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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식공장장 Mar 07. 2018

이 나라에 연애가 처음 탄생한 날

조선 리더십 경영

연애? 그거 먹는 건가요?


1922년 3월 8일, 동아일보에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사설이 실렸다.


남녀가 십 세 이상만 되면 부모들은 재미 본다는 구실 하에 상투를 틀리고 쪽을 지워 장난감 부부를 만들었다. 그리고 하루 바삐 자식을 낳으라는 악풍을 조장한다.

조혼이 생긴 이유는 굉장히 복합적이다. 최대한 간단하게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하나, 변질된 유교 교리 덕에 부모들은 자식이 자신의 소유물이라는 인식을 갖게 되었다(이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악습이다). 조선시대까지 사람들 최고의 낙은 자식을 봐서 = 대를 끊지 않음으로써 조상에 대한 예를 지키고 문중에 대한 체면을 지키는 데 있었다. 그래서 빨리 손주를 보려고 한 것이다. 물론 혼수로 인한 한몫도 영향이 컸다.


둘, 딸을 차출당하고 싶지 않았다. 조선시대 때까지는 공녀, 일제시대에는 위안부 등 결혼을 하지 않으면 안 좋은 일을 당해야 했다. 


조혼이 정착된 것은 고려 후기로 정말 열 살만 되면 다 결혼을 시켜버렸다. 어떠한 사정이 있어도 이쁘면 공녀로 채가지만 결혼한 사람은 데리고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주자가례에 따라 바꾸려고 했지만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위안부의 경우, 처음에는 평범한 일을 한다고 속여서 데려갔지만 그 추악한 실상이 드러나자 사람들은 너 나할 것 없이 피하려고 했고, 욕심에만 눈이 먼 중개업자들은 빚이라던가 약점을 바탕으로 딸들을 위안부로 끌고 가려고 했다. 이를 피하기 위해 갑오개혁 이후 바뀐 결혼연령은 또 무시당했다.


셋, 경제적인 문제가 없었다. 예전에는 대가족이 중심이라 자산, 육아 등의 어려움이 상대적으로 덜했고, 노하우가 부족한 10대라도 자녀를 기를 수 있는 환경이었다. 만약 당시 사회가 요즘처럼 애 하나 낳으면 희생할 것이 많은 사회라면 조혼이 저렇게 성행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대한민국에서는 불과 2006년까지 초혼 가능 연령이 남자 만 18세, 여자 만 16세였다.


이렇게 이 땅에선 꽤 최근까지도 조혼이 유행했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아무리 성숙한 아이라도 10살밖에 안됐는데 이성을 보고 결혼 욕구에 이르는 사랑의 스파크가 튀길리는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 그렇다면 연애라는 개념은 어떻게 생긴 것일까?


[출처 : 청암민속박물관]



시대의 변화, 연애의 등장


연애(戀愛) 애라는 말은 일본에서 건너온 말이다. 애초에 일본에서는 이런 연애적 형태의 결혼이 성립하기보다는 지역사회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정략결혼이나 노동력을 지키기 위한 요바이(夜這い)가 여러 가지 형태로 실시될 정도였다. 이후 근대화 과정에서, 서구적 LOVE의 개념이 들어오면서 이를 번역한 연애라는 개념이 탄생했다. 


문물의 개화는 이 개념이 조선반도에 들어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고, 이후 부모가 정해준 정혼자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결혼하겠다는 개념이 생긴다. 1910년도부터 몰아치기 시작한 광풍은 기존 기성세대 = 꼰대의 저항과 힘겨운 싸움을 하다가 1920년대가 되어서야 제대로 된 목소리가 되었다. 


계기가 된 사건... 이라기보다는 주목받은 사건은 정차숙 사건이다. 그녀의 부모는 딸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혼처를 구했는데 그녀는 이에 반기를 품고, 신식 연애를 하던 박평길과 혼인을 하고 집에 통보하다시피 알린다. 


요즘 같아도 집이 뒤집어질 판인데 당시엔 오죽했으랴? 정씨 문중 전체가 분노해서 이들을 진짜로 죽이려고 달려드는 바람에 부부가 먼 곳으로 도망갔다는 것이 1924년 1월 5일 자 동아일보 기사에 실려있다. 문제는 이런 사건이 다발했다는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그 전에는 말없이 받아들이던 부모가 정해준 혼인도 끝까지 저항해서 이혼하는 사례가 늘었다. 심지어는 상대가 마음에 들지만 부모의 의지대로 한 결혼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하는 사례마저 있었다. 결국 이런 사회적 변화 부모가 1차적으로 정한 사람을 만나보고 스스로 결정하는 형태, 즉 과도기를 거쳐 우리가 아는 형태가 되었다. 



