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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준호 Jul 09. 2021

나홍진의 작가성을 논하다

<랑종> 기념 나홍진을 파고들다 -<추격자>와 <곡성> 중심으로

나홍진 감독의 영화는 무엇을 내포하고 있을까?

개요


 본 글은 ‘나홍진’을 작가주의 감독으로 선정한 이유와 그를 작가주의 감독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근거로 시작한다. 이후 <추격자>를 중심으로 나타난 나홍진의 기본적인 철학을 탐구한 후, <곡성>에서 강력하게 발현된 주제 의식을 분석한다.

(<황해>를 중심 분석 작품에
서 제외한 이유는 두 작품의 중간 지점에 놓인 영화라는 성격이 강해 대조 분석의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하여 추가 설명을 위한 작품으로 남겨 두었다.)

이후 총평을 통해 앞선 내용을 정리하며 그가 뛰어난 감독이라고 생각한 이유를 역설했다.


나홍진은 작가주의인가?


 나홍진은 2006년 <추격자>를 시작으로 <황해>와 <곡성>을 선보인 한국의 영화감독이다. 대중적이지 못한 소재(조선족, 무속신앙, 연쇄살인 등)의 영화들을 선보였지만 <추격자>와 <곡성>이 각각 5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달성했을 만큼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감독이다. 그러나 ‘작가주의의 정석’이라고 부르는 봉준호나 박찬욱 감독처럼 작가주의로
유명한 감독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작가주의가 맞는지에 대한 논의가 존재했다. 따라서 이 논의에 대한 필자의 생각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본 글에 모순적인 문제가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생각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려 한다.

필자가 나홍진을 작가주의로 생각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나홍진의 작품들은 장르의 관습을 따라가지 않는다.

<추격자>의 장르는 명백하게 스릴러지만 장르의 일반적인 관습을 따라가지 않았다. 보통의 스릴러 영화라면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에 대한 범인이 누구인지 쫓는 것에 집중한다. 하지만 <추격자>는 영화 시작부터 누가 범인인지 먼저 제시했으며 오히려 사건을 둘러싼 사회의 부조리와 권력의 부패, 피해자를 주목하는 것에 몰두한다. 살인범인 지영민 역시 일반 스릴러 영화의 절대 악(惡)과 달리 엄중호에게 붙잡혀 두들겨 맞는다던가, 자기보다 약한 여성만을 범죄의 대상으로 삼는 등 현실적이지만 관습을 파괴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살인범과 맞서 싸우며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승리하는 슬래셔 장르의 여성 희생자와 달리, 죽음을 맞이하는 김미진 역시 기존 스릴러 영화들과 사뭇 다른 양상임을 알 수 있다. <곡성>의 경우 특정 장르로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으며 각기 다른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모호한 영화이다.


나아가 나홍진 작품에 등장하는 공간이나 소품 등 사소한 장치들이 모두 감독이 내포한 상징을 가져 주제 의식을 전달하거나 효과적으로 나타내는 용도로 사용된다. <추격자>와 <곡성>의 공간적 배경을 실제 지명으로 제시한 것은 무시무시한 영화 속 사건들이 우리 주변에서도 일어날 수 있겠다 싶은 현실적 공포를 뒷받침하기 위함이었다. <추격자>의 붉은 십자가와 지영민이 십자가에 박혀 죽은 예수를 그린 것, <곡성>에서 닭이 세 번 울어야 한다는 무명의 말은 기독교적인 상징성을 나타냄과 동시에 종교에 대한 고찰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느껴진다.


 나홍진 감독이 상업성을 목표로 한 감독이었다면 어느 정도의 성공이 보장된 길이 있기 때문에 대중적인 장르를 선택하여 관습을 그대로 따라가되 서사를 조금 비틀어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홍진은 오히려 대중성 없는 장르와 소재를 선택해 전혀 색다른 이야기들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 장르의 관습 역시 따르지 않는 독자적인 노선을 선보인다.

