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현왕후의 회빙환을 위하여 - 현찬양
현찬양 작가의 『인현왕후의 회빙환을 위하여』는 위즈덤하우스의 단편 위픽 시리즈 53권으로 역사 속 실존 인물과 고전 속 캐릭터를 현대적 감각으로 엮어낸 퓨전 사극이다. 폐위된 인현왕후의 몸에 고전 소설 <사씨남정기>의 주인공의 영혼이 빙의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인내의 상징을 대표하던 두 여성이 만나 현대 웹소설의 흥행 공식인 '회빙환 (회귀·빙의·환생)'을 통해 자신들만의 진정한 해피엔딩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p.7
중전 장씨의 저주로 인해 폐비 민씨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사실은 경복궁 사람들에게나 한양 사람들에게나 공공연한 비밀이다. 장씨가 보낸 의심스러운 과자를 먹고는 건강하던 폐비가 사흘 밤낮을 끙끙 앓더니만 결국은 숨이 멈추었다가 한 식경 만에 다시 깨어났다는 것이다.
지나친 투기와 패악으로 임금에게 버림받을 정도였으니 폐비 민씨의 성정이 악독하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있던가. 한데 되살아난 민씨는 순하고 착했으며 무엇보다 이전의 기억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아 그를 모시던 정상궁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심지어는 입맛이며 의복 취향, 말투까지 바뀌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라고 하겠다.
사람은 죽을 때가 되어야만 성정이 바뀐다고 하니 이것이야말로 그가 죽었다 살아났다 말할 수 있는 확실한 증좌가 아닐 수 없으리라.
p.9
조보를 쥔 민씨가 가볍게 손을 떨었다. 악독하다니 누굴 두고 하는 말인가. 투기? 패악질? 살아생전 한 번도 그런 단어들과는 친하게 지내본 일이 없기에 민씨는 당혹스럽기만 했으나 그를 보는 정상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닙지요.”
p.12
사실 민씨의 기억에 ‘민’이라는 것은 자신의 성도 아니었다. 그가 알기로 자신은 사씨였는데 적어도 그의 기억은 그랬다는 소리다. 며칠 앓고 일어났더니 이전에 알고 있던 모든 것은 다 허상이 되었고 난생처음 보는 사람들이 이곳이 현실이라 하니 그가 사씨였던 때의 일들을 어쩌면 꿈이었는가 환상이었는가.
유치한 듯 끌리는 이색 퓨전 사극
우선 책의 제목에 나오는 회빙환이 뭔지 궁금했다. 회귀물 할 때 스 ‘회’자를 쓰고 있는 건 맞는데……. 찾아보니 회빙환은 회귀·빙의·환생을 뜻했다. 요즘 드라마나 소설에 가장 자주 활용되는 소재. 식상한 것 같지만 대부분의 작품들이 나올 때마다 어느 정도 인기를 끄는 장르다. 소설로 이렇게 직설적인 회빙환은 처음 보았다. 약간 유치한 것 같으면서도 인형왕후와 사씨남정기라는 익숙한 인물 설정이 호기심을 자극했다.
장씨의 저주로 죽었다 살아난 폐비 민씨의 몸에 고전 사씨남정기의 주인공 사씨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전제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사씨가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은 단순한 빙의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이는 가부장제적 서사 속에서 인내하는 현모양처 사씨와 희생된 폐비 민씨라는 수동적 틀에 갇혀 있던 두 인물이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책의 도입부는 타인이 정의한 나의 모습을 거부하고 현대적 키워드인 '회빙환'에 힘을 얻어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주체적 여성 서사의 시작이었다. 역사와 허구를 교차시켜 인물의 입체성을 확보한 영리한 설정이 돋보이는 구간이었다.
p.18
문이 열리고 아정이 들었다.
이 아이는 사촌 오라비인 민진후의 아이, 민아정이다. 자신처럼 어릴 적에 어머니를 잃고 이 큰 집에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다. 물론 하인들은 많지만 어디 그들이 외로움을 달래주던가.
p.25
“남의 몸으로 어찌 행복해질 수가 있단 말인고?”
꽤 핵심을 찌르는 질문이라 생각했는데 아정은 세상에 그처럼 멍청한 소리는 처음 들어본다는 듯이 입을 비죽였다.
“그야 행복한 상황에 있으면 행복한 것이지 누구의 몸인들 무엇이 중요하겠어요?”
나무 사이의 길을 보며 내 행복을 선택하자.
주인공의 조카 아정은 소설 속 회빙환 공식을 전파하는 안내자이자 주인공 사씨의 정서적 동반자로 사씨의 근본적인 고뇌를 깨뜨린다. 남의 몸으로 어찌 행복해질 수 있느냐는 주인공의 윤리적 의문에 아정은 행복한 상황에 있으면 그만이라며 명쾌하게 대답한다. 이는 가부장제와 고전적 가치관에 갇혀 인내만 하던 사씨가 '지금 여기'의 행복을 주체적으로 선택하게 만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정체성의 본질보다 삶의 실질적 만족을 우선시하는 아정의 현대적 시각이 보이는 대목이었다.
