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니와 클라이드의 포위된 밤

밤새 여진이 있었어- 최필립

by 레토

타이피스트 시인선 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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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필립 시인의 시집 『밤새 여진이 있었어』남들은 눈치채지 못하는 내면의 ‘여진’을 우리가 여전히 살아있다는 증거로 보여주었다. 무너진 세계를 억지로 세우기보다 그 잔해 속에 남은 온기를 포착하는 시인의 시선이 기억에 남았다. 고요한 밤, 홀로 남겨진 작은 진동에 귀를 기울이고 싶은 분들께 권하고 싶다. 일상의 균열을 파고드는 시어들이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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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12

밤새 여진이 있었어

밤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편할 텐데 여긴 섬이고 우리뿐이야 영원히 눈을 감지 않아도 돼 모든 믿음이 상실되는 시간 다이아몬드들이 하늘에서 춤을 주고 장난감 병정이 하나둘 문을 얻고 들어오면 하다가도 손을 흔들어 줘야 해 침잠하는 불빛을 손에 그러쥘 수 있어야 해 만조와 간조를 반반씩 섞어 칵테일을 만들어 줘 한숨에 들이켜 버리자 질식할 것처럼 가장 무책임한 표정을 지으며 붙잡히자 (우리 가장 멋진 장난을 치자) 나는 보니 너는 클라이드 포위된 밤들이 한순간에 지나가면 트렁크에서 훔친 것들이 쏟아지고 가령 너의 차가운 눈빛이나 장티푸스에 걸려 죽은 나의 영혼 같은 것들 밤새 여진이 있었어 너는 못 들었겠지 여긴 우리뿐이니까 몸에 가득한 주저흔은 칼날이 흔들린 만큼 남아있고 영원히 집에 갇힌 사람들이 울부짖고 저 중에 우리가 낳고 기쁜 아이도 있을까 물에 빠진 그림자를 주워 베인 곳에 밴드처럼 덧댔을까 야자수 너머로 유성우가 쏟아지고 있어 이게 마지막이야 마지막 도둑질이야 네 심장을 훔쳐서 똑딱 시계로 만들 거야 두근대다가 총알이 파바박 떨어져 나오겠지 포위된 밤은 영원히 포위된 상태로 유일하게 우리의 것이 아닌 채로


보니와 클라이드, 포위된 밤의 기록

솔직히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행 구분도 없이 빽빽하게 채워진 글자가 ‘시’라기보다는 짧은 줄글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게 정말 시가 맞을까?' 하는 의심 섞인 편견도 생겼다. 하지만 찬찬히 다시 읽어보니 시인이 왜 굳이 이런 '덩어리'를 내밀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숨 쉴 틈 없이 이어지는 문장들이 마치 멈추지 않는 밤의 떨림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형식을 따지기 전에 그저 이 글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그대로 느껴보기로 했다.


시를 읽고 마치 한 편의 재난 영화를 본 듯한 강렬한 여운이 남았다. 큰 폭풍이 휩쓸고 간 뒤, 무너진 세상에 단둘이 남겨진 연인의 이야기? 세상이 다 망가졌거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절박한 고립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를 유일한 구명줄처럼 붙잡고 있다. 그 모습은 마치 내일이 없는 것처럼 도망쳤던 영화 속 2인조 강도 ‘보니와 클라이드’를 떠올리게 했다. 이미 몸과 마음은 상처투성이지만 서로의 심장을 훔쳐 똑딱 시계로 만들며 장난스럽게 이 비극을 견디려 애쓰는 모습이 애틋하기까지 했다.


여진. 큰 사고는 끝났어도 땅은 계속 미세하게 흔들린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 큰 슬픔이 지나간 후에도 마음속 진동이 쉽게 멈추지 않듯이 남들은 눈치채지 못하지만 밤새도록 이어지는 떨림과 불안이 존재한다. 어둡고 차갑지만, 한편으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밤의 기록은 마음의 상처 입은 채 하루를 버티는 우리 모두의 모습과 참 많이 닮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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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80

흔들의자 위에 떠오른 별자리

난 그냥 쳐다만 봐요

사람이 되자 청유로 불러도

기도하지 않은 연락은 대기처럼 뭉치고

팔에 안긴 아이가 남자의 옷깃에 스친다

스프링이 엉킨 침대가

건물 밖으로 추락하고 있다

반짝이는 유리 결정이

머리맡에 쏟아졌다

여름 호수는 두 번째 응시

우유니가 성자들의 무덤이 될 때

다시 똑같은 천장

다른 얼굴이 초점에 부딪히고

우리는 직각으로 꺾여

솜사탕이 녹아내리는 걸 보고만 있어

퀼트를 짜는 밤

우리는 바늘처럼 사라질 거야

애원의 꼬리표를 붙이는 동안

작은 낙타가 녹슨 철문을 열어 줄 거야

달리고 있디

속도를 느끼며

차장 밖으로

소금 결정이 나리고

사랑이 된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고


아이라는 별자리를 품고 달리는 ‘편도 열차’

