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리더십 경영
Q: 회사 상부의 명령으로 신규사업팀의 팀장이 되었다. 단순한 업무수행을 넘어, 시장조사를 통한 신규시장개척까지 해야 하는 어려운 자리다. 그런데 내가 이런 업무를 맡은 적이 없는 데다, 너무 생소한 분야다 보니 팀원들의 입은 학 부리요, 눈은 가자미를 닮아간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신규사업부는 매출이 생겨야 그 가치를 인정받으며, 기존 사업과 비교할 때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지 못해도 살아남지 못한다. 이 사업부서가 살아야지 본인들도 살아남을 텐데 검증도 안된 내가 팀장이 되었으니 압박을 주고 싶은 게 너무 당연하다.
하지만 우선 리더십부터 구축을 해야 업무를 시작이라도 할 텐데 그것 자체가 어려운 상황이 되어서 난감하다. 우선 일은 하게 해줘야 할 것 아닌가? 도대체 어떻게 리더십을 구축해야 할지 고민이 많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
1. 리더십은 공동의 과업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자발적 도움과 지원을 끌어내는 사회적 영향력의 과정을 말한다. 도움과 지원을 끌어낸다고 해서 보통 권력과 착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사실 리더십과 권력의 차이는 이것이 상호작용인가 일방통행인가로 나뉘는 부분부터 시작, 큰 차이가 있다.
권력은 목표, 과업을 수행하는데 중점을 두지만, 최근에는 사회상의 변화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팀워크, 갈등 완화에 중점을 두고 있어서 권력 중심의 지도자보다는 리더십 구축형 지도자가 각광을 받고 있고, 따라서 업무효율을 늘리기 위해서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한창이다.
그렇다면 중점은 과업에 대한 이해를 갖추되 갈등을 완화하고 협조를 이끌어내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것일 텐데, 그에 대한 좋은 사례는 없을까? 사실 이런 리더십에 대해 연구한지는 굉장히 오래되었다. 무려 논어(요왈 편 堯曰篇)에 공자가 잘못된 리더십에 관해 언급한 내용이 있다.
1. 가르쳐주지 않고서 일이 잘못되면 가혹하게 처벌하는 상급자.
2. 주의해야 할 점을 미리 알려주지 않고, 일이 잘못되면 책임만 묻는 상급자.
3. 공은 상사의 것으로 돌리고 잘못은 부하에게 뒤집어씌우는 상급자.
4.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면서도 아부를 해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상급자.
오늘날에도 많이 보는 악덕 상사의 조건이고, 현대인도 크게 공감하는 것이니 이는 인간이 오랫동안 저지른 과오라고 할 수 있다. 요왈 편이 요순시대를 연 요(堯) 임금이 한 말을 적은 책임을 감안하면 이제야 올바른 리더가 되려면 저걸 하면 안 된다는 걸 배우는 게 희한하기까지 하다.
최근의 리더십 관련 서적을 보면, 최근의 인물을 리더십의 모델로 활용하는 추세인 모양인데 사실 역사 속을 잘 뒤져봐도 위 내용에 해당하지 않는 올바른 리더가 많다. 그중에서 이순신은 난중 일지, 징비록 그리고 일본의 기록 등으로 교차 검증해서 리더십이 증명된 사례이다.
2.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위인 1위를 들면 세종대왕과 이순신 제독이 꼭 올라온다. 전자가 사심 올바른 통치를 실행하는 제왕의 품격을 보인 지도자였고, 올바른 지도자를 원하는 대중의 욕구 덕에 주목받았다면 이순신 제독은 성격이 약간 다르다. 이쪽은 엄격하더라도 능력 있고 책임감 있으며 공정한 데다 청렴한 리더를 원하는 대중의 욕구일 것이다. 굳이 말하자면 개인이 아닌 국가에 충성하는 관료를 원하는 사람들의 마음이랄까?
