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마주한 파도를 사랑하는 법

마음이 울릉울릉 - 임효은(울릉공작소)

by 레토

우연히 여기는 울릉도, 어쩌다 저는 주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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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의 복잡한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울릉도에 살게 된 임효은 작가님의 울릉도 정착기가 담긴 에세이다. 단순히 스쳐 지나가는 여행자의 시선이 아니라, 삶의 터전을 옮긴 정착민의 눈으로 바라본 울릉도의 진짜 모습이 담겨 있다. 책 속에는 엄청난 적설량의 겨울과 눈부신 여름 바다 등 울릉도만의 독특한 자연이 묘사되어 있다. 또한, 낯선 외지인에게 무심한 듯 따뜻하게 손을 내미는 섬사람들과의 다정한 에피소드도 만날 수 있었다.


요동치던 마음이 섬의 일상을 통해 서서히 평온을 찾아가는 과정은 잔잔한 마음의 위로를 전해주었다. 작가님이 저자가 직접 촬영한 아름다운 사진들과 담백한 문체 덕분에 새로운 곳에 도전하는 용기와 어디서든 나답게 사는 법을 고민하게 만드는 매력적인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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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울릉도

p.14

마침 적금이 만기되어 취직하느라 못 해본 ‘내일로 여행’을 떠나 기차를 타고 이리저리 유랑하며 자의반 타의반 휴식을 즐겼다. 그때였다. 제주도에서 무 농사를 하며 한 달 살기를 함께했던 언니가 ‘나의 첫 번째 울릉살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 모집 공고를 나에게 알려준 것이.

p.23

도동항을 감싸고 있는 돌산은 척 보기에도 거칠고 험준해 보였다. 네 시간을 넘게 울렁거리는 배에 앉아서 멀미를 안 하려고 기를 쓰다보니 너무 피곤하고 정신이 몽롱했다.

p.27

아침에 일어나서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테라스에서 커피를 내려 마셨다. 숙소 앞 바다는 무척 투명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바닷속 바위가 훤히 보였다. 바다가 푸르고 투명해서 하염없이 물속을 들여다보았다.

굳이 어딜 가지 않고 숙소 안에서 보내는 일과만으로도 울릉도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p.41

누군가는 떠나지 못했고 누군가는 돌아오지 못한 이곳에 자발적으로 머무는 내가 누구보다 자유로운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머나먼 섬에 고립된다는 건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낭만적인 일이기도 하지 않을까.

p.56

울릉도에서 한 달은 눈 깜작할 새에 지나갔다. 차로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 반밖에 걸리지 않는 그 작은 섬을 한 달이나 있으면서 남들 가본 곳이나 동네 사람들만 아는 곳이나 다 가보고도 아직 어딘가 부족한 것 같았다. 2박 3일 정도 있었으면 차라리 가볼 만한 곳은 다 가봤으니 굳이 한 번 더 가볼 필요는 없는 곳 정도로 남았을 거다.


완벽한 설계보다 우연이 필요한 경우

책의 초반부를 읽으며‘어쩌다’라는 단어가 주는 우연성과 ‘한 달’이라는 나름의 긴 시간이 만들어내는 연결고리를 생각하게 되었다. 작가님은 적금 만기와 지인의 추천이라는 사소한 계기를 놓치지 않고 울릉도라는 험준한 섬에 도전했다. 네 시간의 멀미와 거친 돌산을 견디고 마주한 것은 테라스 아래 투명하게 비치는 아름다운 바다였다.


2박 3일의 관광이 단지 장소를 소모한다면 한달살이는 그 공간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남들 가본 곳 다 가보고도 아직 어딘가 부족한 것 같다’라는 작가님의 고백에서 하나씩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여행이 아닌 삶으로서의 여행이 주는 여운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머릿속에 정확한 지도가 그려지지 않으면 사실 쉽게 발을 떼지 못하는 편이다. 나이가 들며 더 신중해진 건지 아니면 내 원래 성격이 이런 건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서 ‘어쩌다’ 흘러 들어온 공고 하나에 마음이 움직여 훌쩍 섬으로 떠난 작가님의 발걸음이 참 부럽게 느껴졌다.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것도 완벽한 도전 정신이 아니라 우연히 찾아오는 작은 균열들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는 무던함이 아닐까?


