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식공장장 Jun 21. 2017

기득권과 승부를 벌인 진짜 기득권

조선 리더십 경영

Intro 


백성은 나라에 의지하려고 하지만 백성의 실정이 위로 통하지 않습니다.
나라는 백성을 보호한다지만 정치의 혜택이 아래에 미치지 못합니다.
관직에 있는 사람들은 작은 성과에 만족하여서 먼 장래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일을 맡은 사람들은 한때의 이익에 연연하여서 장기 계획을 소홀히 합니다.
위에서 직무를 게을리하면 아래는 생업을 잃고, 위에서 혜택을 베풀지 못하면 아래에서는 분노가 쌓입니다. 이 때문에 전하의 나라는 이미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광해군 3년, 별시문과 최종 시험에서 임숙영이 제출한 대책이다. 그런데 여기서 백성을 국민으로, 전하를 대통령님으로 바꾸면 오늘날 대통령에게 한 직언이라고 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을 정도다. 특히 최측근의 국정농단이라는 희대의 사태를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속이 시원할 정도의 직언 이리라.  


이런 현실을 해결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보통 사회 모순과 부조리는 대부분 이익의 편중, 기득권의 공고한 보수화가 원인이다. 그래서 카르텔을 해체하는 것이 필수적인데, 이게 보통 쉬운 일이 아니다. 


조선시대에 백성을 괴롭히던 대표적인 적폐는 공납이었다. 선조대에도 논의가 되었지만 그때는 별 성과 없이 넘어갔었고, 본격적으로 문제의식을 가진 왕은 그 개혁군주 광해군이다. 사실 거의 조선왕조 초중반에 걸쳐 진행되던 폐단이자 구습이었는데 보통 이렇게 되면 사회적인 시스템이 되어 개선되기가 어렵다. 거기서 나는 이익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아예 그게 옳다고 믿는 사람들까지 생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그 성군이자 애민군주인 세종도 수령의 죄를 백성이 고발하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 조선의 폐해인 공납이 한 신하의 손에 의해 사라졌다. 바로 이번 이야기의 주인공인 잠곡 김육(金堉)이다.


1. 1649년,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조익(趙翼)을 좌의정으로, 김육(金堉) 우의정으로 제수했다. 이에 김육은 와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 상소를 올렸으나 효종은 황희의 사직서를 받아주지 않은 세종의 후손답게 이를 모두 반려했다. 정말 이런 걸 보면 핏줄이 무섭다는 말이 새삼 실감 난다.

왕의 뜻이 완강하여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음을 안 김육은 사직 상소 쓰는 것을 포기하고 우의정 자리를 받아들였다. 단 그냥이 아니라 조건부였다. 


요즘에도 공직이든 회사든 임명권자에게 조건을 붙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가 왕에게 단 조건은 무엇인가? 같은 해 11월, 자신을 쓰려면 대동법을 확대 시행하라는 내용의 상차(上箚)를 올렸다. 


오직 백성을 보호하는 정사를 통하여 그들의 삶을 편안케 해주는 것이 중요하다.
대동법은 역을 고르게 해서 백성을 편안케 하는 좋은 계책.

        <효종실록> 즉위년 11월 5일


그가 왕에게 조건까지 붙여가며 추진한 대동법은 어떤 법이었는가?


2. 조선 초기 제도 중에서 가장 크게 문제가 된 것은 공납의 폐단이었다. 이 폐단을 보완한 것이 대동법이다. 


공납은 원래 지방의 특산물을 임금께 드린다는 소박한 마음에서 시작되었지만 이런 일에는 반드시 프로 아부꾼이 끼어들기 마련, 결국 국가 수입의 60%를 차지하는 거대 사업이 되었다.

 

이렇게 규모가 커진 이유는 각 고을에 공물을 얼마나 부과할 것인가에 대한 규정이 없었다는 점이 한 몫했다. 오로지 정해진 것은 각관(주, 현)에게만 부과하고 고을 내의 공납 양은 정해주지 않았다. 