장르가 가진 힘에 의존하여 영화를 전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불어 영화에 등장하는 사소한 미장센들까지 감독의 생각이 투영되고 있음으로 그를 작가주의 감독으로 판단할 수 있는 근거들은 충분하다고 느낀다. 그렇다면 이제 나홍진 감독이 영화를 통해 나타내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뚜렷한 현실성과 염세적인 성격


나홍진의 작품들은 모두 높은 현실성을 내포하고 있다. <추격자>와 <곡성>의 공간적 배경은 망원동과 전라남도 곡성군이다. 이처럼 실제로 존재하는 지역명을 제시함으로써 내 주변에서도 지영민 사건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다는 공포를 자아내고, 투박한 날 것 그대로의 자연 속에서 벌어지는 생생한 삶의 극한을 그려 특유의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다. 현실적인 공포와 분위기에 압도당한 관객들은 공간에 감정을 쏟게 되고 그때부터 공간에 어떤 의미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추격자>의 도시는 춥고 외로운 느낌을 주어 사회적 연대가 상실된 현실 사회를 대변한다. 남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내면에 악마를 숨겼던 지영민처럼 굳게 닫힌 문 안에 이기적인 충동과 욕구를 감춘 인간들이 즐비하다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이에게 공격당한 미진의 딸처럼 이곳은 익명의 폭력성이 난자한 악(惡)의 공간처럼 느껴진다. <곡성> 역시 외부인
의 출입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 시골의 폐쇄성과 무속신앙으로 사건을 해결하려는 어른의 무지한 믿음을 고찰하고 있다. 공간의 현실성이 공간 자체의 감정이입을 일으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에서 더 생생한 현장의 고통을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일반적인 영화들이 다루지 않았던 어두운 소재들(조선족, 연쇄살인, 무속신앙)을 소재로 채택한 것은 공간의 무시무시함을 이겨내고 서사를 바라볼 수 있도록 이끄는 현명함을 보여준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현실적인 사건들을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     


<추격자>의 경찰들은 답답할 정도로 무능하다. 서울시장 인분 테러로 인한 여론의 압박, 또 다른 연쇄살인 사건과의 혼동이 있었다고 해도 중호의 말은 무시한 채 헛수사하기 바쁘며, 결국에 미진이 죽고 마는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고 만다. 더욱 불편한 것은 경찰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중호의 타락성과 영민의 번복되는 진술 때문에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확실하게 판단할 수 없었다는 거다. 좋지 못한 여론 탓에 부담이 이만저만이 아닐 텐데 사건을 빠르게 수습하려는 부패한 권력까지 그들을 짓누른다.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소시민인 중호와 미진은 그렇게 사회의 더 큰 폭력 속에 희생당하고 만다. 일종의 정의(正義)의 사도처럼 보이는 중호 역시 불법을 저질렀고 현재도 불법 속
에 살아가는 인물로, 순수한 어린아이(영민의 조카, 미진의 딸)와 대조시켜 대물림되는 사회의 육체적•정신적 폭력의 증거로 내세운다. 악과 부조리가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있다는 것이다. 범죄자 하나 제대로 잡지 못하는 무능하고 부패한 공권력,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소시민. 나홍진의 세계는 정말이지 강한 부정의 악들로 채워진 염세적 공간이라고 느껴진다. 이 전제는 영화 속 세상의 불행과 비참함을 수면 위로 끌어올려 더 개선될 여지가 없다고 울부짖는 것과 같다. 지영민 같은 악마보다 우리 사회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부패와 폭력성이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 미진을 구원하고 영민을 체포하는 판타지를 보기 좋게 파괴한 것도 이를 강조한 것으로 생각한다.


<추격자>의 음울한 서사가 허구적 상상이라고 해도 영화의 현실성을 높여놓은 탓에 결국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도 똑같이 추악한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에 감독의 작품을 보고 나면 끝없는 무기력과 불편함, 생생한 고통이 느껴진다. 이렇게만 보면 나홍진이 우리 사회를 너무나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개선의 여지가 없다는 것은 더 나아질 방도가 없는 것이니 이 지옥 같은 사회에서 계속해서 살아야 하는가? 그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이란 말인가.

대체 정말 ‘뭣이 중헌’것일까?

감독은 <곡성>에서 그 해답을 말해주고 있다.