신중함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세상을 관찰하는 지금의 나 역시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언젠가 마음속 테라스에서 투명한 바다를 그저 들여다보고 싶은 순간이 온다면, 그때는 머릿속 설계를 잠시 접어두고 ‘어쩌다’ 마주친 바람에 몸을 실어 봐도 좋지 않을까? 그 섬이 울릉도이든, 혹은 일상의 작은 변화이든 상관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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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 울릉도 정착기

p.66

시골에서 집을 구하는 건 부동산 애플리케이션으로 시세를 파악하며 집을 찾아보던 도시와는 전혀 다른 세계의 일이었다. 들어갈 수 있는 집이 있기는 한지, 누구에게 물어봐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은 희뿌연 안개 속을 걷는 것 같았다.

p.100

울릉살이 운영이 쉽지만은 않았다. 단순한 숙박업이 아니라 타지에 중장기적으로 살아보는 취지의 프로그램이라 매일 이불 빨래를 하진 않아도 되었지만 펜션 주인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체험했다.

p.106

울릉도의 여러 기관에서도 여러 기회를 주셨다. 현포에 있는 한국해양과학기술원 내 울릉도독도해양연구기지 김윤배 박사님 기획으로 울릉도 독도에서 서식하는 해양생물로 마그넷을 만들기도 했다.

p.142

기념품이 많지 않은 울릉도에서 내가 만든 제품은 예상보다 판매가 잘되었다. 직접 찍은 사진과 그린 그림으로 만든 엽서를 시작으로 키링, 메모지, 파우치, 유리잔 등 물건이 하나씩 늘어났다. ‘이게 팔릴까?’라고 고민하며 자신 없게 기념품을 놓았지만 다행히 다 팔리곤 했다. 물건을 더 채워 넣을 때면 조금 더 열심히 해봐야지 하고 용기를 얻었다.


안개 속을 걷는 정착의 무게

도시에서는 어플로 부동산 시세 파악이 가능했는데 이런 방식이 통하지 않는 시골에서 집을 구하는 일은 마치 희뿌연 안개 속을 걷는 것과 같았다. 낭만적인 여행자의 시선을 넘어 한 명의 생활인으로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려 하는 작가님의 노력이 느껴졌다. 처음이라 낯설면서도 지겹도록 반복되는 펜션 운영의 고단함을 견디며 울릉살이를 해나가는 과정은 울릉도가 특별한 공간을 넘어 일상적 삶의 현장이 되어가는 과정처럼 느껴졌다.

이게 팔릴까? 라고 의구심을 가지면서도 직접 찍은 사진과 그린 그림으로 엽서와 마그넷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은 작가님의 용기가 멋있었다. 불확실성이라는 안개를 뚫고 자신이 만들어낸 물건이 누군가의 손에 쥐어질 때 얻은 응원의 다짐은 도전을 망설이는 나 같은 사람에게도 함께 잔잔한 응원을 건네는 듯했다.