보통 상식대로라면 흉년이면 양을 줄이고, 풍년이면 양을 늘리는 식으로 통일된 구조가 필요한데 양이 정해져 있지 않으니 풍흉에 관계없이 거둬들였다. 정확히 말하면 풍흉과 백성의 입장이 중요한 게 아니라 수령이 어디 아부해야 한다던가, 자식을 혼인시킨다던가 그것도 아니면 수령이 지겨워서 도성에 가서 벼슬을 하고 싶은데 기름칠이 필요해서 더 걷는 식이 많았다. 


당시에 공납은 화폐가 아니라 물품이었다. 그런데 이 부과 기준이 형평성이 없었다. 공납 제도에서 생산이 많이 되고 구하기 쉬운 것을 담당하는 것은 그 고을에서 행세 좀 하는 사람들이었고, 이런 희귀한 물건을 구해오는 것은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재벌한테는 돈으로 세금 받고 서민들은 금이나 다이아몬드로 세금 내라는 식이다.


가뜩이나 이런 상황인데 고을 수령이 출세를 위해 아부할 대상이 좋아하는 물건을 찾는답시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그 지방에선 생산도 안 되는 물건을 구해오라고 압박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를 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생산하는 곳에서 사 오느라 고생했겠다고? 아니다. 여기에 화룡점정을 찍은 것이 정경유착으로 태어난 방납 업자(防納業者)였다. 이들은 관리들과 짜고, 농민들이 생산하거나 구한 물건이 아닌 자기들이 바가지를 씌운 물건만 사야 납품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홍삼을 구해오라고 했는데 마침 좋은 홍삼을 구해서 이를 세금으로 내려고 했는데, 수령은 받아주질 앉는다. 업자에게 산 것만 받아준단다. 이 홍삼이 훨씬 좋은 것이라고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는다. 아무리 품질이 좋아도 관리도 한통속이니 받아주지 않으니 서민들의 가중될 수밖에 없다. 결국 그 좋은 홍삼 3개를 방납 업자가 가진 질 낮은 홍삼 1개와 바꿔야 하는 식이다. 방납 업자는 본인이 하나, 뇌물로 하나씩 떼고 나머지만 공납으로 바친다.  정말 시스템이 먹여 살린다는 게 이런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근본적인 구조적 결함이 있었다. 공납은 토지가 아닌 인정(人丁)과 호(戶), 즉 사람 머릿수에 맞추어 거두어들이는 인두세에 가깝다. 성리학적 경제 하에서 땅의 배분은 공평하지 않다. 땅을 많이 가진 대지주가 있는 한편, 천민은 소작농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인두세를 매기면 어떻게 되겠는가? 소득에 상관없이 내는 세금이 똑같은 것이다. 게다가 소작농이면 소작료도 가져다 내야 한다. 정말 예나 지금이나 돈 버는 건 땅인 것 같다.


결정적으로 화룡점정을 찍은 건 당시의 호구제였다. 우선 비옥한 농토나, 척박한 농토나 세금이 날아오는 게 같다. 오늘날 같으면 최저 시급 아르바이트나 재벌 회장이나 같은 재산세가 부과되는 꼴인데 그 액수가 최저시급 아르바이트의 한 달 봉급 수준인 셈이다. 비옥한 농토에 살면 그나마 낫지만 척박한 농토에선 어지간하면 할당량 미달이 되기 일수이다.

 

게다가 마음대로 이사 갈 수도 없다. 오가작통법이 있어서 이사는커녕 옆에 사는 사람이 죽거나 도망가도 그 세금까지 내야 했다. 아니 그전에 옆집이 도망가면 코를 베이는 판이었다. 나중 가면 비변사가 헌종에게 더 엄하게 처벌하라고 할 정도로 백성을 괴롭히는 시스템이었다(이런 상황은 평등을 강조하는 외세 종교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저렇게까지 수탈당하면 자연스럽게 소비가 줄 수밖에 없다. 다 세금으로 빼앗기고 소작으로 빼앗기고 세금도 중간에서 다 떼어 먹히니 말이다. 결국 공납은 국가재정의 악화, 사회적 불균형의 원인이며 조선경제의 약화를 가져왔다.