변화는 새로운 시장을 낳고


새로운 결혼문화가 등장하자 조혼은 물론 기존의 전통혼례도 기피당했다. 형식 자체가 부부가 주인공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부모가 아무것도 모르는 부부를 맺어준다는 형식이었는데 (그래서 신방을 구멍 뚫어서 보는,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마저 있었다) 자신들의 의지대로 결혼하는 사람들이 전통혼례를 치를 리 없었다. 


그래서 젊은이들은 서양식 예식을 치를 수 있는 교회로 가기 시작했다. 교회 신자들은 서양식 예배를 치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교인들을 중심으로 불만이 터져 나왔다. 교인도 아니면서 예배당에서 결혼하는 것이 말이 되느냐?


세상에는 시대를 빨리 잡는 눈치꾼이 있는 법, 예배당이 아닌 곳에서 면사포를 쓰고 결혼할 수 있는 사업이 태어났다. 이는 어려운 경제환경에 맞추기 위해, 부모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전통혼례를 거부하는 과정에서 퍼져나갔고 1937년에는 군수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조선총독부가 전통혼례를 금지시키고 신사(神社)에서 결혼하는 일본식 혼례를 장려하는 과정에서 더욱 커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당시 트렌드의 주 수입처, 일본에서 또 다른 물결이 온다. '신혼여행'이었다. 전통혼례에는 없던 이 절차는 여성이 고된 시집살이를 준비하기 전에 치르는 마지막 위안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졌고, 결국 1970년대, 한국의 경제가 성장하는 과정과 더불어 하나의 결혼 시스템으로 굳어졌다. 


마치며

최근 들어 일본과 위안부 합의를 치른 과정, 그것조차 이행하지 않고서 동결조치를 취하자 분노하는 모습 그리고 독도에 대한 시비를 거는 과정에서 반일감정이 날로 커져가는지라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일본이 끼어있는 건 씁쓸하면서 아이러니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저자가 이 글에서 말하고 싶은 건 다음과 같았다.


첫째, 조혼에 대한 반대

조혼이 있던 곳은 비단 이 나라만이 아니고 심지어 현재도 조혼이 행해지는 나라가 있다. 하지만 최근 현대의학은 13세 이전의 아이의 성행위, 출산이 극히 위험함을 말하고 있고 따라서 어른들의 기득권과 낡은 인식을 위해 아이들을 희생시키는 조혼은 반대한다. 


둘째, 인간 의식의 성장과 기본 문화의 조화

서양의 신식 결혼을 들여온 것은 배재학당을 세운 선교사인 아펜젤러였다. 이런 개념의 변화는 뚝딱 생긴 것이 아니라 서서히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의식, 해외 문물의 도입, 조선을 통치하던 일제강점기의 통치 정책과 맞물려 서서히 변해갔다.


이렇게 변화한 결과 지금 한국의 결혼문화는 나름대로 독창적이 되었다. 1차적으로 신식 예식을 치른 후 예복을 갈아입고 2차인 전통혼례와 폐백을 치른다. 검약이 중심인 신식 혼례를 치름에도 부모들에게까지 챙겨주는 혼수가 남아있다. 또한 길일을 택하고 궁합을 보는 전통혼례의 흔적도 남아있다.


셋째, 산업의 변화

산업은 문화와 의식의 변화를 따라간다. 신자가 아닌 사람이 신식 결혼을 올리는데 대한 반발이 일어나자 교인이 아니라도 예식을 대행할 수 있는 산업이 일어났으며, 일본에서 신혼여행이라는 트렌드가 들어오자 경제성장과 맞춰서 신혼여행을 대행해주는 업체가 나타났고, 이들의 홍보(?) 덕에 신혼여행은 안 가면 큰일 나는 것이 되었다. 


결론, 인간사회의 의식 성장, 환경변화, 산업의 성장은 굉장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간의 영향으로 새로운 문화를 낳는다는 것.  


역사 리더십 경영 매거진의 테마를 바탕으로 새로 엮어낸 <조선 리더십 경영> 이 와이즈베리/미래엔에서 2018년 11월 하순 출간됩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메일 : inswrit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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