염세(厭世)가 발견한 또 하나의 의미


나홍진은 이 항변을 피해자 중심으로, 해답은 종교적인 메시지를 통해 보여주고자 한다. 감독이 밝혔던 것처럼 <곡성>은 피해자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정말 소중한 가까운 가족의 죽음. 이렇게나 선한 사람을 데려가다니 정녕 신은 존재하는 것인가, 신은 정말 선한 존재가 맞는가? <추격자>를 통해 인간이 모순 가득한 존재라는 걸 알리고 사회는 끝없이 생생한 고통이 난자한 곳이라고 밝혔다. 그 속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행위가 바로 ‘물음’이다. 미진이 왜 죽었어야 했는지, 효진이 왜 고통받아야 하는지. ‘왜’ 그런지 알 수 없으니 사건의 결말로 나아가려고 해도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는다. 동시에 왜 그런지 묻는 것에 관심
을 두지 않는다는 비판을 담아낸다. 종구는 무명에 사람이냐고 물었고, 이삼은 외지인에 악마냐고 물었다. 두 존재 모두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답했다. 귀신이 아니라는, 악마가 아니라는 정신적인 안정을 받기 위해 노선을 이탈한 질문을 던졌다는 것이다. 고립된 상황이 오면 인간은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 없고 중요한 것이 뭔지 모르게 된다. 이처럼 인간의 내재한 본성을 제대로 해석한 말이 어디 있겠는가.


이제 의문과 진실로 인해 무한한 무력과 상실에 빠진 인간은 두 종류로 나뉜다. 신에게 귀의하거나 그렇지 않거나. 일부는 무명과 외지인처럼 고통에 해답을 주는 초월적 존재에게 기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신이 말하는 고통의 해석인 종교의 말씀은 다음과 같다. 전생의 업보가 있어서, 신을 믿지 않아서, 불경한 짓을 저질러서 고통받고 있다. 모든 원인을 피해자에게 돌리고 죽은 이가 돌아오지 않음에도 피해자에게 회개와 반성을 요구하고 있다. 그럼 그렇지 않은 이들은 어떻게 될까? 그들이 직면하게 될 답은 ‘모든 이들의 불행에는 답이 없다’는 것이다. 지영민이 미진을 왜 죽였을까? 효진이 왜 고통받아야 할까? 어느 하나 명확하게 알 수 있는 게 없다. 고통받아야 할 이유가 없고 고통을 주는 근거도 없다. 허탈하고 끔찍한 진실. 알고자 하니 모든 원인이 피해자에게 있다는 질서의 폭력, 알지 않겠다 하니 해답 없는 공허의 폭력이 다가온다. 나홍진은 인간을 무력하고 나약한 존재로 바라봤고 세상에 존재하는 고통엔 이유가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게 해 줬다. 그러나 종국에 피해자들에게 건넨 또 하나의 의미는 ‘위로’였
다. 외지인이 악마의 모습으로 변해갈 때 성흔이 나타난 것은 종교가 가진 모순과 인간의
신앙적 한계를 드러낸다. 악마의 모습을 한 신이라도 그것이 예수라고 믿을 수 있을까? 피해자에게 온전한 책임을 전가하는 교리의 모순은 또 어떠한가. 어쩌면 믿지 않고 끝없는 공허 속으로 떨어지는 편이 더 나아 보인다. 그렇게 무력과 상실에 빠져 밑바닥에 도착하고
나면 나홍진이 의도한 주제 의식을 알 수 있게 된다. 결국 이 모든 비극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 미진이 죽은 것도 중호의 잘못이 아니며 효진이 살인을 저지른 것도 종구의 잘못이 아니다. 고통에 이유가 없듯이 책임에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비극을 겪은 일은 과거가 되고 좋든 싫든 씻을 수 없는 추억이 되며 점차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이 된다. 감독은 이 비관적인 위로가 인간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나서야 보인다는 걸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나약함에도, 그런데도 나아가라는 것. 살라는 것. 이 끔찍한 세상 속에서 끝없이 방황하며 좌절하지 말고 삶의 의지를 불태워 나아가라고 말한다. 정의와 옳음으로 포장된 사회의 허울을 벗기고 부패와 부조리로 가득한 이면을 직시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얼마나 나약하고 무력한 존재인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비극이든 희극이든 모든 사건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최악보다 차악을 선택할 수 있는 비관적인 희망.

