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착하자 마자 눈길을 끈 건 젊은 일본인 여성의 무리였다. 그들이 눈에 띈 이유는 주위에 다른 사람들이 외국인들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의 분위기가 다른 관광객과 달랐기 때문이다. 이유는 안에 들어가자 마자 금세 알 수 있었다. 안에서 만화 <골든 카무이>의 스탬프투어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골든 카무이(ゴールデンカムイ)>는 러일전쟁 이후의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한 시대극이다. 시대적배경, 역사, 전쟁 등을 아이누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서 매우 높은 수준으로 묘사해서 몰입도가 높다. 이야기도 탄탄해서 <이 만화다 대단하다>, <데츠카 오사무 만화상>을 연이어 수상함으로써 작품성까지 보장받은 수작이다.
하지만 내 눈에 띈 것은 만화보다는 그 옆의 설명자료다. 만화에서 디자인에 활용된 부분이 어디인지를 설명하는 자료인데 이를 보니 여기 없었으면 이 만화 못 그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기록문화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다.
북해도 개척관은 그만큼 콘텐츠가 다양한 곳이다. 놀라운 것은 이곳이 단순히 당시 시대를 재현한 곳이 아니라
사진과 기록자료를 바탕으로 실제 있었던 건물을
최대한 당시와 가깝게 재현한 곳이라는 점이다.
홋카이도 개척시대의 시가지, 어촌, 농촌, 산촌의 중요 요소는 물론 당시의 운송수단까지 재현되었다. 여름에는 말 철도, 겨울에는 말 썰매가 운영된다. 이 외에도 절기별로 당시에 있었던 축제가 열리기도 한다. 이 박물관은 어떻게 이 정도의 콘텐츠를 만들 수 있었을까?
정답은 기록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기록이 의외로 부실한 나라다. 응?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무슨 말이냐고? 아니다. 우리나라는 기록이 부실했던 시절이 더 많다. 제국주의 시대엔 일본과 프랑스에서 약탈해갔고 6.25 이후에는 미국이 모든 기록을 마대자루에 담아 수거해갔다. 이런 역사 때문에 우리는 기록이 필요할 때마다 외국에 의존해야 했다. 것도 모자라서 군사정권 시절에는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록을 봉인하기까지 했다. 이것이 우리의 기록이 걸어온 아픈 역사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사실상 일본의 죠슈번과 사츠마번이 합쳐서 에도 막부를 타도한 이후 들어선 메이지 정권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전쟁 때 전범이 연합군에 의해 처벌되었지만 핵심인물인 메이지 천황과 기시 노부스케가 살아남아서 그 맥을 이어갔다. 그리고 이것이 이어져갔다. 현 총리인 아베 신조 총리도 죠슈번의 정치적인 유산과 지역구를 활용해서 정치를 한 케이스다.
이렇게 100년이 넘게 이어진 것이 일본 사회다.
이렇게 안정된 환경 덕분에 붉은 벽돌 청사 같이 유리한 것만 내세우는 부작용도 있지만 이런 테마파크를 만들 수 있는 기록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는 순작용도 있다. 적어도 그들이 북해도 개척촌에 재현한 것은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삶의 기록이니까.
이 곳은 단순히 당시 생활환경만을 재현한 것이 아니다. 실제 있었던 기록까지 참조해서 그 생활상까지 재현해 놓았다. 예를 들어 검도 도장은 당시 도장의 학생들의 실명, 상장, 도구들이 현장 사진을 바탕으로 재현되어 있으며, 국수집에 있는 전화번호는 당시 사용되었던 실제 번호와 점포명이 적혀 있다. 이런 식의 재현이 테마파크 전면에 걸쳐 되어있다.
의외로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콘텐츠가 쏟아져 나오는 <북해도 개척관>에서 특히 인상적인 것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오타루 신문사에 있는 <수동 인쇄기(手フート印刷機)>였다. 19세기말 인쇄기는 사람이 발로 밟아서 인쇄(Foot Press)하는 형식이었다. 이 인쇄기는 이를 작게 개조해서 손으로도 인쇄할 수 있게 만든 것이다. 이런 인쇄기는 엽서를 인쇄하기에 최적의 제품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인쇄기를 체험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이 따로 있는 듯하지만 일본답지 않게 관광객이 많이 온다 싶으면 임의로 시연을 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일본답지 않은 곳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엽서는 체험을 구경한 사람들에게 기념품으로 준다. 고대(?)의 인쇄기술로 만들어진 특이한 기념품이 생긴 것이다.
또 하나의 인상깊었던 장소는 <어부 아오야마씨의 집>이다. 오역과 오타가 창궐하는 한국어 안내서에는 <아오야마싸 어부주택>이라고 적혀 있어 보는 사람의 사고를 순간이나마 정지시키는 효과도 있다.
여기서 나는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었다. 입구에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안에 있던 해설사 분께서 안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이다. 그곳에는 실제 불이 붙어있는 화로가 재현되어 있었다.
그래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이 분 왈, 일본어가 되는 첫 관광객이라고 기뻐하시면서 이것저것 설명해주신 것이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잘 오지 않는단다.
앞에서 이곳의 운영이 좀 느슨하다는 말을 했는데 이 법칙(?)이 여기서도 통용된다. 몇 마디 던져보고 오늘 처음으로 말을 알아듣는 관광객을 본 해설사분은 아예 눌러앉아서, 때로는 동료를 불러 증식(?)하면서 한국에서 온 청년에게 홋카이도 개척사를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가이드 교육용 자료까지 동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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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조선 리더십 경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