처음엔 그저 흔들의자에 앉아 별을 바라보는 평온한 시인 줄 알았다. 하지만 문장을 따라가다 침대가 추락하고 유리 결정이 쏟아지는 낯선 풍경을 만나게 되었다. 시인은 우리가 솜사탕처럼 녹아내리고 바늘처럼 사라지는 연약한 존재라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허무함 속에서도 소금 결정 같은 투명한 사랑을 찾아낸다.


시의 중간쯤, '팔에 안긴 아이가 남자의 옷깃에 스친다'라는 구절에서 왠지 모르게 아이을 처음 품에 안았던 그날의 떨림과 쑥쑥 자라 이제는 제법 듬직해진 아들의 온기가 동시에 떠올랐다. 시의 마지막 문장처럼, '사랑이 된 사람들은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 같다. 나 역시 아들을 낳고 기르며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를 나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게 된 순간, 그전의 가볍고 자유로웠던 '나'로 돌아가는 문은 영영 닫혀버린 셈이다.


하지만 그게 전혀 슬프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시의 표현처럼 솜사탕이 녹아내리고 우리가 바늘처럼 사라지는 허무한 세상이라 할지라도 '아이'라는 별자리를 품고 달리는 지금의 내가 훨씬 더 단단하고 따뜻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사랑이란, 이전의 나를 기꺼이 버리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여행을 떠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은 한 사람을 완전히 다른 세계로 데려다 놓는 ‘편도 열차’ 같은 존재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린 대신, 아이의 눈동자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사랑이 된 사람'의 운명을 나는 기쁘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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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90

성춘향은 이몽룡을 모른다

성춘향과 이몽룡은 가끔 동일 인물이다

다른 끔을 쿠다가 모르는 유원지의 카페에서 만났다

성춘향은 그네를 타다 자주 커피를 엎지른다

바닥에 얼음이 구르다 원두처럼 녹아내리지

그들은 과거에 멈춰 있었고

어떤 품종은 계수나무 아래에서만 자라서

공간 속에 품어 나가는 것, 그러나 관측되지 않도록

수학적 거세를 이어 나가며

머리 없는 뿔로 피카소를 들이받았지

성춘향은 이몽룡을 더는 모른다

망각은 피카소가 유명해지는 데 걸린 시간보다 빨리 지나가서

기억을 한 번에 들이켜 버리자 유영의 속도를 줄여 나가며

목구멍에 처넣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만

이몽룡은 고대의 책에서 공룡으로 등장한 바 있다

거울을 이해하지 못하면 화석이 돼야 해

뷰파인더에 잡힌 성춘향은 이족 보행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얼굴을 매만져도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있나

수학자가 계산기를 두드린다

성춘향과 이몽룡의 탄소 연대를 측정 중입니다 규모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요

라이브 카페에서 내가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

음악에 맞춰 둘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사랑의 탄소 연대 측정기

이 시는 제목부터가 좀 도발적이었다. 성춘향은 이몽룡을 모른다. 영원한 사랑의 대명사들이 이 시 속에서는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는 낯선 타인, 혹은 박물관의 전시물처럼 등장한다. 공룡으로 등장한 이몽룡. 한때는 뜨겁게 살아 숨 쉬었을 사랑도 시간이 지나고 망각의 늪에 빠지면 결국 거대한 뼈만 남은 공룡 화석처럼 변해버린다는 비유가 눈에 들어왔다. ‘거울을 이해하지 못하면 화석이 돼야 해’라는 말은 변화하는 시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만 머물러 있는 존재들의 서글픈 운명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의 끝에서 색소폰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그들의 모습은 조금 특이한 위로를 주었다. 비록 우리가 서로의 얼굴을 잊고 과거의 사랑이 공룡처럼 멸종했을지라도 오늘 우리가 마주한 유원지의 카페에서 다시 새로운 박자로 춤을 출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뜻일까? 고전의 해체와 공룡의 이미지가 결합 된 아주 특이한 시였다. 현대적이고 감각적인 '사랑의 탄소 연대 측정기' 라는 이름을 붙여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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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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