어떤 사람을 남겨 두는지에 대한 냉정한 인식이었다. 단순한 개인적 감정에 국한되지 않았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은 슬픔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허탈했다. 지나치게 순수했고 지나치게 진심이었던 한 사람의 실패 때문이 아니라, 그런 진심을 끝내 받아들이지 못한 사회의 냉정한 얼굴을 똑바로 마주 봐야 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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