얼마 전 남편이 유튜브 영상을 하나 보냈다. 사이먼 사이넥이라는 사람이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해야 하는 이유라면 강연을 하는 내용이었다. 스키를 타며 나무를 보면 나무로 가게 되지만 나무 사이의 길을 보며 그것에 집중하면 나무 사이의 길로만 가게 된다. 장애물을 보면 그것에 집중하게 되고 계속 그리로 향하게 된다는 내용. 결국 우리의 모든 삶은 선택 앞에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아정이 사씨에게 전한 메시지도 이런 것 아니었을까? 행복을 주체적으로 선택해야 한다는 핵심. 소설 속 주인공이나 현실의 나와 다를 건 없다. 우리의 삶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다. 장애물을 보고 그쪽을 향해 돌진하기보다 내가 살고 싶은 하루, 내가 살고 싶은 인생을 조금씩 그리며 앞으로 천천히 나가보자. 내 상황을 내가 어떻게 여길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p.28
여인으로 태어나 해야 할 도리나 며느리로서, 아내로서, 혹은 딸로서 해야 하는 수십, 수백 가지가 있었다. 여자의 희생이 가문을 일으킨다고 배웠는데 이제와서 가문의 융성과 남편의 행복이 아니라 ‘나’의 행복만을 생각하라니. 낯선 것은 물론이고 지나치게 이기적이라는 마음 때문에 죄책감까지 느껴진다.
p.64
아정이 아무리 똑똑해진들,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사상을 갖게 된들 상관없다. 그의 지식을 쓰려는 사람도, 그에게 지식을 기대하는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정이 영특할수록, 책을 많이 읽을수록 그는 확실히 불행해지리라.
p.101
“어떤 여자들은 말이야,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더군, 아무것도 모르는 10대 초반에 혼인을 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 아기를 만들면서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까닭은 호기심 때문이야. 가만히 앉아 있는 것보단 한 걸음 내디뎌보는 것이 여자의 본성이거든. 그것은 본 적도 없는 금강산에 올라가 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 같아. 하지만 미지의 것은 손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미지의 것이 아니니 언제까지나 더 원하게 되지. 더 큰 산. 더 큰 시련. 더 커다란 고난……. 어쩌면 여자들이 불행해지는 이유도 그놈의 호기심 때문인지도 모르겠어. 하나 사람이 어찌 정해진 길로만 가겠는가. 행복에는 모험이 필요한 법일세.”
p.107
“자네 말이 맞아. 어쩌면 불행해질지도 모르지. 하지만 가지 않는다면 확실히 불행해질 거야.”
사씨는 환하게 웃었다. 이전의 민씨에게서는 볼 수 없었던 크고 당당한 웃음이었다. 사씨의 말투는 이제 소설 속 사람 같지 않았으며 누가 보아도 완연히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왕비 같았다.
가지 않는다면 확실히 불행해질 거야
아정의 영특함을 보며 느끼는 서글픔은 당시 여성들에게 독서와 지식이 어떤 의미였는지를 보여주었다. 세상을 바꿀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에서 지식은 해방의 열쇠가 아니라 현실의 벽을 선명하게 보게 만드는 불행의 돋보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는 것이 힘일까? 아니면 병일까?
역사 속 여성들이 견뎌온 고난을 수동적인 인내가 아니라 미지에 대한 호기심과 모험으로 정의하는 부분은 이 소설의 영리한 재해석 중 하나였다. 처음 보는 사람과 혼인을 하고 아기를 낳는 삶의 격한 변화를 모험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고전 속 인물들에게 현대적인 생명력을 불어넣어 주었다. 행복에는 모험이 필요한 법. 안전한 울타리 안에 머무는 것이 곧 행복은 아니라는 점이 명확해졌다.
이야기의 끝으로 가면 사씨가 드디어 소설 속 박제된 인물에서 벗어나 현실의 주체로 거듭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주인공이 내린 결론은 명확했다. “가지 않는다면 확실히 불행해질 거야.” 많은 사람들이 실패가 두려워 변화를 망설이지만 현찬양 작가님은 정체된 삶 자체가 이미 실패라고 말한다. 주인공 사씨가 소설 속 인물의 말투를 벗어던지고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왕비처럼 당당하게 웃는 모습은 그녀가 드디어 정해져 있던 삶의 결말을 찢고 나와 자기 인생의 저자가 되었음을 보여주었다.
#인현왕후의회빙환을위하여 #현찬양 #위즈덤하우스 #위픽 #서평 #독서기록 #회빙환 #퓨전사극 #소설추천 #사씨남정기 #인현왕후 #주체적인삶 #행복의선택 #인생의저자 #사이먼사이넥 #여성서사 #내면의힘 #독서통찰 #북스타그램 #오늘의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