그동안 국내 이색적인 자연이라고 하면 제주도만을 떠올리곤 했는데 작가님이 묘사한 울릉도의 거칠고도 투명한 바다를 마주하고 나니 나도 울릉도라는 낯설고 험준한 섬을 경험해 보고 싶어졌다. 만약 울릉도에 가게 된다면 작가님이 제작한 해양생물 마그넷을 종류별로 소중히 모아오고 싶다. 냉장고에 붙여두면 그 작은 마그넷들을 볼 때마다, 안개 속에서도 꿋꿋이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낸 작가님의 단단한 마음이 떠오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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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살이의 기쁨과 슬픔

p.214

나처럼 울릉도에 자발적으로 이사 온 이웃들 중에는 캠핑이 유행하기 전부터 이미 오랜 시간 등산을 하고 텐트에서 잠을 자는 게 익숙한 사람이 많다. 그들이 울릉도에 올 수 있던 것도 육지에서 배낭 하나 메고 떠나던 습관이 몸에 배어 있기 때문일지 모른다.

p.220

저녁에 뭘 먹을지 고민하던 어느 날, 콩나물무침을 꼭 먹고 싶다는 생각에 천부 강남마트로 달려갔다. 그러나 콩나물은 고사하고 진열대가 텅텅 비어 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 화물선이 뜨지 않아서 물건 들어온 게 없단다. 현포 하나로마트, 저동 오레시피, 저동 하나로마트까지 콩나물을 팔 만한 마트 모든 곳에 전화를 해봐도 콩나물이 없다고 했다. 콩나물 2천 원어치를 사려고 차로 왕복 한 시간까지 갈 마음이었는데 아마 콩나물은 이 섬 아무 데도 없을 거라 했다. 콩나물 정도는 울릉도에서 재배하는 줄 알았는데, 모두 육지에서 들여오는 거였다. 그러니까 파도가 높으면 콩나물도 없는 것이다!

p.242

불편한 것이 많지만 생활의 편리보단 색깔없는 삭막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불편함은 조금 더 미리 계획을 세우는 지혜를 일꺠워 주었으며 기다림을 알려 주었다. 새로운 곳에서는 신선한 즐거움도 많은 만큼 그동안 몰랐던 고통도 많았다. 울릉도는 여유롭고 푸른 섬이나, 보이는 것처럼 결코 낙원은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이 내 곁에 왔다가 떠나간 이곳에서 지독하게 외로웠고 희뿌연 안개가 잔뜩 낀 미래를 바라보며 아찔한 날이 많았다. 그렇지만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삶은 그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아하는 풍경이 많은 이 동네에서 기약 없이 걸어가 보고 싶다.


콩나물 한 봉보다 소중한 울릉도의 낭만

마지막 부분은 낭만적인 여행자가 아닌 섬의 일원이 되어가는 생활인의 현실이었다. 배낭 하나 메고 떠나던 습관이 몸에 밴 이들이 울릉도에 정착했듯이 삶의 무게를 덜어내야만 새로운 세계가 열릴 것이다. 특히 콩나물 한 봉지를 사기 위해 온 섬의 마트를 뒤지다 결국 파도가 높으면 콩나물조차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작가님의 에피소드는 섬 생활의 불편한 현실을 재미있게 보여주었다.


언제든 집 앞 마트에서 원하는 식재료를 구할 수 있는 도시의 편리함이 당연해진 나에게, 왕복 한 시간을 달려도 콩나물을 구할 수 없는 상황은 울릉도의 낭만을 조금 깨뜨렸다. 하지만 생활의 편리함 대신 선택한 ‘색깔 있는 삶’은 삭막함을 견딜 수 없었던 작가님에게 불편함마저 감싸안을 만큼 포근한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준 셈이다.


울릉도는 그저 평온한 낙원의 섬은 아니었다. 지독한 외로움과 희뿌연 안개 같은 미래에 아찔해지는 날도 많았겠지만, 작가님은 ‘누구에게나 어디에서나 삶은 그럴 것’이라고 했다. 어디에 있든 삶의 고통과 불안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차라리 좋아하는 풍경이 있는 곳에서 기약 없이 걸어가 보겠다는 결심이 울릉도를 단순한 섬 이상의 공간으로 만들었다. 콩나물 한 봉지를 쉽게 살 수 없는 불편함조차 삶의 다양한 무늬로 받아들이는 작가님의 단단한 내면은 울릉도라는 섬이 선물한 가장 큰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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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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