세종까지는 몰라도 역사 속에 성군으로 남을 수 있던 선조, 하지만 임진왜란, 정유재란은 그의 실체를 만천하에 드러냈다. 나라의 위기를 감지하지도 못했고, 그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책도 세우지 못했으며 적이 쳐들어오자 수도와 백성을 버리고 몽진을 시도한다.
군주가 버린 나라를 구한 것은 수탈에 시달리던 백성, 유교 국시의 국가에서 멸시받던 스님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무엇에 충성해야 하는지 아는 선비들이었다. 하지만 왜란을 극복하고 왕의 자리에 돌아온 선조의 입장에서 이들은 자신의 못난 점을 비추는 거울 이상이 아니었다.
열등감에 빠진, 실패한 리더인 선조는 왜란 이후 땅에 떨어진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공을 빼앗고 과를 부하에게 떠넘기기 일수였는데 이 과정에서 고생한 것은 광해군뿐이 아니었다.
곽재우, 김덕령도 화를 당했으며 나름 균형 잡힌 관점으로 선조를 보좌하던 류성룡은 파직당했다. 그 분노는 공이 클수록, 그 명망이 높을수록 더 심했는데 정점은 충무공 이순신이었다. 일본의 보급선을 끊고, 바다를 지키고 반격의 기치를 만든 이 전쟁의 일등 공신은 대우받기는커녕, 선조에게 내내 시달렸다.
3. 상사가 보통 악에 받히면 시키는 일을 잘하는 사람도 트집 잡아 괴롭히는 법이다. 선조와 이순신 제독의 관계가 이와 같았다. 가장 유명한 것은 부산포-칠전량 해전-명량 해전에 관련된 일화일 것이다.
정유재란은 일본의 재 침공으로 시작된다.
선조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른팔, 가토 기요마사가 일본에서 부산으로 건너온다는 첩보를 명으로부터 입수하고 이순신 제독에게 부산포 출진을 명했다.
문제는 이미 가토가 건너온 상황인 데다 병력, 지리 등의 문제로 인해 적극적인 전투를 벌일 수 없었던 것이다.
이대로 출진하면 가토의 함대의 포위망에 뛰어드는 셈인 것이다(실은 굉장히 복잡한 전개지만 이 정도로 정리하자).
이순신 제독은 이런 상황을 정리하여 조정에 보고하자, 선조는 재차 출진을 명령한다. 이에 제독은 왕명을 받들기 위해 출정에 나서게 된다. 그런데 이때 권력에 눈이 먼 원균이 ‘나라면 적극적으로 왕명을 수행했을 것’이라고 조정에 고했고, 선조는 가뜩이나 이순신 제독에게 열등감을 느끼던 판이었던지라 자신의 권위가 훼손당했다고 자격지심을 느껴 자신의 명령에 따라 출진하는 장수를 불러들여, 왜적과 맞서 싸워야 할 장수를 국문, 대간의 만류도 뿌리치고 단 이틀 만에 파직을 시켜버린다.
이 과정은 순전히 열등감을 부하직원에게 부당하게 푸는 상사의 모습과 흡사하다. 아무리 선조에게 유리하게 기술을 하려고 해도 정황을 볼 때, 선조의 국문은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선 장수가 국문장에 불려 나온 상황에서도 왕명을 받들어 출정했음을 몰랐을 리 없다.
실록을 보면 이때 선조는 비뚤어진 리더이자 독기에 찬 질투의 화신이라고 생각된다. 선조 30년 3월 13일 자 실록을 보면, 선조가 이순신을 국문 과정에서 죽이려는 시도를 했음이 나타나 있다. 국문이라고 불러놓고 왕명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처형하려고 한 것이다.
더 황당한 것은 왕명을 어긴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이다. 실록의 기록에는 선조가 ‘부산포를 나가서 전투에 들어가면 잡을 수 없으니 그전에 잡아오라’는 대목이 있다. 이는 부산포를 출정할 것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즉 어명을 이행했음에도 어명을 어겼다는 이유로 국문을 가한 것이다. 즉 그냥 미웠던 것인데 이게 단순한 인간관계라면 모를까 군신관계인데다 왜적이 침공한 상황임을 고려하면 공사 구분도 못하는 사람이다.