3. 공납은 당시 기득권의 특권이자 부라는 권력을 이루기 위한 그 자체였다. 워낙 뿌리 깊게 박혀서 그 추진력 강한 세종조차 어쩌지 못한 폐단이었다. 연산군 같은 왕은 아예 숟가락이 아니라 삽자루를 얹었다. 장녹수가 죽었을 때 우리 고혈이 다 빨려 들어갔다며 장녹수의 시체에 백성들이 몰려들어 돌을 던진 건 인과응보일 것이다.


방납 업자를 처벌하면 되지 않느냐고? 우선 이 방납 업자는 단순히 부패한 무리라기보다는 국가가 필요한 공물을 구해오는 정부 시스템의 일환으로 부패한 사람들로 간주하고 처벌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처벌했다간 국가재정확보를 위한 길이 사라지는 수준이었다. 


게다가 수령은 자기를 천거해준 사람에게 인사를 제대로 안 하면 목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당시에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뭔가를 상납하는 문화가 있었는데 이를 충당하기 위해 수령이 아전을 뜯어먹는 구조였다. 아전은 아예 급여가 없었다. 그래서 아전들은 살기 위해서 공납 물을 반려하고 더 걷어가면서 백성들을 쥐어짜고 있었다. 


어째 헬조선의 현실이 떠오르는 것 같지 않은가?
오늘날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지 않은가?


이 관점에서 여기 칼을 대는 것은 전 기득권과의 싸움과 마찬가지였고 경우에 따라선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조광조가 어떻게 죽었는가? 공신이라는 기득권에 칼을 댔다가 역모 누명을 쓰고 죽었다.


이런 현황을 알고도 김육은 대동법 시행을 밀어붙였다. 이는 단순한 일이 아니었다. 자리를 넘어 목숨도 위험하다. 중종 때 조광조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공부 깨나 했다는 사람이 모르겠는가? 기득권에 잘못 칼을 들이대면 역모 혐의를 쓰고 죽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후에 설명하겠지만 김육의 조부는 바로 조광조 역모사건에 휘말려서 죽었다. 당사자에 가깝다. 하지만 그럼에도 물러서지 않았다. 조선 시대 기득권과 개혁세력의 정면충돌이 시작된 것이다. 


4. 해결책은 정말 간단했다. 부과 단위를 가호에서 토지 소유로 바꾸면 된다. 애초에 땅을 소유하지 않은 사람에게 인두세를 부과한 것이 문제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땅을 많이 가진 양반 지주 기득권들이 내야 할 돈이 늘어난다. 기존의 소작농의 것까지 내야 하기 때문이다(그래서 후에는 땅을 빌미로 소작료를 늘리는 짓을 한다. 요즘 건물주와 임대자의 모습을 그려보라). 

김육의 초상화, 고집스러운 이미지다

아전들도 마찬가지로 사실상 주 수입원이니만큼 요즘 같으면 망한다고 연이어 반대할 것이 뻔히 보인다. 그래서 대동법을 실시하는데 엄청난 방해가 이어졌다. 


자, 여러분이 파워풀한 개혁을 하려고 한다. 그럼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바로 권한을 가진 윗사람의 지원이다. 지원이 이루어지려면 권한을 가진 사람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극복할 의지를 가져야 한다. 아니면 귀가 열린 윗사람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김육이 뛰어나도 대동법은 실시되지 못했다. 


효종은 다행히도 아버지와는 달리 현실인식이 뛰어난 사람이었다.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당연히 양반 지주의 공격이 심해졌다. 오죽이나 시달렸으면 김육이 대동법 중간보고를 할 때 아무 말도 없이 듣기만 했다.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기만 하면 양반 지주가 물어뜯으니 거기 시달려서 그냥 듣기만 한 것이다. 그 효종이! 


하지만 김육은 만만치 않았다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


라고 배수진을 치고 대응했다. 그러자 양반 지주는 이 태도가 방자하다며 집중 공격을 했다. 특히 조선시대 선비들이 송자라고 부르며 숭상하던 송시열이 선두에 서서 김육을 비방했다. 오죽이나 이게 심했으면 김육과 반대파인 노론의 허적이 감싸줄 정도였을까. 그래서 김육은 귀양과 복직을 밥먹듯이 하게 된다.


