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foster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투명한 문장 속에 가슴 시린 다정함이 담겨 있는 소설이다. 가난한 집을 떠나 킨셀라 부부에게 맡겨진 한 소녀가 생애 처음으로 온전한 사랑과 돌봄을 경험하며 성장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작가의 절제된 언어가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오히려 인물들의 침묵 사이에서 더 큰 울림을 느끼게 한다. 타인이 건네는 따뜻한 진심이 한 아이의 세계를 어떻게 구원하는지 아름답게 보여주었다. 짧지만 여운은 길게 남는 이야기였다.
p.17
아빠가 나를 여기 주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p.27
“비밀에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했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p.30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p.47
킨셀라 아저씨가 말했다. “나한테 애가 없다고 해서 다른 집 애들 머리에 비가 떨어지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지.”
다정함이라는 낯선 온기가 얼어붙은 내면을 녹일 때
좋은 어른이 주는 다정함을 처음 접해보는 소녀.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은 소녀의 감정의 시작이 인상적이었다. 겪어보지 못한 온기가 좋은 것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가 있을까. 소녀가 겪는 경계의 불안과 투명한 다정함의 발견. 낯선 환경에서 이전의 자신과 변화할 자신 사이의 혼란을 느끼던 소녀는 비밀이 없는 곳에 부끄러움도 없다는 킨셀라 부부의 철학을 통해 비로소 안도감을 얻게 되었다.
특히 아빠의 흔적이 지워진 깨끗한 물의 맛은 방임과 결핍으로 가득했던 과거를 지나 어떤 보상도 바라지 않는 어른들의 환대 속에서 비로소 맑아지는 아이의 내면을 상징하는 느낌을 받았다. 소녀를 소유의 대상으로서가 아닌 존재 그 자체를 보호하는 킨셀라 부부의 마음이 소녀에게 생애 처음 진정한 안식처를 선물했다.
그 누구보다 소녀의 마음에 공감이 갔다. 아버지의 소유물로 여겨졌던 어린 시절이 아직 상처의 시간으로 남아있기에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던 다정한 어른의 존재, 그러나 끝내 성인이 될 때까지 나는 만날 수 없었던 그런 어른의 존재. 소녀가 킨셀라 부부에게 마음의 위안을 받는 장면은 내 과거에도 작은 치유가 되어주었다.
p.63
옷장에 아직도 그 애 옷이 걸려 있어?
나는 모근 질문에 쉽게 대답하지만, 마지막 질문에 막힌다.
“그 애 옷이요?”
“그래.” 밀드러드 아주머니가 말한다. “개방에서 잔다고 했으니 당연히 알겠지. 못 봤니?”
p.69
마당을 비추는 커다란 달이 진입로를 지나 저 멀리 거리까지 우리가 갈 길을 분필처럼 표시해 준다. 킨셀라 아저씨가 내 손을 잡는다.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p.73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상대를 보호하는 성숙한 언어, 다정한 침묵
말을 아끼라는 아저씨의 조언. 단순히 비밀을 지키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필요한 말로 서로에게 상처를 내지 않는 법, 즉 침묵으로 상대를 보호하는 성숙한 어른의 태도를 가르쳐주었다. 소녀는 이 다정한 침묵 속에서 타인과 깊이 연결되는 법을 배우며 자신만의 단단한 내면을 쌓아 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지인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을 할지 말지 망설이게 되는 상황이 온다면, 그럴 땐 무조건 하지 않는 것이 옳다. 말은 줄이면 줄일수록 더 좋다. 살면서 깨달은 가장 큰 교훈이다.” 전적으로 동감했다. 그리고 마음 한편이 살짝 찌릿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살면서 나 역시 얼마나 불필요한 말을 했을까?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내 마음 편해지자고 했다가 상대방의 마음을 무겁게 했던 경험. 지금에야 나이가 들면서 소위 눈치라는 것이 생기고 쌓여 주변 사람들의 표정이나 분위기를 살펴 가며 말하지만, 어릴 때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우선이 될 수밖에 없다. 조용한 적막감을 견디지 못해 불필요한 말을 자꾸 꺼내기보다 정적 사이 침묵의 시간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서로 간의 신뢰가 필요할 때가 되었다.
p.79
“우리처럼 나이 많은 가짜 부모랑 여기서 영영 살 수는 없잖아.”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 오른다.
p.83
킨셀라 아주머니는 오란 비누와 세수수건, 머리빗을 준다. 물건을 하나하나 모으면서 나는 우리가 함께한 나날을 우리가 물건을 샀던 곳과 이따금 나누었던 대화를, 그리고 거의 항상 빛나고 있던 태양을 떠올린다.
p.96
자갈 진입로에서 자동차가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와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어느새 나는 내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하고 있다. 생각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나는 선 자세에서 곧장 출발하여 진입로를 달려 내려간다. 심장이 가슴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p.98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가장 간절한 진심으로 불러낸 진짜 이름, 아빠
소녀는 가짜 부모라는 차가운 현실을 마주하며 오랜 시간 억눌러온 눈물을 터뜨렸다. 익숙한 물건들에 깃든 기억을 뒤로하고 헤어져야 하는 순간, 소녀는 본능적으로 달려갔다. 가슴이 아닌 손에 쥔 듯한 심장은 소녀가 바치는 가장 간절한 진심이었다.
마지막 장면에 킨셀라 아저씨의 품에 안겨 내뱉은 ‘아빠’라는 외침은 생물학적 관계를 넘어선 진정한 유대와 사랑에 대한 선언으로 보였다. 비록 짧은 여름은 끝났지만, 소녀가 얻은 다정함의 온기는 이제 영원히 그녀의 내면에 살아 숨 쉬게 될 것이다.
명확히 나와 있진 않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소녀가 부른 아빠는 뒤따라오는 친아버지를 향한 경고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안아준 킨셀라 아저씨를 향한 진짜 이름을 찾아준 것이 아닐까? 소녀의 이 마지막 외침이 소녀에게는 해방을, 읽는 나에게는 가슴 저린 대리 만족을 주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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