이후 이순신을 파직시키고, 원균에게 조선수군을 맡겼다가 칠전량에서 전멸한 걸 생각하면 그래도 잘했다는 사람을 보는 눈까지 망가졌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래서 명분 없는 질투가 무섭다. 조직을 무너뜨리고 국가를 좀먹게 한다.
3. 왜 이순신 제독의 리더십 이야기를 하면서 선조의 리더십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제목을 바꿔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작가조차 들 정도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선조의 비뚤어진 리더십은 이순신 제독의 리더십을 돋보이게 한다.
이순신 제독은 절대 쉬운 상사가 아니었다. 당시 장군 휘하 수군의 규율은 유난히 엄격했다고 하는데 오죽하면 휘하 전투의 전사자보다 군율에 의한 처형자 숫자가 더 많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사실 이건 약간 과장된 것인데 정확히 말하면 병사자와 군율 위반으로 인한 처형자가 전사자보다 많다. 거의 1:100 수준으로.
그래도 많다고? 하지만 당시 조선수군은 그리 상황이 좋지 않았다. 물이라는 고된 환경과 조건이 열악해서 병이 많이 걸리고, 탈주자도 속출했다. 오죽이나 사람들이 싫어하고 빠져나가려고 했으면 성종이 수군을 세습화해서 칠반천역(七般賤役)으로 분류되었을까.
이런 조직을 다스리는 방법은 두 가지가 존재한다. 하나는 허허실실 봐주면서 편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탈주자, 병사자가 속출하는 이런 조직에서 불만을 누그리는 방법이지만, 이후에 크게 폭발하기 때문에 추천할만한 방법은 아니다. 문제는 이런 방법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있다는 것.
이 조직을 이순신 제독은 엄하게 대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합리성을 만들었고 리더십을 구축했다.
난중일기, 징비록 등에서 관련 일화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소가 빠져 죽은 이야기일 것이다. 평소 이순신 제독과 친한 아전 하나가 군량을 싣고 오는 중 점심을 먹고 반주를 걸치고 있었는데 이때 군량을 실은 소가 혼자서 물을 먹으려다가 수레가 균형을 잃어 쓰러진 채로 못 일어났고, 결국 소는 개울에서 빠져 죽고 수레에 실었던 군량도 불어서 못쓰게 되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문제는 이순신 제독이 전시에는 식사 후 반주를 금지시킨 것, 여기에 겹쳐서 군량미까지 못쓰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아전은 평소에 제독과 친분이 있는 사람. 제독은 다음부터 잘하라고 등 두들겨주고 말았을까? 아니다. 결국 이 아전은 목이 베였 효수당했고, 그날 저녁 장군 휘하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동기의 목을 보면서 잔치를 해야 했다(물에 빠진 군량미는 찐 쌀이라, 일단 물을 먹으면 오래 보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빠져 죽은 소도 처리해야 했고). 이런 엄격함은 조선 수군이 통제가 잘 된 원인이 되었다.
엄격했다는 일화만 보면, 상당히 공포 분위기였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는 상에도 엄격했다. 가장 상황을 이해하기 쉬운 일화는 명량해전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명량해전 당시 상황은 처음부터 안 좋았다. 아군은 원균이 다 가라앉혀서 남은 12척, 적은 130척.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군율 자체가 무너져서 대장선만 전선에서 버티고, 나머지 배들은 뒤에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이때 안위(安衛 1563~1644)는 처음에는 뒤에 빠져있다가 부하들을 달래서 전선에 복귀한다(여러 가지 기록으로 볼 때 안위의 지시가 아니라 겁먹은 부하들이 안위의 통제도 듣지 않고 배를 물린 것이라고 한다). 이때 이순신 제독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안위야, 싸우다 죽고 싶으냐! (아니면)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달아난다고 살 수 있을 것 같으냐! 너는 중군이 되어서 멀리 피해만 있고
대장을 구하지 않았으니, 죄를 어찌 면하겠느냐!