그 희망을 붙잡고 살아가는 게 곧 나아간다는 방증이 된다. 나홍진은 <곡성>의 억센 풀뿌리처럼 날 것 그대로의 심심한 위로를 전하며 멋들어진 불편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총평: 나홍진 영화의 작품성에 대하여


앞서 서술한 생각들은 염세주의적 사유를 가지고 있다면 충분히 도출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나홍진이 특별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그 사유를 담아낸 기법들이 비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홍진은 <추격자> 속 영민과 중호의 추격 장면부터 35시간 동안 연속으로 촬영을 진행했다. <황해>는 이미 개봉을 했음에도 완벽하게 편집하지 못했다는 찜찜함에 석 달을 투자하여 감독판을 제작하기도 했다. 씬 하나하나 감독의 생각이 투영될 수 있도록 완벽한 편집을 이뤄내는 것이다. <황해>의 컷 수가 3,000컷에 육박할 정도로 빠르고 역동적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그 집요함과 정성이 대단하게 느껴진다. 본인의 작품에 말하고자 하는 바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생각을 담아내기 위한 그릇의 발전 역시 돋보인다. <추격자>에서 철학의 전제들과 의문을 알려주었다면 <곡성>에선 그 해답과 주제 의식을 강력하게 발현시킨다. 이는 자신의 작품들을 하나의 소설로 생각하여 이야기 흐름의 복선을 회수하는 치밀함처럼 느껴졌다. 자신도 인간이기에 해답의 설득력을 높이기 위해 초월적인 존재인 무명과 외지인을 등장시킨 점은
개연성의 견고함을 쌓기 위해 캐릭터를 이용하는 현명함을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대중들이 즐길 수 있는 요소들을 배제하지 않았다. 4885, 슈퍼집 아줌마, 뭣이 중헌디 등의 유행어나 유명한 장면을 만들기도 했고 미진의 딸과 중호의 서사, 허당끼가 넘치는 종구의 모습을 통해 공감할 수 있는 인간미를 제시한다. 어떨 땐 블랙 코미디의 씁쓸한 즐거움을 선사하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돋보이는 것은 작품의 유기적인 연결을 통한 스토리텔링과 나홍진 철학 전개의 비범함이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나홍진은 <추격자>와 <곡성>을 연결해 다른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보여주면서도, 주제 의식을 통일시켜 두 작품이 거시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게끔 했다. 그동안 한국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나타내는 작품이 많
았다고 해도 이만큼이나 시니컬하고 비관적인 메시지를 전달했던 감독은 없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추격자>에서 모두 보여주지 않고 <곡성>으로 발전시켜 제시한 것 또한 영화의 기호를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능숙함까지 엿볼 수 있었다. 상업성이 짙은 장르 영화는 관습이 뚜렷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쉽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이 존재한다. 이를 뛰어넘는 개성 있는 영화가 탄생한다면 대중들의 관심이 이로 말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이겠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다. 2시간 이내라는 시간의 제약과 세밀한 촬영 기법을 통해 스토리텔링과 주제 의식을 담아야 하고, 영화만의 독특한 분위기와 매력까지 살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관습을 파괴하는 신선한 이야기를 그려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나 생각했다. <곡성>이 얼마나 다채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는지. 한창 박스오피스의 정상을 오르고 내리던 때가 기억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해석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는가. 피해자 중심의 평론을 펼치던 이가 있었고 종교적인 모티프와 메시지에 집중하던 자가 있었다. 대중들과 평론가들은 마치 미끼에 걸린 것처럼 본인의 해석을 내세우기에 급급했다. 이토록 뜨겁게 달궈지는 토론 거리가 얼마 만에 등장했는지! 아직도 <곡성>만큼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가져온 작품은 없다고 생각한다. 완벽에 가까운 편집을 통해 영화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것처럼, 나홍진의 <곡성>이 그 당시 영화계를 타오르는
장작처럼 생동감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나홍진은 암막 커튼 속 드러나야 할 진실한 ‘우리’가 무엇인지 명백하게 알려줬다. 앞으로 어떤 것들을 제시할지 기대가 된다. 계몽과 의식의 각성(覺醒). 실로 무시무시한 작두의 감독, 나홍진이었다.


 참고문헌
1. 이혜선, “[영화(2)] 나홍진 감독의 추격자 – 폭력성에 대한 성찰”, 현대미학사, 2008년, 공연과 리뷰

2. 주유신, “리뷰 : <추격자>의 장르적 새로움과 사회적 핍진성”, 부산영화평론가협회, 2008년, 영상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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