이후 1651년, 복직되면서 영의정에 임명되자, 대동법을 충청도로 확대 실시한다. 오늘날도 가장 비옥한 토지이며 정책의 중요 기점이다. 농업시대인 당시에는 오직 했으리라. 이후 사직과 복직을 반복하면서 호남에 확대하던 중,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658년, 효종 9년이었다.


그때 안 살아봐서 모르지만 아마 양반 지주들은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하지만 30대의 젊은 효종이 물러서지 않았다. 김육이 구축한 시스템은 탄탄했다. 김육이 사망한 후, 대동법은 전라도 해읍, 산군으로 확대 실시되었고 역시 조세제도의 개혁을 인식한 숙종 대에는 황해도까지 실시됨으로써 전국적으로 시행이 되었다. 수많은 실패 이후, 꼭 100년이 되는 해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여러 가지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대동법의 효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주요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실제로 김육을 맹 비난하며 대동법에 적극적으로 반대하던 산당 영수 송시열마저, 효종이 대동법의 효과에 대해 묻자, 좋은 법이라고 답할 정도였다.


문제를 해결하는 원동력은 의지를 가진 지도자와
추진력을 가진 실행자의 하모니에서 나온다


5. 회사든 국가든 어떤 프로젝트를 실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성과를 얻는 것은 더욱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이 이유 중에 유난히 안타까운 것이 바로 ‘의지’라 하겠다. 밀어붙이면 효과를 볼 수 있는데 하지 않아 효과를 못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게 공무 영역으로 가면 국가의 운명까지 좌우하게 된다. 


필자 경험상 예를 들기 쉬운 것이 일본 시장 공략이다. 일본 시장. 최근에 중국의 사드 보복인 한한령, 금한령으로 다시 주목받는 시장인데 그 전에는 일본 시장이 외면받고 있었다.


예를 들어 일본에 여러분이 만든 상품, 과자를 판다고 하자. 그러면 수출을 위해 각종 규제 등을 알아보고 그에 맞는지 확인하는 것은 필수 중에 필수이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다. 일본 시장은 기본적으로 바로 한국에서 건너가서 팔 수 있는 국가가 아니라 해당 유통사에 직접 찾아가야 한다. 그럼 다양한 요구사항이 들어온다.

 

우선 포장에 대한 문제, 일본에 맞는 형식으로 포장과 패키지 형식을 바꾸라고 지시가 들어온다. 알약 같은 경우에는 포장, 금형까지 바꿔야 하므로 비용이 만만찮다. 디자인도 새로 해야 한다. 그런데 이걸 다 해내도 주문하는 양은 10 상자 수준이다. 


왜냐하면 일본 시장은 뭘 내놓는다고 폭발적인 매출이 나오더라도 생산과 시장 투입은 보수적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우선 시장에 조금씩 풀고서 일정 기간 반응을 보고, 시장이 받아들였다고 판단되면 추가 주문을 한다. 그리고 그 양을 점점 늘려나간다.


그래서 일본 시장에서는 정말 어지간한 제품이 아니면 물건이 단기간에 다량으로 팔리지 않는다. 하지만 대부분은 이 기간을 견디지 못해 경영진에서 철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식적으로 돈이 안되니 윗선을 설득하기도 어렵고 윗선도 추진할 의지를 갖기 힘든 탓이다. 일본 진출을 안 했던 기업들이 특정 시기에 일본 사업 관련 인원을 몰아 뽑는 이유다.


하지만 정말 상품이 좋다면, 1억 6천 인구를 가진 국가, 비록 절반이 구매력이 없는 노인층이라고 해도 20~40대 실 구매층은 한국보다 크므로 진득이 공략할 필요가 있다. 사실상 CEO의 전략과 의지가 좌우하는 수준이다. 실제로 여러 기업이 일본 시장에서 국내 시장 버금가는 매출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이를 수행하는 데는 굳은 의지와 확신이 필요하다. 그래서 효종과 김육 콤비는 하늘이 조선에게 내린 선물이었다.