당장이라도 처형하고 싶지만 적의 기세가 또한 급하므로 우선 공을 세우게 하겠다!
이순신, 『정유 일기』 9월 16일
그 결과는 아는 대로 이순신 제독은 대승을 거둔다. 영화 명량해전에서는 일본군이 열세에 몰리고 도도 다카토라(김명곤 분)가 배를 물린 것처럼 나오지만 일본 쪽 기록에 의하면 화살을 맞고 급하게 퇴각했다고 한다. 대승이었다. 이 과정에 안위는 장군의 질책(?)에 힘입어 왜군의 배를 30척이나 격침시켰다고 한다.
길었다. 이제 본론이다. 이순신 제독의 리더십이 왜 대단한가? 징비록에 의하면 명량해전이 끝난 후 이순신 제독은 조정에 장계를 올린다. 이 과정에서 부산 왜영 방화 등을 비롯한 안위의 공을 소상히 적어 보냈고, 이 내용이 인정받아 안위는 2계급 특진, 파격 승진을 하게 된다.
대단한 일이다. 한때 자신의 명령을 어기고, 자신을 위기로 몰아넣은 부하다. 게다가 안위는 이순신을 끝까지 비호하고 아끼던 이원익과 거의 악연에 가까운 사이였다. 아마 만약 이순신 제독이 선조 같은 사람이었다면 아무리 위급할 때 내 명령을 따르면 살려준다고 했어도 명령 불복종을 핑계로 처형해버렸을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명령을 무시한데 대해 보복할 수 있고, 자신을 비호해주는 이원익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해버리면 부하들은 그를 따르지 않는다. 위급할 때와 아닐 때의 말이 다르고 공과 과가 분명한데 공은 놔두고 과로 인한 처벌만 우선시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순신 제독이 이런 이치를 알고 그런 것인지, 아니면 올바른 교육과 가정환경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이순신은 리더십을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신화 속에나 나올 것 같은 리더였다. 괜히 성웅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
이순신 제독의 이런 면모는 신뢰를 구축, 부하를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데 성공한 요인이 되었다. 만약 이순신 제독이 전시에는 나를 따르면 상을 준다고 했다가 끝나면 명령 불복종이라고 처형하는 타입이었다면, 부하들을 도구로 여기거나 편의에 따라 원칙을 바꾸는 리더였다면 다른 해전은 몰라도 명량해전의 승리는 나올 수 없다.
애초에 본선에 있는 장병들이 말을 안 들어서 패배했을 것이다. 믿지도 않는 제독의 말만 믿고 전장에 나갔을까? 전장에 나가기는커녕, 출진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살해당했을 수도 있다. 전장에서 상관 살해는 꽤 자주 일어나는 범죄며, 하물며 당시와 같은 시대면 말만 맞추면 묵과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알렉산드로스 3세가 어떤 최후를 맞이했던가?
그리고 이런 리더십은 단기간에 구축되지도 않아서, 리더의 철혈과 같은 의지가 요구된다. 말 그대로 평소의 소행이 자산이 되는 것이다.
한 예로 장군은 불시에 병영을 순시해서 병장기를 관리했는데 만약 녹이 슬었거나 가죽이 굳어서 금이 가면 기본이 곤장 80대, 즉 사실상 사형 내지는 불구로 만든 반면 이런 관리를 잘 하는 사람이면 시간이 남아서 놀고 있어도 소임을 다 했다는 이유로 큰 상을 내렸다.
엄격하다. 하지만 이렇게 따르기 좋은 상사가 없다. 여러분의 조직생활을 떠올려봐라. 부모, 학교 선생님 및 교수님 회사의 동료들을 떠올려봐라. 일을 해보면 알겠지만 평소에 편한 것 같으면서 변덕이 심한 상사보다는 엄격하고 깐깐하지만 일관성 있고 공정한 상사가 훨씬 일하기 편하다
말만 충실히 수행하면, 반드시 상을 준다. 굉장히 간단하면서 어려운 것을 실현했기에 그는 리더를 넘어 영웅이 되었다.
4. 위 사례의 팀장은 우선 서두르려고 하면 안 된다. 위에서야 빨리 매출을 내주기를 원하겠지만 그전에 조직을 정비하지 않으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들은 리더십을 평가할 때 하나만 보고 평가하지 않는다. 최근에 기업의 홍보팀들도 이걸 깨닫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긴 한데 아직도 A 프로젝트를 지시했으니 진정한 리더, B를 지키니 진정한 리더라고 단타성 홍보를 하는 분들이 있다.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약아서 시간을 두고 자료를 수집해서 그 결과에 따라 리더로 인정한다.
이순신 제독이 파직되고, 원균이 2대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가 조선 수군을 전멸시키자. 어쩔 줄 모르는 선조에게 대간은 이순신의 복직을 재차 요구했다. 선조는 입심이 좋고 임기응변이 뛰어난 사람이다. 하지만 그도 더 이상 나름의 논리를 세워 반대할 수 없었다. 이순신 제독이 쌓아온 리더십이 있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말하자면 선조가 파직한 후 복직시킨 유일한 사람이 이순신 제독이다. 그는 전란 때 자신을 보좌한 류성룡 같은 사람들도 파직시켜버렸다.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비슷한 것이 적용될 것이다. 쉽지는 않을 것이다. 실수하면 그것이 고과로 쌓이고 이 고과가 쌓이면 퇴출되는 현대의 자본 체제에서 살아남기 쉬운 방법은 부하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고, 안 되는 일은 부하를 압박해서 되게 만드는 것이라는 걸 부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정답이라고 생각한다. 잘 이해가 안 가면 선조가 지금 후손들에게 어떤 취급을 받고 있는지 떠올리면 된다.
5. 특히 요즘 같은 현대사회에선 리더십이 조직 내에서만 통용되는 가치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건이 있다. 굴지의 글로벌 기업에 계시던 J선생님은 어려운 프로젝트를 차례차례 성공시켜서 말단 사원에서 톱클래스 연봉에 도달한 이례적인 신화의 인물인데 문제는 조직 내에서 부하직원들의 직위가 더 높았다. 이유인즉슨 부하가 일을 잘하면 이를 그대로 본사에 보고해서 부하들의 명망이 더 높아졌고, 덕분에 신규 프로젝트 임원들로 부하들이 먼저 발탁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래서 명망이 높았지만 악명도 높았다. 일을 잘 못하는 사원은 회사 내규에 맞춰 정확히 징계했고, 자기 학교 출신들도 봐주는 게 없었다. 그래서 존경과 공포를 모두 받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좋아하는데 그분이 인상 쓰면 일제히 긴장한다고나 할까?
하나 사람이 모든 것을 성공시킬 수는 없다. 두 차례에 이은 프로젝트가 연이어 실수하자, J선생님은 파벌의 공격에 밀려서 결국 사표를 써야 했다. 그리고 이후 당시 중소기업이던 한 회사에 영업 임원으로 들어갔는데 본인으로썬 사회적 입지, 연봉이 모두 깎인 상황이 된 것이다. 하지만 인생은 새옹지마인 법.
J선생님의 분야는 한번 개척하면 그 후는 쉽지만 개척이 아주 힘든 분야였다. 그런데 영업이 하나같이 잘 풀리는 상황이 벌어졌다. 하도 희한하여서 J선생님이 담당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이 중소기업의 평판, 기술 신뢰도를 알기 위해 대기업 거래처가 평판을 조회했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J선생님이 오래 일하면서 같이 일했던 사람이 동분야의 여러 회사에서 일하고 있던 것이다.