6. 그런데 김육은 어떻게 이런 확신과 의지를 가질 수 있었을까? 김육이 이런 현실에 맞는 법을 만들 수 있었던 이유는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광해군 때 북인 세력과 정인홍을 비판했다가 정거(과거 금지) 조치를 당하고 10년간 숯을 구워 팔아가며 살았다. 그래서 서민의 어려움을 직접 경험할 수 있었다. 


지금의 방납이 서민들의 생활을 위협하는 것을, 그것이 국가에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보고, 경험했으며 국가에게 안 좋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는 대동법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그는 운이 좋았다. 그를 받쳐주는 상사, 군주가 있었던 것이다. 효종은 그의 나라에 대한 충성, 자신에 대한 충성을 알고 양반 지주의 다각적인 압박에도 불구, 적극적으로 밀어주었다. 실록을 보면 기세가 꺾인 적은 있어도 한 번도 김육의 의지에 압박을 가한 적은 없다.


정치를 버리고 자신의 본분을 선택한 한 관리 덕에 덕분에 우리나라는 1600년대에 근대형 조세 개혁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바로 할아버지가 기득권을 건드리다 죽은 조광조와 연루되어 죽었으니 목숨까지 걸었다. 그리고 성공했다. 



김육이 오늘날 현대인에게 주는 힌트


1. 경험해야 할 수 있다

사람은 자기가 겪어보지 못한 상대의 입장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김육이 대동법을 추진하게 된 이유는 본인이 서민의 삶을 직접 경험했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어떤 도전을 위해서는 우선 경험하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에 노룩 패스로 유명한 한 정치인이 있다. 국민들은 그걸 보고 난리가 났지만 본인은 그게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반문한다. 아마 그런 감정을 경험할 일도 없었고 앞으로 경험할 일도 없으니 모를 것이다. 그래서 요즘 세상에서는 역지사지를 할 수 있는 감성이 중요하다.


2. 신규사업은 신념을 갖고 추진해라

여러분이 만약 신규사업을 지시한 오너라면 길게 볼 것을 권한다. 문제는 대부분의 회사들이 1년 정도 진행하고 눈에 띄는 결과가 없으면 그대로 접어버리고 이게 구글 신의 검색 기록에 남아서 당신 회사는 끈기 없이 사람만 모집했다가 해고하는 못난 회사임을 광고한다는 것이다(그리고 요즘 구직자는 이를 데이터베이스로 만들어서 갖고 있는 경우도 있다).


전술했듯 신규사업은 그냥 하기도 힘든데 기존 사업팀의 반발 그리고 당신의 그림자가 있다. 따라서 주도적으로 그들이 일하는 환경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일례로 닛산의 회장 카를로스 곤이 부도직전에 놓인 닛산을 구하는 데는 5년이 걸렸고 무너지는 닌텐도를 업계 1위로 끌어올려놓은 이와타 사토루는 2002년 취임한 이후, 2006년까지 매년 주총에서 사퇴 압력을 받았다. 그들이 부활을 성공시킨 이유는 본인들의 능력이 뛰어나기도 했지만 일할 수 있는 환경을 꾸며주고 지원해준 슈바이처 회장, 야마우치 회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3. 한 번 결정했다면 믿어줘라

아무리 김육이 철의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해도 효종이라는 든든한 배경이 없었으면 대동법은 성공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상사의 지시를 받아 조금 위험부담이 있는 일을 하는데 상사가 자꾸 불러서 확인하고, 잘될지 물어보는 경험이 누구나 있지 않은가? 본인은 불안해서 물어본다지만 실무자는 의욕까지 꺾이는 일이다. 


선조 때 왜 대동법이 추진 전에 없어졌는지 생각해봐라. 일단 일을 정하면 윗사람은 버텨줘야 하고, 아랫사람은 그 버팀을 바탕으로 추진하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아이템이 좋아도 버텨주는 축이 없으면 일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역사 리더십 경영 매거진의 테마를 바탕으로 새로 엮어낸 <조선 리더십 경영> 이 와이즈베리/미래엔에서 2018년 11월 하순 출간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메일 : inswrite@gmail.com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을 바보 만드는 리더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