그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고 안 좋아해서 욕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하나같이 일에 철저하고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 상대방과 같이 성장하는 사람이라고 해줬기 때문이다. 개척 영업을 한 곳마다 비슷한 상황이 연출, 영업망이 급격히 늘어났고 결국 이후에 크게 성장한 기업의 총괄 임원이 되는 제2의 성공을 맛보게 되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면 리더십이 자신의 조직 내에서만 영향을 끼치는 시대가 지났다는 것이다. 수명이 늘어나고 직장 정년은 줄어든 시점이니 일은 계속해야 하는데, 그렇다면 주위 사람들의 협조를 이끌어내야 할 필요성이 생긴다.
처음에 말했듯 공동의 과업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자발적 도움과 지원을 끌어내는 사회적 영향력의 과정, 이것이 리더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공동의 과업을 수행하는 평생을 위한 자원이 리더십이라는 가정도 설립하지 않을까?
요즘 같은 시대는 제2의 인생, 제3의 인생에 맞는 일을 찾아야 하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자신의 평판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리더십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이순신 제독은 그 생애를 통해 답하고 있다.
똑같은 행동을 하는데 기분이 좋으면 칭찬하고 기분이 나쁘면 꼬투리를 잡아 괴롭히는 건 칭찬할 방법이 아니다. 물론 자신의 눈치를 보면서 전전긍긍하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권력을 확인할 수 있어 기분이 좋을 수도 있겠지만 리더십은 서지 않는다. 훌륭한 리더로서 조직을 이끌기 위해선 일관된 원칙을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와 친한 부하직원은 30분 지각해도 허허거리며 봐주고, 미운 부하직원은 출근 시간 10분 전부터 문 앞에서 지켜 서서 괴롭히는 사람들이 많다. 일기를 쓰는 버릇이 있어 업무를 하면서 일어났던 일을 일지로 기록하고 각각에 대한 인물평을 적는 버릇이 있는데 이 글을 쓰기 위해 기록을 찾아보니 이런 사람이 무려 두 자릿수다.
한결같은 원칙을 정하고, 스스로 지켜라. 출근시간 몇 분전에 업무 준비를 할 것, 회의 전에는 반드시 30분 전까지 회의 요약본과 관련 자료를 배포할 것 등을. 이러면 친한 부하직원이 싫어할지도 모른다고? 잊어라 그 사람은 원리원칙을 실행하는 당신과 함께할 사람이 아니다. 리더십이 구축된 순간에는 그런 사람들도 당신을 따를 수밖에 없다.
당시 조선 수군은 여러 가지 여건상, 군율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순신 제독 진영의 군율이 엄격했던 이유는 그가 엄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면 후했기 때문이다. 장군은 군명을 충실히 이행한 사람은 한가롭게 놀고 있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군명을 다 이행했으면 쓸데없는 트집을 안 잡았다는 이야기다. 일 다 잘 끝내 놓고도 일찍 퇴근하려다 욕먹어본 사람이라면 무슨 뜻인지 이해할 것이다.
이런 정확성과 일관성은 위기에서도 변함이 없었는데 명량해전에서 도망친 안위가 돌아오자, 장군은 크게 꾸짖으며 ‘도망친 것은 죄를 물어야 마땅하나 공을 세울 기회를 주겠다.’고 말한다. 안위는 이후 왜선 세척에 둘러 쌓여서 크게 분전했는데 이후 명량해전이 끝나자 이순신 제독은 안위의 공을 크게 인정, 장계를 올려 파격 승진을 하게 만든다.
보통 사람이면 일단 위기를 넘어갔음 도망간 게 괘씸해서 분노의 곤장을 날렸을 것이다. 과연 충무공, 성웅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
역사 리더십 경영 매거진의 테마를 바탕으로 새로 엮어낸 <조선 리더십 경영> 이 와이즈베리/미래엔에서 2018년 11월 하순 출간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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